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

작성일 : 2019-06-05 08:58 수정일 : 2019-07-12 04:26

▶--- 동방의 유학은 학문과 도의의 근간이니, 이 사상을 더욱 넓혀 이었고 이 높은 이상을 그대로 실천 수범한 진정한 목민관으로는 백성을 하늘로 여겼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선생을 손꼽는다. 퇴계 선생은 요절한 이 제자의 명정에 ‘先生’이라고 쓸 정도로 예우하고 행장을 직접 쓰며 애통해 했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 글귀는 이성원(李性源 박사 : 성대 한문학과 졸, 국학진흥원연구원 도산수련원 강사, 청량산 문화연구회장)씨의 단행본 제목이기도 하며,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이 1557년 5월 7일 明宗에게 올린 상소문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중의 한 구절을 번역한 내용이기도 하다.

금선정 편액과 전경

금계 선생이 41세 때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단양 주민들의 고난을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상소한 글로 “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러 적폐 때문에 우리 백성이 살아 갈 수 없으니 이를 어찌 관청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5,001자의 ‘단양진폐소’ 상소문은 먼저“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하고 10가지 조목의 계책을 제시하고 10년동안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했다.

“(…) 부역에 나갈 수 있는 가구가 40호도 되지 않고, 한 집이 100호의 부역을 부담합니다. 힘껏 밭 갈고 농사지어도 세금과 부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는 병들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흩어져 땅은 텅 비었습니다. 농토와 마을을 버리고 이슬을 맞으며 산속에서 살다가 승냥이나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으니 (…) 온 고을이 폐허가 돼버렸습니다.”라고 당시 실상을 상소하였다

금계선생 탄신 5백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마치고. 2017. 09. 22 영주시민회관

이에 명종은 크게 감동하여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하며 앞으로 10년 동안 20여 가지 공납과 세금을 특별히 감면하라“ 했다.

주민의 즐거움은 말 할 수 없었다. 유민들이 돌아왔고 굴뚝엔 연기가 다시피어 올랐다. 이렇듯 훌륭한 목민관으로 단양을 부활시키고 다시 성주목사(정3품)로 부임하여 고을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많이 주도록하기 위해 백학서원, 영봉서원, 공곡서당,녹봉정사   등을 세우거나 손질해서 교육을 시켰다. 이렇듯 진정 백성 편에 서서 공무를 수행하고 학문에도 성취하시어 퇴계 선생이 16세나 어린 제자이신 금계 선생이 47세로 일찍 돌아가자 손수 명정

제문도 짓고 행장까지 쓰셨다는 것은 퇴계 선생이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퇴계선생이 수많은 글을 쓰면서도 타인의 행장을 다섯 사람밖에 안썼는데 그중 한분이 금계 선생이다.

퇴계선생이 행장을 쓰신 분은 ① 명종대왕 행장 ② 농암 이현보(1556년) ③ 금계 황준량(1563년) ④ 정암 조광조 ⑤ 회재 이언적 ⑥ 충재 권벌 ⑦ 부친 이식 등 일곱 분인데 그중 임금과 부친을 빼면 다섯분으로 금계선생을 제외하면 당시 벼슬로 보나 명망도를 보면 금계 선생은 뜻밖이다 할 것이나 퇴계 선생이 행장을 쓰실 만 하다면 이 어른의 행신이나 학문적인 성취도가 남달랐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금계선생은 짧은 삶(47세 요절)을 사셨지만 1,000여편의 시를 남기고 수많은 글을 남기시고 청백리로 짧은 생을 사셨지만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금계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2일엔 영주 시민회관에서 “금계 황준량 선생의 사상과 생애“라는 주제로 학술 대회가 성황리에 개최 되었다. 이날 학술대회 주제는 ① 금계 황준량의 생애와 기념비적 발자취(강구율 동양대교수) ② 금계 황준량의 수창시 연구(이종호 안동대교수) ③ 금계 황준량의 관력과 목민활동(구완회 세명대교수) ④금계 황준량의 경세의식과 정신지향(최석기 경상대교수) ⑤금계 황준량의 서원활동과 교육론(이수환 영남대교수) 등 다섯명의 학술발표가 있어 금계 선생의 功名이 강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2017년 10월 14일에는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500주년기념사업회 회장(이용태 박사 박약회 회장)주관으로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소재 금선정 일원에서 금계 황준량선생추모비 제막식 등이 내외귀빈 500여명이 참석 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다음의 추모비문을 보면 금계 선생을 일대기를 알 수 있기에 여기에 옮긴다

금계 황준량 선생 추모비문

동방의 유학은 학문과 도의의 근간이니 퇴계선생은 이 사상을 더욱 넓혀 이었고 이 높은 이상을 그대로 실천 수범한 진정한 목민관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금계 황준량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평해이며, 자字는 중거仲擧요 금계金溪는 그의 호號이다. 선생은 1517년 음력 7월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부친 치觶와 모친 창원 황씨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도시조는 신라 때 처음으로 평해 땅에 들어온 학사공 황락黃洛이다.

금계 선생 문집

고려때 시 벼슬을 한 유중裕中이 먼 조상이고 그의 아들 검교檢校 진이 선생의 파조고가 된다. 진의 증손 근瑾은 예문관직제학이었고 그의 아들 유정有定은 조선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영주에 기거하였고 그의 아들인 연鋋은 訓導로 처음 풍기로 옮겨오니 선생의 고조가 된다.

선생은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壻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의 사위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奇童으로 불렸고 문명이 자자했다. 1537년 21세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24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 공조좌랑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51년 35세에 외직으로 출사하니 오로지 백성을 위해 소임을 다하여 민폐를 일소하고 교육을 통해 유학이념을 크게 선양하였다. 신령현감으로 재직 중에는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그 이전에 쌓인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메웠으며 부채 문권을 태워버림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 향교의 문묘를 수축하고 白鶴書院을 창건했다.

단양군수 때는 장문으로 된 유명한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를 올려 백성들로 하여금 10년 동안 20여 가지의 공물을 면제 받게 하였고 단양향교를 이건 중수하였다. 성주 목사 재임 시에는 목민관으로서만 아니라 퇴계학파의 맏형이자 중심학자로서 연구와 책자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퇴계선생이 편찬하여 조선 중기 이후 性理學의 기본서로 애독됐던 朱子書節要 열책의 간행이었다. 또 迎峰書院을 중수하고 향교의 문묘를 수리하였으며, 孔谷書堂과 팔거현에 鹿峰精舍를 세워 지방교육에 심혈을 기우렸다 만년에 벼슬살이를 벗어나 고향인 소백산 아래 금수에 정사를 지어 심신을 수양하며 학문을 강론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63년 음 3월 병마로 47세에 별세하였다.

퇴계선생은 그의 명정에 先生이라고 쓸 정도로 예우하였으며 또한 먼저 떠난 제자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여 조금이나마 애통함을 덜고자 직접 행장行狀을 쓰고 두 차례의 제문을 지어 그의 일생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망우亡友라 칭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문학이 뛰어나고 소중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손수 시문을 교열하고 문집의 편차를 정하여 간행을 서둘렀다. 또한 제자가 만년에 못다 이룬 금양정사를 관리할 승려의 부역을 면제해주고 精舍를 안전하게 수호케 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간의 사랑이요 곡진한 학문적 동지가 아닌가.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후 생의 반을 관직에 종사하면서 주로 지방관으로서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선정과 서원 창건 등 교육을 강화한 것은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고 나아가 스승 퇴계의 가르침을 현실정치에 실천한 것이다. 그가 운명한 날 20여 년의 벼슬살이에도 시신을 염습할 수의조차 없었으니 진정한 선비의 청빈을 몸소 보여 주었다. 이제 금계선생 탄생 500주년을 맞아 후손들 이 비석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

고 후대에 기리고자 함에 선생의 학덕과 사적을 기술하고 짧은 송사를 지어 추모의 글을 올린다.

아 소백산 우뚝하고

금계수 도도히 흐르는 곳

그의 향기 이 비석과 함께

영원토록 우러러 뵈이리라

 

陶山書院院長 金寧 金炳日 삼가 짓고

錦溪先生 十六代孫 在國 삼가 쓰고

 

二○一七년 七월

錦溪先生誕辰五00周年記念事業會

平海黃氏檢校公派錦溪宗會 세우다

居官四箴

관직에 있으면서 지켜야 할 네가지 잠언

黃俊良

자신을 청렴하게 유지해야 한다

女汚不潔 絲染未白 名節難持 神明可欺

省事寡慾 頤神養德 四知一琴 淸風古今

 

백성을 인자하게 대하여야 한다

大德曰生 仁心茁萌 親親愛民 與物爲春

飢溺猶己 痛痒一視 胡忍不忍 瘠民肥身

 

마음을 공정하게 지녀야 한다

公聽斯明 偏信闇生 平心虛己 衆善攸止

用智徇私 邪侫泜巇 本地日月 母爲慾蝕

 

부지런히 일에 임해야 한다

分憂百里 食豊衣侈 縷絲顆粒 盡出民力

怠事曠官 宜刺素餐 警枕汗背 莅事敢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