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위정자들이 본받아야 할 강직한 인물들 석탄 이양중(石灘 李養中)과 고덕재(高德齋)

작성일 : 2019-05-31 09:47 수정일 : 2019-05-31 10:29

조선조 후기에 와서 역사학자 이긍익(李肯翊)에 의해서 찬술된 사서(史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내용에서 태조편 고사(故事)를 보면

「이양중은 자(子)가 자정(子精)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고려 때 형부(刑部)의 좌참의(左參議)였는데 조선에 와서는 밭 있는 마을에 은둔해 살았다.」하는 내용과「왕이 잠저(潛邸 : 왕이 되기 전에 있는 집)에 있을 때 옛날 알던 사람을 불렀는데 그 사람은 야인의 옷차림으로 거문고를 들고 와 술잔을 받았으나 벼슬은 받지 않았다.」 하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그 사람 야인은 이양중을 칭한 것으로 그 원문은 이렇다.

「李(이)養(양)中(중)字(자)子(자)精(정)廣(광)州(주)人(인)高(고)麗(려)邢(형)部(부)左(좌)參(참)議(의)

本(본)朝(조)興(흥)遁(둔)居(거)田(전)里(리)」

「以(이)龍(룡)潛(잠)故(고)人(인)命(명)召(소)以(이)野(야)服(복)携(휴)琴(금)獻(헌)酒(주)拜(배)官(관)不(불)受(수)」

이 내용을 보면 석탄 이양중은 조선 개국에 다른 어느 고려의 신하들처럼 참여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처럼 고려의 시절의 충신이었던 것이다.

덕(德)은 예로부터 인간의 가치를 재는 잣대였다. 덕이 있고없고에 따라 그가 참된 인간인가 하는 기준을 둔 것이었다. 인간은 야생 동물과 다르다는 데서 덕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데서 도덕(道德)이란 말도 나왔던 것이다.

덕은 곧 인(仁)이고 선(善)이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위정자(爲政者)에게 <정치가 모름지기 덕치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위정지덕(爲政之德)이란 말씀을 남겼던 것이다. 덕의 글자가 붙은 낱말 즉 용어는 모두 훌륭한 뜻을 담고 있다. 덕망(德望), 덕성(德性), 덕업(德業), 덕인(德人) 등등이다. 이러한 낱말들에서 고덕(高德)이라 하면 더 더욱 훌륭한 낱말이다 할 것이다. 우리의 수도 서울에 고덕동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다.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한 지역인 것이다. 이 마을의 지명에는 유래가 있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주민들도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 밑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 조선조 제일가는 성군 세종임금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학식 있고 재주가 뛰어난 이방원, 즉 태종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 피를 받아 역시 학식이 있고 재주 있는 임금으로 등장 하였다.

당시 이성계가 조정에서 재상의 반열에 올라 태종은 얼마든지 음직으로 그냥 벼슬길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배운 실력을 갖고 겨루어 임금으로 등장하였다.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 초상

 태종임금은 용맹하기도 하였지만 글재주도 있어서 고려말 여러 선비와 함께 당당히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아닌 자력으로 벼슬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러한 태종임금과 가까운 친구의 한 사람으로 광주이씨 문중에 한 선비가 바로 석탄(石灘)이란 호(號)를 보인 이양중(李養中)이다.
 
그는 고려말기에 형조좌참의(刑曹左參議)의 관직에 있었으며 올 곧은 절의 충신이기도 하였다. 석탄 이양중은 조선이 개국하여서는 벼슬길을 그만두고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태종 즉위 때는 한성부윤(漢城府尹 : 오늘날 서울시장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고려의 신하로서 절의(節義)를 지킨 큰 인물로 알려졌다.
태종이 친구의 입장으로서 도와달라고 수차 방문하여 권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지조를 지켰던 사람이라 하였고 그와 함께 동생 이양몽(李養蒙)도 형 양중의 지조에 따라 조선의 벼슬에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현제의 일화로 오늘날까지 동명(洞名)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인 것이다. 그들 형제의 고매한 덕을 기려 주민들이 지었던 마을명칭이었다.

  당시 그들 형제가 살고 있는 곳을 기려 고덕동(高德洞)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 덕을 베풀기란 참 어렵다. 오늘날도 보면 고관대작이란 분들을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 챙길 줄만 알지 베풀거나 사양할 줄은 모른다. 우리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보자. 대개가 넉넉지 못하고 지위가 높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덕을 베풀줄 안다는 것은 곧 고매한 인품을 말한다.

  광주이씨의 도시조는 이자성(李自成)이다. 신라 내물왕 때 큰 벼슬을 하였던 사람으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신라의 녹을 먹고 지내오다가 고려가 개국하자 한동안 고려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던 문중이었다. 맨 으뜸이 되는 도시조를 떠나서 각 파마다 1세조로 하는 시조가 있는데 한희(漢希)를 1세조로 하는 파와 이 한희의 후손으로서 이당(李唐)이 낳은 다섯 아들이 각각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앞서 한희를 1세조로 하는 파는 석탄공파(石灘公派)로 칭하고 있는데 석탄공파는 바로 이양중의 호를 딴 것이었다.

  석탄공파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절의 충신 집안으로 소문난 것이 유명하다. 그가 태종의 권유로 벼슬을 지냈다면 그의 직계 역시 줄줄이 유명인 또는 고관대작들이 탄생했으리란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후손들은 조상의 고매한 인격, 절의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자리가 눈앞에 있는데 이것을 외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속성으로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금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는 석탄 이양중을 기리는 고덕재(高德齋)란 재실이 있다. 그의 고매한 덕목을 받드는 곳은 비록 그의 후손들이 아니라도 현 우리의 위정자들 특히 정권욕과 고관직욕에 연연한 관료들이나 의회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 그의 생애를 뒤돌아보고 느끼는 도량장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