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경주정씨 파시조 양경공(良景公)의 遺蹟과 매봉山 史蹟

작성일 : 2019-06-04 07:13 수정일 : 2019-06-04 07:41

경주정씨는 辰韓國 사로(斯盧)의 6촌(村) 중 취산진 지촌장(嘴山診支村長) 지백호(智伯虎)로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필자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적현산 묘좌에 잠들고 계시는 유택을 둘러보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 선조의 음덕을 추모하며 산자수명의 지세를 더듬어 본다.

양성헌(養性軒) 정희계(鄭熙啓)의 본관은 경주, 시호는 양경(良景)이며 아버지는 월성부원군 도첨의정승 문하평리 월성군 휘(暉)이다.

공의 부인은 고려조 재상 염제신의 딸 서원 염씨와 둘째부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질녀로 영산 신씨다. 관력으로는 22세인 고려 공민왕 18년 과거에 급제하고, 27세에 최영의 휘하 서북면도순문사 41세에 판자혜부사 1392년 판개성부사 문하평리 겸 응양위상호군으로 동지밀직사사를 지냈고, 남은(南誾)과 함께 왕대비 안씨로부터 공양왕 폐위 교지를 받아 선포하였다.
1392년 7월 17일 고려왕조는 34왕 475년을 끝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왕위에 올랐다. 태조대왕은 정희계를 좌명공신 참찬문하부사 팔위상장군 계림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왕업을 이룸에 전하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천명과 인심에 상응함을 알고 도운 충성이 너무 커서 황하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도록 잊기가 어렵도다. 포상의 전례를 행함에 일등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 작위를 봉하고 전지(田地)170결, 노비20명을 하사》하는 등 많은 은전을 내렸다.

애석하도다. 공은 태조5년 1396년 7월 12일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재임 시 동대문 축성 중 향년 49세로 졸(卒)하니 왕이 조회를 중지하고 유사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명하고 특시(特諡)를 무열(武烈)로 더하여 대광숭록대부 의정부(議政府) 우의정 계림부원군을 추증(追贈)하였다.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에 걸친 600년 수도, 한성과 서울의 수장으로서 재임 중 순직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제2대 판한성부사 정희계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한성판윤으로 불리는 조선의 서울시장은 줄잡아 1,400여명에 이르는데, 그 중에서 첫 시장이 성석린이고 그 뒤를 이어 두 번째가 정희계인 것이다. 아직 쉰의 나이가 안 된 그가 오로지 개국 초기의 왕도 건설에 매진하다 세상을 뜨게 되었음이 아마도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못내 안타까움에 저리도록 하였을 것이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묘역앞에 위치한 정희계 부친 정휘 신도비(좌) 정희계 신도비(우)

일찍이(1392년) 그는 남은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기로 결정한 교지를 선포하고, 배극렴 ‧ 조준 ‧ 정도전 ‧ 김사형 ‧ 이제 ‧ 이화 ‧ 이지란 ‧ 남은 등 대소 신료와 한량‧ㆍ기로들과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나아가 왕위에 오르도록 추대하여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등극하게 한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다.

역성혁명을 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정희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어땠을까? 도탄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의 명분으로 목숨을 걸고 세상을 뒤집은 혁명동지로서 남다른 동지애가 있었을 터, 새 세상의 변화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크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유명(幽明)을 달리한 원훈공신에 대한 예우로 사패지를 내린 일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정희계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부질없는 트집을 잡아 봉상시에서 시호를 안황(安荒) 등으로 고약하게 지어 올려 임금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하니, 왕은 특명으로 시호를 ‘양경(良景)’이라 하고 관련된 자들에게 장형을 가하거나 유배시켰다.
이 대목에서 이성계가 정희계를 각별히 아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는데, 아마도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친정 조카사위라는 인척관계가 대업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두터운 신임으로 은밀한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태조실록 제9권 병자년 2월 28일조에 이렇게 적혀있다. 《봄이 오자 성을 쌓는 역부를 돌려보냈다. 그런데 동대문 부근은 지세가 낮아서 밑에다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위에 성을 쌓으므로 그 힘이 배나 들어 이 구역을 맡았던 안동과 성산부 사람들이 아직 역사를 마치지 못했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이 10여 일 더 두고 마저 끝낸 다음 돌려보내자고 건의 하였다. 그러나 정희계는 왕에게 아뢰기를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씨 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라. 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안동과 성산부 사람들만 남겨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지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함께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 대목을 보면서 관찰사의 행정편의주의적 소견보다 균형을 잃지 않고 애민정신이 배인 판한성부사의 건의를 왕이 채택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바로 그 당시 판한성부사가 정희계였다. 동대문 바로 옆 성곽 아랫부분을 가 본 사람들은 안다. 성곽을 쌓아올린 네모 모양의 돌들에 당시 공사를 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우리 경주정씨 양경공 정희계는 불천위로 윤허 받자와 국왕이 치제하심에 그 불후의 공훈과 행적이 곧 후손의 귀감이며 긍지요 축복으로 부조묘에 모시고 있다.

조선개국 420주년이 되는 해인 1812년 조선 순조12년 10월 25일 개국 일등공신 참찬문하부사 정희계 사우에 안성군수 박종경 용인현령 한철유, 음죽현감 박창수 영화(성남)찰방 박종산 중림(수원 화성) 찰방 최종문 등을 보내어 “성사의 지우가 태산과 황하보다 우뚝한 그 공 대려의 맹세 천년을 이어지리라”는 축문과 함께 영령케 치제케 한 곳이 현 부조묘이다.

정희계공은 경주정씨양경공파의 파조로서 현 후손들은 대략 15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후손들은 종손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사단법인 경주정씨양경공파종약원을 설립하고 활발한 종친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