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동문수학 친구의 충절과 우정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과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耈)

작성일 : 2019-06-02 08:41 수정일 : 2019-06-02 09:17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 초상

이는 북천일록(北遷日錄)을 통해 전해오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유명한 유배(流配) 길의 시조다. 백사의 제자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이 함경도로 수행하여 이듬해 5월 13일 이항복이 작고할 때까지의 과정을 일기로 남긴 것이 북천일록이다. 육십 노구(老軀)에 강원도의 험준한 철령(鐵嶺)을 넘던 길에 백사가 읊었다.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높은 재를 함께 넘는 저 구름에 실어다가 광해군(光海君)의 궁정에다 뿌려보면 어떠할까나. 못된 신하들에게 휩싸여 충신의 본심이 내쳐진 한(恨)은 초사(楚辭)에 나오는 오랜 옛적 굴원(屈原)의 심정이었을까? 아무리 훌륭한 신하가 있어도 삐뚤어진 자들과 더 많이 관계를 하는 왕은 일폭십한(一曝十寒)과 같다던 맹자(孟子)의 이론이 옳았던 것 같다. 하루 햇볕을 쬔다하더라도 열흘 동안은 추운 분위기가 되면, 좋은 신하보다 10배로 나쁜 신하들과 임금이 가까이 하는 현상 말이다. 백사와 같은 의로운 충절의 신하들이 있었건만 광해군은 불행하게도 못된 야욕의 인물들을 가까이하였던 연고가 아니었던가.

 

1617년 음력 11월에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인목대비의 폐비론(廢妃論)을 반대함으로 유배에 처해져 이듬해 정월 초엿새에 함경도 북청(北靑)을 향하여 떠났다. 음력 정월 18일 철령을 넘으며 이 시를 읊었다, 원산을 거쳐 2월 6일에 북청에 도착한다.

갑자기 생사를 고투하는 처지를 당하여

떠나신 북쪽 하늘만 바라다봅니다.

구름조차 멈추었을 텐데 어떠하시리요?

손가락을 꼽아 노정 헤아려보니

금명간 철령을 넘을 것 같아

북풍에 눈비조차 휘몰아칠 그 머나먼 길은

노인이 가히 감당할 바가 아니라오.

같은 그 순간쯤에 동대문 밖에서 똑같은 충절로 바른 말을 했던 연고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된 채 쫓겨난 백사의 오랜 친구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耈/ 1556~1620)도 그 북쪽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면서 이항복에게 부칠 편지 한장을 쓰고 있었다표옹은 완주(完州) 출신의 올곧은 선비 진천송씨(鎭川宋氏)이다. 인륜도덕에 있을 수 없는 폐비론을 단호히 반대하던 두 사람은 20대에 만나 한 솥에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을 자면서 파주에서 동문수학했던 갑장(甲長)의 친구.

선조(宣祖) 임금 앞에서 경연(經筵)의 강의를 하던 표옹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을 칭찬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을 당하기도 했던 송영구였고, 이토록 그 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의리와 남다른 친분을 유지해왔었다. 그 일 때문에 백사는 영의정의 사직서까지 몇 차례 올렸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표옹유고(瓢翁遺稿)를 번역하면서 백사와 주고받은 시문과 이항복의 부음을 받고 터질듯한 애통의 만사(輓詞)를 두 편이나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날 공부하던 제배(儕輩) 간의 모습은 아래의 포옹 시에 나온다.

지난날 청춘시절 회상하니/ 공명을 서로 겨루었었네(憶昔各靑春/ 爭名許兩陣).”‘필운(弼雲) 백사의 운을 차하여’ 고통의 미친 노래[狂歌]를 소리쳐 부르고 싶어도(直欲狂歌聲正苦)/ 관산을 향한 한마디 만사뿐이라오(一言題挽向關山).”

백사가 함경도 유배에서 작고했다는 비보를 받았을 때의 미치도록 슬퍼하는 표현만 보아도 얼마나 그 우정이 깊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함께 지은 만사에 백사의 인격은 후대에까지 오래오래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견했었다.

뜬 구름 세상사는 기러기의 외마디 울음뿐이라도(浮雲世事一 聲雁)/긴 바람만은 백사장에 그지없으리(不盡長風吹白沙)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초상

여기 부운(浮雲)은 이항복의 다른 호(號) 필운(弼雲)과 소운(素雲)을 암시하고, 백사장의 백사(白沙) 또한 그의 아호(雅號)가 아닌가. 한 조각 뜬구름 같은 인생을 마감한 하얀구름[素雲)이었을지라도 백사의 굴절하지 아니하는 순백(純白)의 절의(絶義)는 이 세상 넓은 백사장[白沙]에 길이길이 불리라.

들끓던 조정의 불의함에 나라가 소용돌이치던 때였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려는 광해군의 처사 때문이었다. 백사가 북청으로 유배 길을 떠난 뒤의 조정의 형편은 소위 ‘백지 동의사건’으로 들끓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는 불안한 정국이라고 표옹 편지에 언급한다.

차라리 벽지 함경도로 떠난 대감(大監), 백사를 따라 유배라도 처해졌다면 다행이라고까지 하였다. 친구 대감을 바라다보면서 쾌재쾌재(快哉快哉)라 외치면서 ‘어찌 신선이 되어 등천함과 다르다고 하겠소?’라는 문구까지 그 편지에 언급한다. 실로 절의(節義)를 끝까지 지키면서 대의명분에 떳떳이 살아간 두 우정은 신선이 되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만만 바라기는 떳떳한 도리를 위하여 식사를 잘하면 서 기운을 돋우다가 백성들에게 경사스러운 날이 오도록

준비해 달라”고 백사에게 보내는 그때의 표옹 편지문이 마감된다. 운명은 이태 간격으로 둘이 세상을 떠났지만 장풍(長風)이 되어 오늘도 부는 바람 이렇게 메아리쳐온다.

젊어서부터 익살스럽던 백사와 함께 공부하던 약관(弱冠)의 시절 낮잠을 자는 친구 표옹에게 불침을 놓아 골려주었다는 에피소드가 백사집(白沙集)에서 볼 수가 있었다. 벼슬에 난관이 있었을 때는 표옹이 수하를 시켜 친구 이항복에게 수박을 사서 보내기도 했다.

절절이 흐르는 갑장 친구의 깊은 정리는 정말 ‘송무백열(松茂柏悅)이요, 혜분난비(蕙焚蘭悲)’여서 그분들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가슴에 품고 이어져 내려온 아름다운 우정에 오늘날 후손인 우리들은 더욱 감명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