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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 안경수(安駉壽)

작성일 : 2017-11-02 16:26

?1900(광무 4) ()는 성재(聖哉), 시호(諡號)는 의민(毅愍). 1893(고종 30) 전환국 방판(典圜局幇瓣)으로 도일(渡日), 서양식 화폐의 주조를 시찰하고 돌아와 신화폐를 주조했다. 1894(고종 31) 동학혁명(東學革命)이 발발, 청․일(淸日) 군대가 주둔하게 되자 개화 친일(開化親日) 정객이 되어 보수 친청(保守親淸)의 민영준(閔泳駿)과 함께 사태수습에 진력,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거쳐 이해 외세에 의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단행되자 경무사(警務使)를 거쳐 신설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위원이 되었다. 이어 제 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을 거쳐 이듬해 다시 경무사에 전임했다가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군부 대신(軍部大臣)에 올랐다. 이해 일본 공사(日本公使) 미우라(三浦梧樓)가 부임, 을미사병(乙未事變)을 일으키자 그 책임을 지고 한때 파면되었으나 곧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복직하여 다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키는 주동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이로 인해 3년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896(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특사되어 경무사에 기용, 이어 중추원 일등의관(一等議官)에 전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 조직에 참여, 회장을 지냈다. 1898(광무 2) () 경무사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 1900(광무 4)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알선으로 귀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앞서 이준용(李埈鎔)의 모역사건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권형진(權瀅鎭)과 함께 사형되었으나 1907(융희 1)에 신원(伸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