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청백리인 것 조차 부끄럽다 豐川任氏 임호신(任虎臣)임보신(任輔臣)兄弟

작성일 : 2019-06-04 10:00

청렴결백한 관리의 표상인 淸白吏는 청렴함이 제일 큰 덕목이지만, 그보다도 백성을 위해 공정한 정치와 준법정신이 청백리의 중요한 덕목이다. 경기 양주에 모셔진 풍천임 임호신, 임보신 형제는 공평무사한 봉사(奉仕)정신으로 국사를 집행한 염근리(廉謹吏)였다.

풍천임씨 관향 풍천은 원래 지금의 황해도 송화군이었는데, 고려 공민왕 말년에 임향(任珦)이 지금의 충남 보령군 주사면에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이곳이 대대로 세거지가 되었다. 풍천임씨 종중의 선조님들 중 청백리로써 이름이 높은 분으로 임호신(任虎臣) 임보신(任輔臣) 형제분을 본란에 소개한다.

임호신 공은 중종1년(1506년)에 태어나 명종11년(1556)에 별세하였다. 자는 무백(武白), 시호는 정간공(貞簡公). 공은 대사간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임추(任樞)의 아들이며, 역시 청백리에 녹선된 임보신은 그의 아우이다. 임추도 학식이 높아서 일찍부터 세상에서 촉망을 받았으나 간신들의 농간으로 53세의 나이로 일찍 작고함으로써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호신은 약관에 성균관에 입학 수학하였는데 장구(章句)에 얽매이지 않고 경서의 깊은 뜻을 궁리 실천함으로써 모두 그를 유학자(儒學者)의 기풍이 있다고 존경하였다. 그는 중종 23년(1528), 23세 때 사마시(司馬試; 소과로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에 급제하고, 3년 뒤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처음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사학에 조예가 깊다고 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는 정9품 벼슬)로 천거되었다. 그 뒤 황간 현감, 병·형조좌랑, 교리, 집의, 사간, 직제학, 경상도관찰사, 한성좌윤, 호조판서 겸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김안노(金安老)에게 부자가 피화(被禍)

중종 28년(1533), 공이 시강원 열서(說書)로 있을 때, 그의 부친 임추가 동지사(冬至使)로 사행(使行)길에 오르게 됨에 따라서 그도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북경(北京)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명사들과 교류하여 많은 지우를 얻었는데, 중국의 선비들은 시(詩)를 지어서 보내 그를 어린 봉황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친은

병을 얻어 중국 땅에서 작고했다. 공이 너무나 애통해함으로써 이 정경을 본 중국인이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부음을 들은 중종은 그를 애석하게 여겨 관곽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평소에 그를 미워하던 김안로는 “일찍 죽어서 잘되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중종 31년(1536), 복상을 마친 임호신은 예문관 봉교로 서임(敍任;벼슬자리를 내림)되었으나 김안로 일파의 농간으로 황간 현감(黃澗 縣監)으로 외직에 나갔다. 그 이듬해 김안로, 허황, 채무택 등의 3흉이 조정에서 쫓겨난 다음에야 중앙으로 다시 돌아와서 전적 등을 거쳐 사간원 헌납으로 승진했다.

공은 꾸밈세가 없이 소탈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황간 현감으로 외직에 나갈 때에도 불만이나 불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부임했다. 3흉이 쫓겨나고 다시 조정에 돌아온 다음에도 항상 중용을 지켜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들에게도 원한을 떠나서 넓은 마음으로 관용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타고난 천성의 소치(所致; 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라고 했다.

부정한 관원은 철저히 탄핵

중종 37년(1542), 충청도 지방에는 그 전년에 흉년이 들어서 이 해의 보릿고개에는 기아자가 많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당시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는 임호신을 충청도 경차관(敬差官; 조선조 때 지방에 임시로 파견하는 벼슬로 주로 전곡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담당함)으로 임명했다.

충청도로 내려간 임호신은 정부의 쌀을 풀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구호하는 한편, 죽을 쑤어서 병든 사람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구휼(救恤)했다. 이러한 공의 정성스러운 구호활동으로 충청도 백성들은 어려웠던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임호신은 이 공적으로 그 해 여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으로 승진되었다가 가을에는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로 옮겼다. 임호신은 소탈한 사람이었으나 공사를 가려서 부정한 관원들은 철저히 다스렸다. 그래서 당시의 관원들은 그가 옛날의 어사(御使)와 같은 풍모가 있다고 존경했다.

임호신이 집의로 있을 당시 이무강(李無彊)이라는 관원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뒤에 그 사람이 다시 득세를 한 다음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임호신과 만나게 되었다. 이무강은 다짜고짜로 “몇 년 전에 사헌부에서 나를 탄핵했는데, 그 때 누가 이 일을 주동하였소?”라고 물었다.  임호신은 태연히 “그 일은 바로 내가 주관하였소.”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이무강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을 뿐 아니라, 임호신에게 화를 주지도 못했다. 임호신의 처사가 너무나 깔끔하고 바르기 때문이었다.

나라에 바친 한결같은 봉사(奉仕)

임호신은 관직에 나가서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서 사심을 버리고 정성을 다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차고 넘치는 ‘성만(盛滿)을 경계하여 항상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임호신은 명종 7년(1552)에 그의 아우 임보신(任輔臣)과 함께 염근리(廉謹吏), 즉 청백리로 선록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동시에 청백리로 선록된 것을 더없는 영광이라고 하여 부러워 하였다. 그러나 임호신은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하면 이 영광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하고 더욱 행동을 삼갔다 한다.

임호신(任虎臣, 1506∼1556)신도비

임호신은 명종 10년(1555)에 호조판서 겸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다스리는 군직(軍職)>에 제수되었다. 그 시기에는 때마침 전국에 흉년이 연달아 들었을 뿐 아니라, 전라도 해안지방에는 왜구들의 도발이 심하였다. 이렇게 사회가 불안한 시기에 조세를 거두어들이고 나라의 살림을 꾸려가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임호신은 전심전력 국사를 집행함으로써 국가의 세입과 세출에 조금도 차질을 빚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체질이 허약했던 임호신은 너무나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병을 얻어 다음해 봄에 현직을 굳게 사양함으로써 돈령부(敦寧府; 왕의 친족과 외척의 일을 관장하는 관아)지사(知事)로 옮겼다.

그리고 임호신은 가족에게 앞으로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을 일체 받지 말도록 엄중히 당부했다. 병석에 누워서 하는 일 없이 국록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호신은 날로 병이 위독하여 그 해 8월에 작고하니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명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훌륭한 재상을 아깝게 잃었다.”고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임호신의 글씨

지족(知足)을 즐긴 깨끗한 평생

임호신은 평생을 두고 수양하고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분수를 지키고 생사(生死)를 달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선비였다.

그는 일찍이 자신이 거처하는 조그마한 방에 ‘지족암(知足庵)’이라는 편액(偏額)을 달았다. 지족(知足)은 분수를 알아서 만족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방안의 벽과 창문에는 성현의 격언을 빈틈없이 붙여 마음의 길잡이로 삼았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비록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나 거처와 의복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냈다. 그러면서도 친지나 친구 중에 생활이 곤궁한 사람이 있으면 식량이나 의복을 서슴치 않고 나누어 주었다.

임호신은 마음이나 행동을 꾸미는 가식을 싫어했으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 깔끔하고 산뜻하게 살았다. 그는 또 권세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여 그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벼슬길에 오른 다음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도 초연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사람이 죽고 사는 사생관(死生觀)이 뚜렷하여 ‘고인백년 편작만년계(古人百年 便作萬年計)’라는 9자(字)를 언제나 좌우에 써놓고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홍섬(洪暹)이 문병을 왔다. 그리고는 임호신의 병세가 위독함을 알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임호신은 당시(唐詩) 한 권을 꺼내서 홍섬에게 주고는 “홍공(洪公), 나를 위해서 시(詩) 한 수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오.”하고 웃어보였다. 공이 작고하자 그와 함께 과거에 오르고 또 같이 청백리에 선록되었던 조사수(趙士秀; 좌참찬 역임)는 “어떻게 다시 무백(武伯; 임호신의 자)과 같이 정직하고 담백한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하고 크게 슬퍼하였다.

임보신(任輔臣):∼명종13년(1558)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임유겸(任由謙)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 임추(任樞)이며 어머니는 남효온(南孝溫)의 딸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字)는 필중(弼仲)이며 호는 포초(圃樵)인데 성종의 아들 익양군의 사위가 되었으며 임성(任誠)에게 양자로 갔다. 중종39년(154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음해 전경(典經)․저작을 지내고 1546년 홍문관박사, 그 다음해 홍문관 부수찬․부교리 등을 거쳐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명종5년(1550) 홍문관부 교리, 이듬해 강원도구황사․이조정랑 등을 거쳐 전라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피고 와서 수안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유능한 신하를 수령으로 보내면 안 되다고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552년 사복시 부정으로 있을 때 염근리에 선정되었고 1554년 전라도에 암행어사로 갔다 와서 보고하니 임금이 지시하기를 “ 능성현에 지난해의 환자(還上)를 바치지 않은 것 때문에 갇힌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흉년이 든 해에는 징수해서는 안되고, 또한 농사철이니 더욱 잡아 가두어서는 안된다. 해남고을의 각사 노비(各司奴婢)들이 지난해에 바치지 못한 신공(身貢)을 올해로 넘겨서 바치게 하면서 엄하게 독촉한다고 한다. 흉년에는 형편상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니 짐작해서 분간할 일을 호조에 이르라.” 하였다.

1557년 일본사신의 선위사가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하여 애를 먹었고 다시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경연석상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학』의 보급 및 실천을 주장하였으며 문정왕후 때 지평으로 있으면서 불교의 그름을 논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종친을 시켜 이익으로 달래어도 듣지 않고 더 오래 본래의 주장을 고집하므로 이 때문에 거스름을 받아 오래 승진하지 못했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말과 웃음이 적었고 몸가짐을 간결하게 해서 가업(家業)이 쓸쓸하였으며 아름다운 천성과 올바른 의지가 시종 변함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중종은 그가 (동생) 익양군의 사위이므로 특별히 불러오게 했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뵙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가지 않았다.

그는 ‘사군자(士君子)란 정당하게 몸을 세워야 하는 것인데 처음 벼슬하면서 사사로이 임금에게 바라겠는가.’ 하고 여긴 것이다. 그의 곧고 굳센 것이 대개 이와 같아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흔하지 않았다.

저서는『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