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영남 사림(嶺南 士林)의 종장(宗匠) - - -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公

원주이씨 21세,

작성일 : 2019-07-12 04:26 수정일 : 2019-07-26 10:09

원주이씨 21嶺南 士林의 宗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눌은(訥隱)  이광정(光庭공은 경상북도 봉화(奉化)에서 출생하셨다. 그러나 공의 증조부 묘소가 원주시 흥업면 서곡리에 있고 조부 때에 봉화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 상당기간 원주에 와서 공부했고 소과(小科)도 원주에서 치렀으며 사마방목(司馬榜目) 원주향교지(原州鄕校誌) 등에 그 명단이 올라있다.  광정공의 조부 시암(時庵)공은 원주인이면서 봉화인이다. 말하자면 봉화지방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신다. 시암공으로 부터 뿌리가 내려 봉화인들의 긍지를 높여 주는 대학자가 나셨고 명문가(名文家)로 성장했다. 시암공은 160726세 때 진사(進士), 27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재이시다. 34세 때 이미 함경도와 강원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안동(安東)에 은거하셨다.

안동은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에서 한양을 제외하고 과거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웬만한 가문과 학문의 배경이 없고서는 감히 범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한 안동에 들어가 시암공께서는 많은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38세 때 병이 깊어 신병을 치료하려고 봉화로 이사했으니 공의 안동생활은 약 4년 정도였다. 문집(文集) 4권이 전한다.

광정공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또는 녹문산인(鹿門山人)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세에 논어를 모두 외웠고, 十五세에 경을 통달한 천재였다. 그러나 세상 명리에 뜻이 없어 진사시에 올라 사마방목에 올랐을 뿐 대과는 외면했다재신(宰臣)들의 추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 등으로 등용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는데 문하생이 백명을 넘었다.

 

광정공은 효도와 우애가 남다르고 덕행과 절개와 지조가 맑고 깨끗해서 영남 일대에서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다. 영남 사대부 가문에서는 눌은공의 문장이나 시 한 편이라도 서재에 비치해야 선비로서의 자긍심이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후일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문장(文章)은 영남일대에서 백년 이래 이런 글이 없었고 그 빛이 창연하여 뒤에 드리움이 분명할 것이다.

라고 극찬했다. 광정공은 숱한 유문집(遺文集)을 남겼다. 손자 종훈(宗勛)공과 문인(門人)들이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두고 자금사정이 어려워 출판하지 못했다. 돌아가신지 五十二년 뒤인 1828二十二十一八六一()목판 초간본(初刊本)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화재로 소실된 글도 많다고 하니 아쉽다.

이때 교정(校正)을 본 분들이 명재상으로 알려진 채제공과 이상정(李象靖)선생이었다. 눌은문집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분들이 눌은공을 얼마나 흠모하고 높게 평가했는지 여러 곳에서 격찬하는 글이 발견된다지금 목판 원본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돼 있다.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강원대학교 등에서 이를 교재로 활용하며 눌은 연구로 배출된 석사 박사도 많다.

눌은문집을 살펴보면 사() () () () () () () () () () () 행장(行狀) () 유사(遺事) 등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다.

1756년 광정공께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증직을 내렸다. 이는 종품으로서 대학자에 대한 지극한 예우였다고 할 수 있다八十三세로 돌아가셨는데 채제공 선생이 묘갈명(墓碣銘·비문이헌경(李獻慶)선생이 묘지명(墓誌銘 : 죽은 사람의 행장 따위를 적어 관과 함께 묻는 글이상정(李象靖)선생이 행장(行狀 : 죽은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김한동(金翰東)선생이 유권(遺券)에 대한 뒷글을 찬()했다.

1) 訥隱선생 行狀記

원문 : 김홍구(金鴻九원문 생략 해석 : 이재훈(李在熏)

선생의 이름은 광정(光庭)이시오 자()는 천상(天祥)이시며 原州李氏이시다. 숙종대왕 갑인년 二十四일에 탄생하셨는데 세에 논어(論語)를 모두 외고 十五세에 (六經)을 통달하여서 덕행을 닦고 뛰어난 문장(文章) 능력을 갖추었다.

숙종 을묘에 후릉참봉(厚陵)과 병진년에 장릉참봉(莊陵)을 역임하셨다. 임술년에 선공감역(繕工監役), 갑술년에 익위사(翊衛司 : 세자 익위사의 준말, 조선 때 왕세자의 시위를 맡은 관아) 익위(翊衛 : )등을 제수했으나 곧 사양하고 향리에만 묻히니 노년 청직(老年 淸職 : 노인에게 내리는 명예직)을 내렸다. 선생의 도()와 덕()이 숭고하였다.

당시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공이 선생의 덕행과 절조를 찬양하여 본군(本郡 즉 경북 봉화군)의 도훈장(都訓長 : 교육 책임자)으로 추대하여 일군 교화(一郡 敎化)와 도덕을 강의하게 하려고 근방 사람들에게 선생이 계신 곳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기해년(己亥年)에 소천산중(小川山中 : 작은 개울을 낀 산골)에 입주하시어 산수(山水)와 풍월(風月)로 벗을 삼고 소농경작(小農耕作)은 이웃의 부조(扶助)로 어렵게 생활하신다.고 하였다.

선생이 거주하시는 녹문산장(鹿門山莊)을 방문 답사한 후 이런 정황을 조정(朝廷)에 상고(上告)하여 녹문동 일구(鹿門洞 一區)를 입안(立案)하여 선생의 종신처(終身處 : 땅을 평생 빌려주어 근심 없이 살게 하는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를 삼게 했다그러나 을묘사화(乙卯士禍)로 서원(書院)이 불타고 입안지(立案地)가 회수되므로 봉화현감(奉化縣監) 윤일원(尹日遠) 선생이 찾아와 위문하고 식량을 부조하였으며 군민(郡民)을 동원하여 가옥을 개축해 주었다이런 덕택으로 선생께서 만년(晩年)까지 안주(安住)하시다가 八十三세로 돌아가시니 병자 월 초일이며 서기로는 一七五六년이다.

당시의 학자들이 선생을 칭하여 녹문산인(鹿門山人)이라 하기도 하고 또 눌은(訥隱)선생이라고도 했다. 선생의 탁월한 문장과 위대한 지조와 덕행은 가히 우리 동방의 문학대가(文學大家)이시다다만 슬픈 것은 선생의 행적과 문체필법(文體筆法)이 당대에 둘째가 아니었건만 경상북도 한 모퉁이에 두문칩거(杜門蟄居)하여 공명(功名)을 멀리하시고 배우고 가르치심을 게을리 아니함을 낙()으로 삼으셨다.

불초(不肖) 제자의 한 사람으로 사모하는 행적(行蹟)을 간단히 기록함.

 

행장기(行狀記) 해설

눌은 선생의 행장기(行狀記 : 사람이 죽은 뒤 평생에 지낸 일을 적은 글)를 적은 분은 눌은 선생의 제자 김홍구(金鴻九)씨다. 그의 자는 삭구(朔九) 호는 용봉(龍峰)이며 광산인(光山人)이다.

김홍구 선생도 스승인 눌은의 영향을 받아 제자를 기르고 유유자적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선비의 길을 걸어온 분이다. 세상 명리를 외면하고 학문에 정진했다눌은선생 행장기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눌은 선생은 경북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 삼동리(三洞里)에서 탄생하셨다. 숙종조(肅宗朝)에 청직(淸職)을 두루 섭렵했다청직은 청관(淸官 : 청환이라고 읽는다.)을 말하는데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내리는 벼슬이다. 규장각 홍문관 선전관청 따위의 벼슬로서 지위와 녹봉은 높지 아니하나 뒷날에 높이 될 자리이다여러 청직을 지냈으나 실제로 벼슬길에 나아간 경우는 별로 없다. 관직을 제수 받는 즉시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는 터였고 오로지 제자를 가르치는 데만 몰두 했다. 문헌에 기록된 문인(門人)만도 백이 넘는다제자를 기르며 많은 저술을 남기니 영남일대(嶺南一帶) 사림(士林)의 종장(宗匠 : 경학에 밝고 글을 잘 하는 사람으로서 율곡이나 퇴계 선생이 이런 칭호를 들었다.)이라 했다.

눌은 선생의 유문집(遺文集) 二十一권의 목판원본은 칸 서재에 가득 찰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제향은 유림에서 봉안해왔고, 돌아가신 후 행장(行狀)은 판서를 지내신 이상정(李象靖), 묘지명(墓誌銘 : 죽은 사람의 행적 따위를 적어 관과 함께 묻는 글)은 역시 판서를 지낸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선생이 썼다. 문집의 서문은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썼다.

 

2) 訥隱文集

눌은문집은 초본(抄本) 123권 부록(附錄) 권이었다. 이것이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화재를 피한 것과 문인(門人)들이 가지고 있던 것, 기억을 되살린 것 등을 합해 21권으로 편집했다눌은문집 간행에 대한 글 글쓴이 : 눌은 문인(訥隱門人) 김한동 원문 : 생략 해석 : 이재훈(李在薰)

譯文

영조대왕 三十二년에 선생이 하세하셨으며 고을의 선비와 노인들이 장사지내고 서로 의논하되 선생의 남기신 글을 후세에 전해야 된다고 해서 고을에서 각각 약간의 돈을 수합하여 화재에 타고 남은 문집을 판각키로 결정하고 편집한 후 교정을 대문학가에 의뢰하여 간략하게 二十一권을 판각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니 뒤를 이어 닦고 배우기 바라노라.

후학(後學)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 사간원(前行司諫院) 대사간(大司諫) 김한동(金翰東) 근식(謹識)

3)  눌은文集 目次

譯文

 

눌은 선생의 문인 중 고위 관직을 지낸 분도 많이 나왔다. 김한동 선생만 해도 대사간이었는데 ()이라고 한 것은 관직(官職)보다 관계(官階)가 높았다는 뜻이다. 대사간이 정품이었으니 관계는 품이었다는 말이 된다대사간은 사간원의 책임자로서 임금에게 직간할 수 있는 자리다. 임금의 잘못까지도 따져야 하는 자리이므로 청렴한 관리가 아니면 앉을 수 없는 자리였다. 이런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으니 눌은 학맥(訥隱學脈)이 면면히 이어져 온다고 하겠다. 다만 눌은학을 키우고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죄송할 따름이다.

() : ()으로 된 말을 사용하는 한문체  () : 한시체(漢詩體)의 하나로 감상을 적은 글, ()

() : 임금에게 올리는 글 () ()을 주해(註解) 한 것, 주해란 본문 사이에 주석을 내려 뜻을 밝힘, () : 기전체(紀傳體)의 역사 서슬에서 사회문화제도 천문 따위의 서술

()

잡저서(雜著書) : 여러 가지 내용의 글을 묶은 것

() : 서문과 서론의 준말

) () : 사적(事蹟)이나 경치를 적은 글, ) () : 발문의 준말로 책 뒤에 붙이는 글, 편집후기 같은 것

) () : 공덕을 기리거나 경계하는 글, ) () : 가르쳐 경계하는 뜻을 붙인 글,  ) () : 남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는 글

) 상량문(上樑文) : 상량을 축복하는 글 -상량은 집을 지을 때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올리는 일, ) 주사() : 잘못됨을 꾸짖는 글

) 제문(祭文) : 죽은 이에 대하여 슬픈 뜻을 표현한 글, 흔히 축문처럼 읽는다) 축문(祝文) : 제사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 -고정된 형식의 축문은 글에 취약한 일반인을 위한 것이고, 학문이 높은 사람들은 축문도 지어서 읽었음.

十一 ) 비명(碑銘) : 비면(碑面)에 새긴 글, ) 묘갈(墓碣) : 묘 앞의 작은 비에 새긴 글

十二 묘갈

十三 ) 묘갈명(墓碣銘) : 묘갈과 같은 뜻, )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행적, 자손의 이름, 묘지의 이 , 나고 죽은 때 등을 기록한 글로서, 사기판에 적거나 돌 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다.

十四~十五 묘지(墓誌)

十九 행장(行狀) : 사람이 죽은 뒤 평생의 지낸 일을 적은 글, (傳記) 같은 것

二十 ) 유사(遺事) : 예로부터 전해오는 사적 또는 죽은 사람이 남긴 생전의 사적, ) () : 전기의 뜻을 나타내는 말

二十一 ) 망양록(亡羊錄)  ) 부록(附錄)

 

4) 눌은선조 시(訥隱先祖 詩)

 

柳蓮松梅 月梧菊竹 류연송매 월오국죽

白白盈盈玉雪姿 晦翁當日無言句 數庭前紫玉女 軒成此日聞瑤佩 백백영영옥설자 회옹당일무언구 수탁정전자옥녀 헌성차일문요패

先春生意動南技 留興精神月下知 吟風如露俗塵疏 餘猶作食舍魚 선춘생의동남기 류흥정신월하지 음풍여로속진소 여박유작식사어

 

玲瓏琪影倚岩寒 會待象芳搖落盡 春夏尋常衆草 多年托契陶彭澤 영롱기영의암한 회대상방요락진 춘하심상중초군 다년탁계도팽택

風送餘凉翠上欄 且將淸致雪中看 霜前孤笑玉氤氳 千載幽貞獨有君 풍송여량취상란 차장청치설중간 상전고소옥인온 천재유정독유군

 

江南兒女采菱歌 好德幸逢無極老 亭亭濯立倚朝陽 好是月圓虛室白 강남아녀채능가 호덕행봉무극로 정정탁립의조양 호시월원허실백

只愛花容豈識花 花中君子君家 容淨神閒碧玉莖 瑩然遙恒不勝淸 지애화용기식화 화중군자속군가 용정신한벽옥경 형연요항부승청

 

濃綠蔭門拂地垂 自從安樂官守 七玉岩扉各天機 誰知此夜無窮妙  농록음문불지수 자종안악참관수 칠옥암비각천기 수지차야무궁묘

晩風輕弄玉絲絲 不作風流路上枝 氷輪萬里廻通暉 不遣塵埃一默飛 만풍경롱옥사사 부작풍류로상지 빙륜만리회통휘 부견진애일묵비

 

中宵瑤鏡一般新 自是淸明元本體 중소요경일반신 자시청명원본체 盧眞方知氣神 祗悉沒上埃塵 로진방지매기신 지실매몰상애진

 

5) 망양록(亡羊錄)

눌은 선조께서 엮은 한문 단편집으로 눌은문집 二十一권에 실려 있다. 작품의 저작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六十 이후 노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민중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던 속언 고어들 가운데 경세에 도움이 될 만한 二十一편의 이야기를 세련된 문장으로 엮어놓은 이야기 모음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은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해학과 기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그린 해장(蟹醬), 노파의 (老婆之五樂), 호예(虎絆) 등의 이야기다.

특히 노파의 오락은 망양록의 四分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그 내용은 옛날 한 관리가 고을을 행차할 때 조그마한 움막에서 곱추병을 앓는 노파를 만난다.

이런 곳에 살면서 인생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그 나름의 낙이 없겠습니까?⌟  노파가 주장하는 즐거움은 다음과 같았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군역을 면제 받고, 미천하기에 마음이 편하고, 일하기에 하늘의 재앙이 없으며, 병들어 있기에 세금독촉과 관리의 횡포가 없으며, 춥고 배고픈 날을 견디면 좋은 날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근(賤近) 유재(遺材) 망사(網士) 도학선생(道學先生) 등은 당시 과거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인재등용의 난맥상을 풍자한 작품들이다. 이렇게 사회문제를 풍자 수법으로 다룬 작품 외에도, 건전한 인격형성에 보탬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우화적 수법으로 표현한 작품들도 있다. 지나친 욕심 오만 허명(虛名)을 경계할 것과, 보은과 참된 우도(友道)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망양록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필치로서 독자에게 유려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는 사기(史記)와 장자(莊子)의 영향인 듯싶다. 망양록은 조선조 한문소설 특히 야담계 한문소설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망양(亡羊)이란 무엇인가? 장자(莊子) 외편(外篇)과 전국초책(戰國楚策) 그리고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등장하는 말이다. 이가원(李家源) 교수는 망양록의 제목이 장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았다.

·장자 자기 본분을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뜻, ·열자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구하지 말라 -·전국초책 양을 잃고 울타리 고친다는 뜻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一七一九 ~ 一七九一)선생은 망양록에는 우언(寓言)으로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뜻이 들어있다.했다. 즉 당시의 사회와 세태를 우화적 수법을 통해 풍자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언집(愚言集)이라고도 하는데, 눌은문집 편집자들은 만록(謾錄)으로 분류했다.

 

눌은 선조께서는 평생 지방에 은거하신 선비로서 독서 수행과 젊은이 교육에 매진하셨다. 사대부 계층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가난했다. 과거를 포기하고 민중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누렸다선조께서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고 하셨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교훈이 될 줄로 믿는다.

. 벗을 사귀면서 그 사람을 모르는 것, . 말을 하면서 신중하지 않은 것. . 지나치게 영리한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것

 

눌은 선조께서 남기신 글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고 양이 방대하여 끊임없는 연구가 지속돼야 할 것이다. 눌은학(訥隱學)의 극히 한 부분을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학자들이 많고, 눌은문집 영인본(影印本)은 전국의 대학이며 도서관에 보급돼 있다. 또한 정부에서 문집 전체를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데 소요되는 경비만도 수억 원이다눌은학은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된다. 눌은학은 심포지움 등을 통해 정보 교환과 연구 진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눌은학은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된다. 눌은학을 바탕으로 석·박사가 된 분들이 많다. 이 분들을 지원하고 또한 눌은학을 발전시킬 선봉장으로 모셔야 한다. 영남에서는 눌은 선조의 후학들이 아직도 눌은을 사모하고 존중하는데 정작 우리 문중에서는 도외시 하거나 모르는 처지이니 너무나 안타깝다.

눌은 이광정의 망양록 연구라는 주제로 1984년 김영박사가 쓴 논문이있고, 한국 고전 연구 제 13(2006년 판)에는 강석숙 박사의 연구 논문이 실려 있다. 그 책 165~196쪽까지 무려 31쪽에 걸친 방대한 양이다또한 성균관대 국문과 박사 논문을 쓴 김명균 박사는 안동 임하 천전리의 의성김씨 종가 출신이다. 이 분의 박사 논문 축하연에 안동 일대의 한학계가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고 한다그 외에도 눌은학 연구자들은 부지기수다. 이 분들을 우리가 지원하고 후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들의 학문적 성취욕이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6) 눌은 선조의 문인(門人)

 

눌은 선생의 제자는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많은 제자들 대부분이 스승을 따라 관직이나 세상 명리를 외면하고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기르는데 힘썼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기르고, 그중에 일부는 과거를 보아 국정을 다스리는데 힘쓰기고 했다눌은공의 직접 제자는 아니더라도 한 대를 건넌 제자 중의 한분이 번암(樊菴) 채제공(蔡濟恭)이다. 이분에 대해서는 항을 달리해서 기술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다만 그가 눌은공 문집의 서문과 묘비명을 썼다는 점만으로도 눌은 선생에 대한 흠모가 컸음을 알만하다. 눌은과 번암은 46년의 세차가 있다.

눌은공 제자의 대표적 인물은 이상정(李象靖 1710 숙종 36~ 1781 정조 5)이다. 이 분은 번암공보다 더 나이가 많지만 눌은공의 직접 제자였던 것 같다. 눌은공이 워낙 장수를 하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상정공은 호가 대산(大山)으로 한산인(韓山人)이며 사마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오른 분이다. 벼슬이 승승장구하여 참의(參議)에 까지 올랐으나 사양하고 고향 안동 대석산에 은거했다. 여기에 대산서당을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했다.이상정공께서 눌은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행적 따위를 적어 관과 함께 묻는 글이다. 묘지명은 제자나 가까운 친구들이 쓰는 게 일반적이다.

이기(李箕 1699 ~ 1779)공은 고성이씨로서 경상북도 청도에서 박리원(朴履遠)과 함께 유학 와서 수학했다. 스승을 따라 그도 학문의 길을 걸었고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그는 몇 개의 호를 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용산(龍山)이다. 나중에 용산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길렀고 용산집(龍山集) 4권을 남겼다. 또한 용산사(龍山祠)에 배향되기도 했다눌은공께서는 제자나 유학자들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그 떄의 간찰(簡札 : 편지) 일부가 성호기념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48X40cm 정도의 간찰인데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눌은공이 61세 때 경상감사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임금에게 추천했다. 효렴(孝廉 : 효행과 청렴)과 문학에 있어 영남 제1인자라고 했다. 임금인 영조가 남국(南國 즉 영남)은 우리나라의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이니, 그곳의 1인자라면 당대 제일인자가 아닌가얼마뒤에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 김재로(金在魯)가 영남에서 가장 훌륭한 문장가 4을 추천할 때도 그 첫머리에 눌은공을 올렸다. 그리고 그를 칭찬하는 글에 문학에 능하나 과거를 보지 않으며 청렴하면서 제자를 교육하니 향리의 신망이 높다고 했다그 후에도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눌은공을 도 1위로 추천했다.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응분의 벼슬을 내렸지만 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동부 도훈장(都訓長)일 때 큰아들을 잃은 아픔도 겪었지만 아픈 가슴을 제장자문(祭長子文)으로 달래기도 했다.

 

눌은공은 대학자들의 책을 많이 교감(校勘)하고 또 서문도 찬술했다. 교감이란 같은 종류의 여러 책들을 비교하여 잘못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을 말한다. 남의 글을 교감하려면 필자 이상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눌은공께서 교감한 책은 류운룡의 겸암집, 이덕홍의 간재집, 이후경의 와재집, 조임도의 간송집, 조극도의 대소헌일고, 권벌의 충재집 등이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의 행장 묘지명, 묘갈명, 축하문등을 남겼다이러한 까닭에 영남지방, 특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은 눌은공의 행적과 문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송록서원(松麓書院) 경북 봉화군 봉화읍 소재

<배향> - 유숭조(柳崇祖) 김중청(金中淸) 이종준(李宗準) 이홍준(李弘準) 정유일(鄭惟一) 홍준형(洪浚亨) 김성구(金聲久)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광정(李光庭)

눌은 이광정이 지은 雙碧堂十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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