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高陽 八賢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선생

작성일 : 2019-06-02 11:07

모당 홍이상은 조선왕조실록 광해7년 9월19일자 임진 3번째 기사에 ‘홍이상은 선조(宣祖) 때에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있었는데, 선조가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라고 전한다.

홍이상(洪履祥)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1549년(명종 4년)에 출생하였고 처음 이름은 인상(麟祥)이며, 자는 원례(元禮), 또는 군서(君瑞)로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본관은 安東 豐山縣이고, 시조가 洪之慶으로 고려조 고종(高宗) 29년(124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국학직(國學直學)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맥이 이어졌으며, 호는 모당(慕堂)이고, 증 左贊成 휘 수(脩)의 아들이다.
高陽八賢의 한 사람으로 선조 6년(1573년) 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선조 12년(1579년) 殿試에도 장원급제하였다.
정언(正言), 수찬(修撰),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교리(校理), 집의(執義), 응교(應敎), 사간(司諫), 사인(舍人), 직제학(直提學)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겸하고, 특별히 이조참의가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예조참의(禮曹叅議)로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고 이어 병조참의(兵曹叅議)가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27~8년(1594~1595년)까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서 왜구와 싸웠으며, 선조 29년(159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선조 30년(1597년) 경기도관찰사로 임무를 마치고, 전란 후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고,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앞뒤로 지낸 벼슬이 세 번 혹은 네 번이었다.

홍이상 선조는 조선 최고의 강관으로 이름이 높다. 광해조 즉위년(1609년) 당시 재상들의 면면을 보면 한음 이덕형, 오리 이원익, 백사 이항복, 일송 심희수, 병조판서 월사 이정구 등당대의 쟁쟁한 명신들과 나란히 하였다. 대사헌직에 재직하던 모당 홍이상 선조는 1612년 정인홍, 이이첨에 의해 시사(時事)가 그릇됨을 보고 외직(外職)을 구하여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고, 광해조 6년(1614년) 임기(任期)를 마치고

慕堂公簡札 왜적 장수에게 보낸 답서
 송도(松都)에서 곧바로 선영과 옛집이 있는 한성(漢城) 서쪽의 백암포(白巖浦)로 돌아와 물가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낙양(樂洋)’이라고 편액(遍額)을 달았다. 광해조 7년(1615년) 4월부터 신환(身患)이 깊어져서 동년 9월 19일에 67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정초본] 95권, 광해 7년- 전 개성 유수 홍이상의 졸기에 보면, <前略> 홍이상은  선조(宣祖) 때에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있었는데, 선조가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라고 전한다. <後略>
벼슬이 증 영의정,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문집으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으며, 고양의 文峰書院에 배향된 고양팔현(高陽八賢)이다. 이준(李埈)이 찬(撰)한 묘비와 인조 9년(1631년)에 이정구(李廷龜)가 찬한 신도비등과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는 정조 10년(1786년)에 창건하여 모당(慕堂)선생 만을 배향하는 하강서원(荷江書院)이 있고, 고양시 성석동(城石洞) 고봉산(高峰山) 기슭 정강(正岡)에 모당(慕堂)선생과 증(贈) 정경부인 안동김씨와 합폄(合窆)으로 된 묘역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8월과 11월에 보면 홍이상 당시 경상도관찰사가 조정에 보낸 투항한 왜적에 대한 상소가 자주 등장한다. 위의 그림 <모당공간찰>은 1594년(조선조 선조 27년) 모당 홍이상 선생께서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 내응하려는 일본군(부산 주둔군)의 장수로부터 글을 받고 그를 타이르는 회답 편지이다.

이 간찰 원본은 일본 야마구찌현 구리하다씨가 소장하였던 것을 풍산홍씨 종친회원이 일본 방문 시 지인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이 편지글은 앞으로 고양시청에 조형물로 세워질 예정이다. 다음은 간찰의 내용으로 당시 일본군 장수의 투항을 권하는 모당 선조의 담대한 지략이 엿보이는 글이다.
 
慕堂公簡札
 절충장군 용양위 상호군 헌도목병위萱島木兵衛 귀하
또다시 그대의 글을 보았소. 그대의 의와 은혜를 생각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기에 고맙고 가상하기 그지없소이다. 일본은 해외에 떨어져 있는 작은 나라로서 감히 명나라 대국에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지나매 하늘의 노여움이 그에 이르렀고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어 오르게 되었으니 이는 당신들 자신이 지은 죄임을 어찌 하겠소이까?
그대는 마당히 역(逆)과 순(順)의 대세를 잘 헤아리고 복과 화의 이치를 깊이 생각해서 이제가지의 과오를 회개하고 위험을 버림으로써 안전한 길을 택한다면 그 어찌 용렬하고 미천한 사람이라 탓하리오.
 그렇게만 한다면 후일에는 반드시 더 큰 상과 절충이 보다 더할 것이어늘, 부질없이 교졸한 꾀와 엉뚱한 방법으로 승리를 얻어 설령 국가에서 그 공을 대접하는 은전을 내린다한들 그를 어찌 감당하겠소.
오직 잘되게 하는 길은 그대가 뜻을 고치고

                
모당  홍이상 선생의 묘와 신도비

고양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성석동의 고봉산 남동쪽 기슭(묘소 동남쪽 200m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1631년에 세워졌고 총높이 230cm의 신도비는 대리석 재질로, 비문은 좌의정 월사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전(篆)을 하였다.

 

 조심하도록 힘쓰는 데 있을 뿐이외다. 조그만 쪽지에 내려준 것은 張天壽 품속에 감추어 외부에 발로되지 않도록 한 것이오. 조정의 은의를 어찌 한 장의 쪽지를 사이에 두고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것을 가지고 초조로운 의심과 그릇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대장부의 심정이 몰락될 것이니 모쪼록 한 번 더 깊이 살펴서 거취를 결정하기 바라오.
그대가 거느린 군사의 포병(砲軍)을 한시라도 더끈다면 그대의 길짐이 붐비고 노변이 불편해서 자칫 기밀이 발로될 걱정도 있을 터이니 신중처리하기 바라오. 할말 다 못하고 장천수로 하여금 구두로 전하게 하고 이만 줄이오.

만력22년(1594年 甲午 선조 27년) 10월18일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 홍이상


홍이상 선생의 묘와 신도비문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났다. 자식의 분분을 지켜 하나같이 성인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매일 새벽에 일

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마루에 올라가 따뜻한 지 추운지를 여쭈었고, 직접 음식을 올리고 마루에 올라가 따뜻한 지 추운 지를 여쭈었고 물러나와 독서를 했다.

  아버지 찬성공이 만년에 중풍에 걸리자 병석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약을 올리며 의원을 보면 반드시 인사하고 울면서 말을 하였다. 옷을 입고 허리띠를 풀지 못한지 십여 년 만에 마침내 평상으로 회복되어 건강하게 있다가 천명대로 졸하였으니 사람들이 지극한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中略>
평생 말을 거칠게 하거나 얼굴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서 비록 재앙과 환난으로 다급한 때나 일이 분잡하여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도 언어와 기색이 온화하고 의젓하고 처리하는 것이 밝고 자세하였다. 겸양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으나 옳고 그름과 공사(公私)를 구분함에 이르러서는 한마디 말이라도 옛사람의 도리를 인용하니 그 굳센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포의로부터 재상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그 처신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처음부터 한 마음을 지켜 변한 적이 없었다. 항상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데 힘을 쓰고 남이 알아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훌륭한 행실은 비록 이웃이라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AP, Washington Post
  종중문화, 해외언론에 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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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AP통신과 SBS를 통해 집성촌과 작명ㆍ개명과 관련된 전통종중 문화에 대한 취재가 한국성씨총연합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위싱턴포스트와 야후닷컴, AP통신에 동시 보도된 이번 취재에 동행하며 각 종중의 대 언론홍보활동의 지침을 새로 정리해 보았다.

AP통신은 지난 2015년 10월 13일(화) ~ 14일(수) 경기도 파주의 장수황씨와 파평윤씨 그리고 충남 논산의 광산김씨의 집성촌에 방문하여 우리의 집성촌 문화에 대하여 심도 있는 취재를 하였다. 이 취재 기사는 전세계의 신문, 방송, 통신사 등을 통해 전파되었다. 이날 취재에는 김형진 기자와 촬영기자, 방송기자 등 4인과 한국성씨총연합회에서 석민영 사무총장과 김형선 사업단장이 동행하여 안내를 맡았다.

 한국성씨총연합회에서는 이와같이 종중문화에 대한 홍보와 각 성씨의 선조유적 현창사업에 적극적인 지원을 계속할 예정이다. 협조해 주신 장수황씨 묘하종중 황재하 회장을 비롯한 여러분과 파평윤씨 정정공파 교하종중 윤훈덕 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 그리고 광산김씨 논산 연산마을 집성촌의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