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임진왜란의 명장 편갈송 장군의 위업

작성일 : 2019-06-04 08:22

명나라 어양총절사(漁陽德節使)이던 편갈송 장군은 임진왜란에 우리 땅에 오셔서 이여송 장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작전에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다시 출병, 7년 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울산 서생포 왜구 섬멸전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공로가 승전비에 새겨 전해져 오고 있으며, 본국의 사정으로 경주시에 은거하셨다.

절강 편씨의 연원 (浙江片氏 淵源)

편씨의 선대(先代)는 본래 중국 당나라 종실(宗室)의 후예로 남송(南宋) 때 유현 문정공 연평 이선생 휘 동(儒賢文靖公延平李先生諱侗)의 9세손 이지(李址)가 명조(明朝)의 한림원 태학사(翰林院 太學士)로서 국정은 덕치를 줄곧 주창하고 궁인의 내홍(宮人의 內証)에 대한 상주(上奏)로 한결같이 올바른 충의(忠義)를 지켜온 것을 가상(嘉尙)히 여긴 나머지 일편단심(一片丹心) 충간(忠陳)한 공(功)을 높이사 편씨(片氏)를 사성(賜姓)하고 벼슬을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제수(除授)하였다. 편지(片址)가 편씨의 관성 시조(冠姓 始祖)이다.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및 本貫 由來)

우리나라 편씨의 연원은 편지의 현손 편갈송(片磁碩)이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나 1592년 우리나라 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양총절사 겸 유격장으로  이여송 장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작전에 큰 전공(戰功)을 세우고, 왜장병을 추격하여 개성, 한성 등을 수복하고 승승장구 각지 난리를 진압한 후 개선 귀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중군도독(中軍都督)으로 마귀제독(麻貴提督)과 같이 다시 원병(援兵)하여 직산 소사평(稷山 素沙坪) 전투에서 승전하고, 남하하여 울산 서생포에서는 왜적들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진영을 만들고 왜 성곽(倭 城郭)을 쌓아 최후를 다짐하는 참혹한 대접전이 일어나자 왜적을 섬멸, 대파하여 물리친 위공(偉功)을 세우고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선조로부터 그 공훈을 치하하는 친서를 받았다.

⇧ 편갈송 장군의 대승첩 비

편갈송(片碣頌) 장군이 귀국하려고 할 당시 본국인 명나라에서는 외환내우로 국운존망이 목전에서 어지러울 무렵 간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한 모함 등의 소식을 듣고 환국을 단념한 뒤 경주 금오산에 은거(隱居)하시니 이 어른이 편씨의 동래 시조(東來 始祖)이다.
시조 편갈송의 본향이 절강이므로, 본관을 절강으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큰아들 편풍세(片豊世)는 명나라 어양안찰사(漁陽按察使) 금자광록대부일광노(金紫光祿大夫一光老)로, 둘째 편풍원(片豊源)은 영안태수 한림학사(永安太守 翰林學士)로, 셋째 편산보(片山甫)는 문장가(文章家)로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조선의 금오산으로 와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후  아버지가 천수를 다하자 편풍세, 편풍원은 나주에, 편산보는 만경에 정착하여 대대로 세거케 되었다.
절강편씨는 처음 나주에 뿌리를 내리어 유서 깊은 고기(古基)에서 편풍세 2세조는 슬하에 편성대와 편문수를 두었으며, 편성대 3세조는 편응주, 편봉, 편선균, 편파회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편봉(片鳳)이 아들 6형제를 두어 이른바 6방손(六房孫)이 번창, 편씨의 7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편풍원의 편응복, 편한정, 편영표 3형제는 고흥, 천안, 나주에서, 편산보는 영광에 정착, 외아들 편순당을 두어 이들 자손이 오늘날 편씨 일가를 이루고 크게 번창하였다.
역사상 뛰어난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창의사 편성대(片成大)가 있고,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한 전주 중군을 지낸 편기진(片沂珍)과 정평부사 편좌언(片佐彦)이 있으며, 풍기군수와 내금위장에 이른 편만직(片萬直)과 독립운동가 편강렬, 편덕렬 형제가 있다.

마 장군과 편 장군 종향 (麻, 片 兩 將軍 從享)

울산 서생포에서 이른바 왜성(倭城)을 쌓은 왜적의 진영을 함락키 위한 7년 전쟁 풍진에 가장 참혹했던 섬멸전을 하여 왜적을 소탕하고 국토를 회복한 위대한 공적에 감복해 그 큰 공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그곳 동리 주민들이 동리 이름을 도독동(都督洞)이라 부르며 제당(祭堂)을 만들고 마귀장군과 편갈송 장군의 위패를 안치하고 매년 음력 15일 자정을 기해 제향을 지내며 장군들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지금껏 400여년을 동네 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의 소원을 비는 동리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음이 도독공의 공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적장 가등청정이 축조한 왜석성(倭石城:사적54호) 아래가 도독동이고, 그 청류층암절벽에 편장군 마애비(片將軍 磨崖碑)가 있다. 후손의 입장에서 제당이 승전기념 상징으로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사적지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감명사•감명서원 (感明祠•感明書院)

2세조 편풍세와 군부인 오천 정씨 묘소(왼쪽) 2세조 편풍원 묘소 – 전남 나주시동강면 운산리
편갈송 장군은 중국 명나라 절강출신으로 본관 역시 절강이다. 자는 경수(景修)이고, 호는 모헌(慕軒)이며, 그 선대는 당나라 종실이다. 임진왜란 때 동정명군총절사(東征明軍總節使) 겸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제독 이여송과 원군(援軍)하여 평양성 전투에 대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제독 마귀와 함께 동원중군도독(東援中軍都督)으로 재원전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 임금은 어찰을 보내어 감사의 치하를 하는 한편에서는 간신 정응태의 무고 한 모함으로 환국치 못하던 차에 이정귀(李廷龜)를 명나라에 보내어 변무소(辯誣疏)를 올려 신원됨과 동시 대보단(大報壇)에 배향케 하였다. 호역과 군역(戶役, 軍役)이 면제되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거의 270년 후 1860년(庚申, 哲宗 11년)에 도독공의 위업을 추모키 위하여 전라, 충청 유림들이 계청(啓請)하여 예조판서 정기세도 수교와 예조궐문을 내리어 후손 편영기(片瑛基) 등 세손이 거주하는 나주에 감명사(感明祠)를 세우고 이여송, 마귀, 편 갈송 제독을 배향토록 하였으나 향사만 해오다가 무진대동훼철령(戊辰大同設徹令)으로 피화를 입고 끝이었다.
그 후 편시구(片時九), 편병렬(片炳烈),편병헌(片炳憲), 편무경(片茂景) 등이 1956년(丙申)에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 타령비(妥靈碑)를 세우고 매년 춘절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지금도 투주동(投珠洞, 一名 보산리(寶山里). 이 고장을 감명서원을 상징하여 서당골이라 불리우고 표말(標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