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수원백씨 백유함(白惟咸) 조선의 문신. 자는 중열(仲悅), 대사헌 인걸(仁傑)의 아들

작성일 : 2017-11-23 14:37

1546(명종 1) - 1618(광해군 10)

조선의 문신. 자는 중열(仲悅), 대사헌 인걸(仁傑)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1570(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박사·부수찬·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되자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하였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 우리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정응태는 그에 대한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의 체통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고 있음은 황제를 능멸히 여기는 행위가 아니냐는 트집이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하여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광해군 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광해군 9)에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광해군 9)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