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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 최치원(崔致遠)

작성일 : 2019-11-12 10:24

857(신라 헌안왕 1)~951년(고려 광종2)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候). 신라(新羅)의 서울 사량부(沙梁部 : 삼국유사에는 본피부라고하며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부근에 있다고 기록함)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정밀․민첩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서기 874년(경문왕 14) 한번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현위(宣州 凓水縣慰)의 벼슬에 올랐다.

877년(헌강왕 3) 치적(治績)으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使) 내공봉(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 :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구)를 하사(下賜)받았다. 879년(헌강왕 5) 당(唐)나라 반적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병(高騈 : 당나라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抄)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 돌아와서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받고 당(唐)나라에서 쓴「계원필경(桂苑筆耕)」과「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및 시부(詩賦) 3권을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이 어지러 움으로, 문란한 국정을 개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自請)하여 태산(전북 태인)․부성(충남 서산)등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나라가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시정의 수습책)을 상소하여 아찬(阿湌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관직)의 벼슬을 받았다.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당나라에 가서 익힌 학문과 도학은 때를 만나지 못해 마음껏 펴 보지 못함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산천(山川)과 해변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 삼아 학문에 심취하며 풍월(風月)을 즐기며 유랑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 식솔(食率)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동복(冬服) 형(兄) 현준(賢俊) 승려 정현(定玄)과 도(道)로써 우정을 나누다가 여생을 마쳤다.

1020년(고려 현종 11) 8월 내사령(內史令)에 증직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그 뒤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