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초명은 유(裕),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판도 판서(版圖判書) 부(孚)의 아들, 1260년(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 문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打破)했고, 판도 좌랑(版圖佐郞)․전중시 어사(殿中寺御史)를 거쳐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 우사의(右司議)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을 거쳐 고려유학 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扈從, 원나라에 들어가「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 쓰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다. 1294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동남도 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 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 참리(僉議參里) 세자 이보(世子貳保)를 역임했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동경유수(東京留守)․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 부윤(鷄林府尹)․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이해 태상왕(太上王)이 된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충렬왕이 복위한 이듬해 수국사(水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문교(文敎)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건립(建立)하여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와, 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서적(書籍)을 구입했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지칭된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성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