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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문행(文 行)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남평문씨] 문기우(文起佑)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남평문씨] 문승수(文承洙)
문승수(文承洙)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남평문씨] 문헌징(文獻徵)
자(字)는 성언(聖言).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남평문씨] 문여(文 勵)
자(字)는 자선(子善), 호(號)는 운계(雲溪). 1553년(명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정자(承政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토적(討賊)의 공(功)으로 2등훈(二等勳)이 되고,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공(錄功)되었다. 헌납(獻納)․교리(敎理)․대사간(大...
[남평문씨] 문여량(文汝良)
조선 때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하였다.
[남평문씨] 문손관(文孫貫)
조선조(朝鮮朝)에 사성(司成)을 지냈다.
[남평문씨] 문경동(文敬仝)
1457(세조 3)~1521(중종 16) 자(字)는 흠지(欽之), 호(號)는 창계(滄溪). 1495년 (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벼슬을 거쳐 비안 현감(比安縣監)․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를 역임하고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등을 지냈다.
1508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공...
[남평문씨] 문걸(文 傑)
?~1500(연산군 6) 초명(初名)은 빈(彬), 자(字)는 언장(彦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영동현감(永同顯監)․헌납(獻納)을 지내고 1499년(연산군 5)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남평문씨] 문근(文 瑾)
1471(성종 2)~? 자(字)는 사휘(士輝), 호(號)는 매계(梅溪).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508년(중종 3) 금산 군수(錦山郡守)...
[남평문씨] 문관(文 瓘)
1475(성종 6)~1519(중종 14) 자(字)는 백옥(伯玉), 호(號)는 죽계(竹溪). 1507년(중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하여 전임(前任)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후문(前鄭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地平)을 거쳐 1518년 주청사(奏請使)...
[남평문씨] 문홍도(文弘道)
1553(명종 8)~? 자(字)는 여중(汝中). 진사(進士)로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地平)․장령(掌令) 등을 지내면서 북인(北人)에 가담, 정인홍(鄭仁弘)의 일파가 되어 임진왜란 때 강화(講和)를 주장한 남인(南人)인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축출했다. 후에 평안도 어사(平安道御史)․수...
[남평문씨] 문위(文 緯)
1555(명종 10)~1632(인조 10) 자(字)는 순부(純夫), 호(號)는 모계(茅溪), 통정대부(通政大夫) 산두(山斗)의 아들. 거창(居昌)출신. 정 구(鄭 逑)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義兵大將) 김 면(金 沔)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김 면이 병사(兵使)하자 뒷일을 맡아 처리했다.
후에 부제학(副提學) 김 옹(金 顒)...
[남평문씨] 문덕교(文德敎)
1551(明종 6)~1611(광해군 3) 자(字)는 가화(可化), 호(號)는 동호(東湖),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오(鰲)의 아들.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왜적(倭賊)과 항거하다가 순절하였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남평문씨] 문삼(文 參)
자(字)는 여로(汝魯), 호(號)는 백초당(白草堂). 조선 때 진사(進士)로서 형 벽(壁)과 함께 지극히 부모를 공양하더니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3년 여막(廬幕)할 때 근처의 풀잎이 빛을 잃다가 3년 후에 빛이 돌아오니 그 마을을 백초동(白草洞)이라 하였다. 장흥(長興)의 백동사(白洞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