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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 정시휘(鄭時輝)
당대(當代)에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이 뛰어났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경주정씨] 정인중(鄭麟重)
1675(숙종 1)~1721(경종 1) 자(字)는 숙수(叔脽). 이량(爾亮)의 셋째 아들. 남달리 총명하여 성년(成年)이 되기 전부터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며 19세에 경악(經幄)의 석보(碩輔)가 되었다. 1720년(숙종 46)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이르렀으며, 4대신(大臣) 조태채(趙泰采)․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이이명(李頣命)과 이홍...
[경주정씨] 정동윤(鄭東潤)
1696(숙종 22)~1782(정조 6) 자(字)는 윤경(潤卿), 호(號)는 송재(松齎). 1735년(영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경주정씨] 정윤필(鄭潤弼)
1739(영조 15)~1817(순조 17) 효성이 지극하고 친족(親族)에게 우애가 깊어 경주 영장(慶州營將)을 지낼 때 백운대(白雲臺) 시조(始祖 : 지백호)의 묘소 및 신라시대 열위(新羅時代列位) 묘소와 중시조(中始祖 : 문정공)의 묘소를 개봉(改封)하였으며 표석(表石)을 세웠고,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매년 10월 10일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
[경주정씨] 정성현(鄭星炫)
1747(영조 23)~1833(순조 33) 초명(初名)은 윤와(允萵), 자(字)는 준양(埈養).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경주정씨] 정빈(鄭 贇)
1747(영조 23)~1810(순조 10) 백부(伯父) 인하(仁廈)에게 입양. 효성이 지극하여 손가락을 잘라 양부모님의 병환이 호전되게 하였으며, 미강서원(眉江書院)을 중수(重修)하였다.
고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효행을 영읍(營邑)에 올리니 순찰사(巡察使) 한경이(韓競履)가 조정(朝廷)에 알려서 특별히 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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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 정무(鄭 珷)
자(字)는 자윤(子潤), 호(號)는 성재(省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현 찰방(省峴察訪)을 지냈다.
[경주정씨] 정준교(鄭俊僑)
자(字)는 준언(俊彦).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경주정씨] 정익현(鄭益炫)
1745(영조 21)~? 자(字)는 군양(君養), 호(號)는 칠성재(七星齋). 조선 때 문명(文名)이 높은 학자(學者)였다.
[경주정씨] 정대현(鄭大鉉)
1830(순조 30)~1914 자(字)는 군중(君中), 호(號)는 성재(醒 齋). 이순영(李純榮)의 문인.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배 양성을 위하여 서재계(書齋契)를 설립하여 훌륭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경주정씨] 정진해(鄭鎭海)
1839(헌종 5)~1907(순종 1) 초명(初名)은 진행(鎭行), 자(字)는 여오(汝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대구진관 병마동절제사(大邱鎭管 兵馬同節制使) 등을 지낼 때 청렴결백한 관직생활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경주정씨] 정대섭(鄭臺燮)
1868(고종 5)~1943 초명(初名)은 대훈(臺薰), 자(字)는 치수(致壽), 1902년(광무 6) 승훈랑(承訓郞)으로 평안도 관찰부주사(平安道觀察府主事)를 거쳐 판임관(判任官) 6등에 올랐다.
[경주정씨] 정규해(鄭糺海)
1890(고종 27)~1970 초명(初名)은 종해(宗海), 자(字)는 치정(致正)․한조(漢朝), 호(號)는 명와(明窩) 윤응선(尹膺善)의 문인.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주경(主敬)․거송(去松)․구인(求仁) 세가지 안법(安法)을 깊이 체험한 대학자(大學者)이다. 음성(陰城)의 충룡사(忠龍祠)에 배향되었다.
[경주정씨] 정찬해(鄭纘海)
1899(광무 3)~1970 자(字)는 치선(致善), 호(號)는 계은(溪隱). 정규해(鄭糺海)의 문인. 평생을 맹자(孟子)를 통독하고 대학(大學)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정양재(鄭養齋)를 지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순창조씨] 조세구(趙世球)
자(字)는 여조(汝調), 호(號)는 송재(松齋).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문명(文名)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막연한 사이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대윤이 정권을 잡아 단경왕후 신비를 폐출하고 이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것을 보고 벼슬할 것을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