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부정공파 파조는 호장공 권이여(利輿)의 제5자 권취정(就正)의 아들

작성일 : 2020-04-14 16:40 수정일 : 2020-08-26 06:46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

1.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정공파(副正公派)를 이끄는 사람들

 

• 부정공파 파종회 사무소

경북 의성군 점곡면 동변1길7-19(기천정사)  전화 054-833-0888

부정공파 파종회장 권영도  010-3815-**32,   총무 권재규 010-3252-1676, 담당 권병표 010-3113-0880

 

 

 

2. 부정공파 파조(派祖)

부정공파 파조는 호장공 권이여(利輿)의 제5자 권취정(就正)의 아들이다. 관직이 신기도령으로 식록부정(食祿副正)이다. 현손 사위 안동 김희(金熙)의 집 보첩에서 고증자료가 나왔다. 신기도령은 기병을 중심으로 한 예비군으로서 군마를 조달할 수 있는 자는 편입되었다. 식록부정은 지방고을의 향직으로 녹봉에 관한 업무를 보는 직이며 부정은 4품 관직이다. 아들은 호장 권균필과 별장 권균량인데 균필이 경보(景輔)를 낳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가 되고 판이부사와 상장군(上將軍)을 겸했다. 6대손 권전()은 자헌대부 중추원사 증 영의정 화산부원군 경혜공(景惠公)이다. 권전의 장자 권자신(自愼)은 현덕왕후의 동생으로 예조판서를 지냈고 충장(忠蔣)의 시호를 받았다.

 

3. 부정공파 세계도

4. 부정공파 단소, 종택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글씨로 붙어 있는 부정공세로라는 편액의 글씨는 가까이 갈수록 그 획 하나하나까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정공세로의 바깥채는 축대 위에 올라서 있었고, 동향을 하고 있는 바깥 쪽 마루 끝에는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집 옆으로 돌아들며 사당으로 통하는 소로가 열려 있다. 사당으로 통하는 길에는 대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집 뒤쪽으로 경사면을 타고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부정공세로의 지붕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 왔다.

 

지붕의 망와마다에는 ()’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지붕의 기와들은 파랗게 돌이끼를 덮어쓰고 있었다. 사당의 지붕들도 돌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호양 선생, 늪실마을 안동권문의 입향조 권익창은 사당 우측의 산언덕에 누워 있다. 나지막한 산이었지만 그곳에 오르자 늪실마을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늪실마을의 좁직한 들은 대부분 논으로 되어 있었다. 산들 사이의 좁직한 분지는 긴 고구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한 끝은 마을 입구 역할을 하는 고갯마루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동쪽 방향으로 뻗어나가 다른 산굽이 끝으로 잦아들고 있었다좌우의 산들은 다 나지막하였지만, 산 높이에 비해서는 가파른 기슭을 가지고 있었고, 소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늪실마을에서는 아직 나무를 때는지 소나무들은 아래가지가 다 떼어져 마치 키 큰 여인네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늘씬한 몸체를 자랑하는 듯하였다.

건축 구성

자 건물이다. 앞에는 사랑채가 나와 있고, 사랑채의 동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려 있다. 중문의 동쪽에는 안채인 자 건물의 동쪽을 막고 서 있는 건물의 끝에 붙은 1칸의 방이다. 안마당은 아주 좁다. 얼마 전에 수리를 하여 화강석으로 뜰을 단장하였다. 사당은 집 뒤쪽으로 올라서 있다.

현판 부정공세려(副正公世廬) 파조인 부정공의 종택임을 의미한다. 승국간성영침처......(勝國干城永寢處......) 종택 좌측 재사(訥谷齋)에 주련이 있다 부정공세려중수기(副正公世廬重修記권오훈(權五焄)이 지었다.

문중 이야기

-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 우리 안동권씨는 종가가 없어요.” 태사묘에서 만난 안동권씨 노인들 중의 한 분이 말하였다. 종파는 있지만 종가는 없어요. 안동 인근에서 그래도 뚜렷하게 종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이지요. 부정공파는 파 종손이 있어요. 종손은 부산에 있어요. 종가는 와룡에 있고, 종손만 부산에 가 있지요.”

와룡에서 도산서원 나가는 길 옆. 가야동 부정공파종택을 알리는 키 낮은 표석이 숨은 듯 서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늪실. 지금은 길이 더 뻗어 와룡에서 정산 나가는 2차선 도로와 만나게 되어 있다다른 파의 경우에는 지손 집에서 큰집 행사하는 사례가 많으나 저희들은 종가는 제대로 유지를 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구, 보잘것이 없습니다.” 늪실에서 만난 권오수가 말하였다.

 

자손의 숫자는 안동권씨 15파 중에서 셋째로 많을 겁니다. 추밀공파, 복야공파가 많고, 그 다음이 우리 파지요.” 권오수는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부정공파는 파조 이후 거의 적자로 종통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35대에 와서 현 종손의 윗대가 백부에게로 양자를 오셨고 …… 그 윗대에서도 한 번 양자를 하신 적이 있지만 …… 거의 적자로 이어 내려온 셈이지요. 현 종손은 부산에 가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 종손은 1948년생이고, 이름은 기승이라고 하지요.”

 

안동 권문은 우리나라에서 진행되어 나온 가문의 역사 속에서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가문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가문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화보(成化譜)라고 불리어지는 이것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권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는 성화보(成化譜)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여진다.

 

()이 인행(仁行)을 생하였으니 벼슬이 낭중(郞中)에 이르렀고, 인행이 책()을 생하였으니, 책이 스스로 구하여 본읍의 향리가 되었다. 권씨가 책이 향리로 된 후로부터 칠세를 미미부진(微微不振)하다가 수평(守平:樞密公)에 이르러 부흥하고 자손이 미덕을 계승하여 문정공(文正公:菊齋)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守洪:僕射公)의 후손 문탄공(文坦公:一齋)이 또다시 현달하여서 권씨가 드디어 2대족으로 나누어져 …….”

 

이 구절을 통하여 보면 3대 권책의 시기로부터 10대 때까지 안동 권문은 안동에 세거하며 대대로 향리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부정공파 세보는 권책의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두고 있다.

 

호장정조(戶長正朝)이다. 고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의 향리직을 설치하였다. 당대(堂大)를 호장(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등대(等大)를 부호장(副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낭중(郎中)을 호장동정(戶長同正)이라고 칭하였고, 원외랑(院外郞)을 부정(副正)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스스로 호장 되기를 바래서 풍속을 규찰하고 바로잡았으니, 이에 그것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렇게 향리로 정착한 안동권문은 10대에 이르면 15파로 나누어지며 향리직에서 벗어나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에 보이는 안동권씨 1015파 세계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9대 권백시(權伯時)의 장자 권수중(權守中)이 종파(宗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차자 권시중(權時中)이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權仲時)의 장자 권수평(權守平)이 추밀공파(樞密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아우인 권중시(仲時)의 차자 권수홍(權守洪)이 복야공파(僕射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둘째 아우인 권취의(權就宜)의 아들 권태달(權棣達)이 동정공파(同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셋째 아우인 권통(權通)의 장자 권지정(權至正)이 좌윤공파(佐尹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넷째 아우인 권통의 차자 권영정(權英正)이 별장공파(別將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다섯째 아우인 권취정(權就正)의 아들 권통의(權通義)가 부정공파(副正公派)를 형성한다.

9대 권백시의 여섯째 아우 권융(權融)의 아들 권인가(權仁可)가 시중공파(侍中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權冊)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權光漢)의 장자 권굉옥(權宏玉)의 후손이 10대 권숙원(權叔元)에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둘째 아들인 권광한의 차자 권굉진(權宏眞)의 후손이 10대 권사발(權思拔)에 이르러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權謙漢)의 후손이 10대 권대의(權大宜)에 이르러 정조공파를 형성한다.

3대 권책의 셋째 아들인 권겸한의 후손이며, 8대 권입평(權立平)의 둘째 아들 권의정(權宜正)의 아들 권추(權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2대 권인행(權仁幸)의 둘째 권륜(權綸)의 후손이 10대 권척(權倜)에 이르러 검교공파(檢校公派)를 형성한다.

7대 권렴(權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들 후손이 10대 권형윤(權衡允)이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15개 파 중에서 안동권씨를 권문세족으로 등장시키는데 혁혁한 공적을 세운 것은 추밀공파라고 하겠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추밀공파의 파조는 ‘권수평이다. 그는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을 지낸 사람이다. 추밀공파에서는 추밀공의 3대 후에 권부(權溥)가 나서 이 가문을 단숨에 최고 명문으로 끌어올렸다. 권부는 몽암(夢庵) 권 ()의 아들로써, 호가 국재(菊齋)이니, 바로 서거정이 앞에 인용하였던 성화보의 서문에서 언급하였던 바가 있는 사람이다.

 

부정공 묘소는 알 수 없습니다. 파조 이후 6대가 다 알 수 없지요.”라고 권오수는 말하였다.

부정공파는 파조로부터 6세인 권자형(權子衡) 이후로 조금 현달한 인사들을 배출하여 내기 시작하였다.

권자형은 원나라 지정(至正) 20년인 경자년(庚子年:1360)에 사마(司馬)가 되고, 신축년(辛丑年:1361)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을 상주로 호종하며, 임인년(任寅年:1362)에는 어가를 따라 청주에 이른다. 그 공으로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삼사부사(判三司副使)가 되며, 홍무(洪武:명 태조의 연호) 임신년(壬申年:1392)에 안동부 북쪽의 감마촌(甘麻村) 등지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의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다.

권자형의 4촌인 권전(權專)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이다. 그의 딸이 문종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권전의 아들 권자신(權自愼)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육신과 같이 화를 입어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직된다. 어쩌면 부정공파의 영화를 보장하여 줄 수도 있었을 왕비 배출은 오히려 그들의 불행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권자형으로부터 3대 후에 안동권씨 부정공파에서는 권징(權徵)이라는 인물이 배출된다. 권징은 호가 등암(藤岩)이며, 1426(세종 8)에 태어났다. 그는 1450(세종 32)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이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된 기록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부정공파에 불행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세조를 위하여 죽는다. 1467(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는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권징은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 난을 평정하러 갔다가 순절하고, 혈서 한 장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남아의 일과 장부의 운명은 예로부터 이와 같은 것이니 절대로 심려하지 말라!  혈서에는 이런 글씨가 써 있었다고 한다권오수가 말하였다.

이 분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천위가 한 분 뿐입니다. 묘지는 청석동(淸石洞), 그러니까 막곡에 있는데, 지금 안동전문대학 맞은편입니다.” 부정공파 종손들은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은 영주 근방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파조로부터 6대까지는 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7대와 8대의 묘는 영주에 있지요. 그러니 아마 그때는 영주 근방에 세거하였던 모양입니다. 여기 늪실의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 그러니까 시조로부터 24대 때의 일이지요.”라고 권오수는 말하였다.

 

관련문집 - 임장세고(林庄世稿)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었던 임장세고(林庄世稿)이다. 62책으로 고종 연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이다. 이정백(李庭柏, 1553~1600)의 시문들을 총 1책으로 엮어 1855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 선고유적(先考遺蹟)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선고유적(先考遺蹟)이다.

관련문서

-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

이 문서는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이다.

 

관련유물

- 호양선생문집(湖陽先生文集권익창(權益昌, 1562~1645)의 시문집으로 42책의 목판본이다.

 

관련인물

- 권익창(權益昌)

부정공파의 가산을 늪실로 옮긴 사람은 권익창(權益昌)이다. 그의 선대 2대의 묘소가 남선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계 선대들은 안동 동쪽에 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의 부친 권선(權宣)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역임하였으며, 퇴계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권익창은 자가 무경(茂卿)이고, 호가 호양(湖陽)으로 1562(명종 17)에 탄생하여 1645(인조 23)에 타계하니, 향년 84세였다. 그에게는 장락원(掌樂院) ()의 벼슬이 주어졌고, 학암서원(鶴巖書院)에 배향되었다.

3. 부정공파의 역대 인물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 종손들 (안동시 남후면

임진왜란 노량해전· 독립운동 대이어 항일투쟁

임진왜란 노량해전과 구한말 독립투쟁 등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의 대를 이은 호국투쟁 정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특히 최근 개봉된 영화 `명량`이 관람객 1300만을 돌파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권전(1549-1598)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권전의 묘소의 비문에 따르면 조선 중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마애
권예(1495~1549)의 맏손자인 권전은 선조 15(1582)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판옥선 함장에 임명된다.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호국충정으로 당시 고성현령을 사임하고 스스로 수군으로 들어 간 그는 조선수군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그는 옥포, 사천, 당포, 명량 등 해전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나중에 아장(亞將·준장군)이 된다그러나 12척의 판옥선으로 노량해전에서 왜군 전함 500여척을 격파하는 등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는 승전으로 이끄는데 끝까지 고군분투했지만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오십이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 종손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약 300년 뒤 또 다시 항일투쟁에 맞서게 된다. 1910년 일제가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점하자 당시 대곡문중의 종손인 권기일은 천석에 이르는 전답과 종가집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해 이듬해 19113월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 통화현에서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도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대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그러나 1920년 일본군들이 독립군의 본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습격할 당시 식솔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홀로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다 일본도에 난자, 나이 서른여섯에 순국했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 이후 322년 만의 일이다.

이순신과 함께 산화한 권전은 권기일의 13대 종조부다. 이처럼 이 문 중은 종손이 두 번씩이나 목숨을 던져 일본과 싸웠고 끊긴 종가의 대는 차남에 의해 이어져 왔다안동권씨 대곡문중 종손
권대용(72) 씨는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열 번이라도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이 준비가 자신이 죽기 전 꼭 해 놓아야 할 필생의 사업이라고 다짐했다. (전재: 경북매일)

 

영덕 안동권씨 오봉종택 단종 복위운동 충신 권책의 충절을 기리다


마을을 중앙에 자리 잡은 오봉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38)은 정면의 삼문 대문채를 지나 오봉헌(五峯軒)과 사당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벽산정(碧山亭)이 배치돼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입향조인 권책(權策 1444~ )이 거주하던 종택으로 지었는지 2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건물과 주변 환경을 잘 정돈했다

건물들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다. 솟을삼문과 오봉헌(五峯軒), 사당(祠堂)을 잇는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자형 종택이 자리하고 좌측에 3자 정도의 높은 축대를 조성한 후 벽산정(碧山亭)을 세웠다. 사당은 오봉헌보다 높게 대지를 조성한 후 전면에 일각문을 두고 방형으로 토석 담장을 둘러 공간의 위계성을 높였다

정침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전면 좌측에 마루방 한 칸을 돌출시키고, 정침은 2칸 안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의 안방과 좌측으로 주칸이 넓은 건넌방이 자리하고 건넌방이 좌익사와 연결되면서 우물마루를 시설한 고방 사이에 통래칸을 두어 정침 좌측으로 출입 할수있도록 했다종택의 구조는 동자주형 대공을 세운 3량 구조로 정침 가운데 원주 위에만 주두를 설치한 민도리 집이다.  사랑 부문은 전면 가운데 통래간을 중심으로 온돌방 1칸을 합해 사랑 공간이 마련되고 앞쪽으로 툇마루를 두어 사랑으로 출입이 용이 하도록 배려했다.

 


오봉헌(五奉軒)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정면 3칸은 툇마루를 두면서 마루뒷편에 온돌을 구성했고 방과 방 사이에는 미서기를 설치 공간을 확장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방 뒤쪽으로 수장 공간인 벽장을 마련했다. 좌협칸 2칸은 전면에 4분합 들문을 달고 좌측면과 뒷면은 삼 벽 에 쌍여닫이 골판 문을 설치해 폐쇄된 마루방을 꾸몄다

온돌방과 마루방은 쌍여닫이 세 살문을 설치했고 전면쪽 창호는 하부에 머름을 설치한 쌍여닫이 세 살문을 달고 툇마루 양측면도 외여닫이 골판문을 달아 측면에서는 시선을 차단하면서 문을 통해 출입동선이 연결되도록 했다. 상부구조는 간략한 5량가 이고 전면만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장식했다.


벽산정(碧山亭)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어간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뒤칸을 두었고 제형 판대공을 세운 5량 구조며 기둥 상부는 양서와 수서를 겹치고 그 위에 봉두로 장식된 이익공 형식이다. 주칸에 창방과 도리장혀 사이에 화반을 1구씩 설치해 상부 하중을 받도록 했다.

사당(祠堂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전면에는 4자폭의 툇칸을 두고 뒤편 3칸을 통으로 제향공간을 설치하고 위패를 봉안 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뒤편 벽에 기대어 상부에 벽감을 설치했고, 툇간 상부와 내부는 우물 천장을 설치해 상부구조가 보이지 않도록 마감했으며, 상부구조는 대량 위에 공아를 쌓아 중도리를 얹은 5량가 이다. 사당 전면은 살미당이 날카로운 수서형 익공을 2단으로 얹은 이익공형식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자해 (紫海 ·寧海)는 교남(嶠南:嶺南)의 이름남 고을이다,

인량(仁良)은 자해(紫海)의 신령스런 지역이다. 등운산(騰雲山)이 비단병풍 같이 둘러있고 작천(鵲川)이 비단 허리띠 같이 두르고 있으며 ~ 중략 ~ ! 저 장릉(莊陵)의 시대에 여러 현인들이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을 숭상하며, 살아서 그 의리를 온전히 함에 해와 별 같이 빛나고 늘름하기가 서리와 눈 같아 세상에서 6(六臣)이라 칭송하고 있는 바이고 6신의 외에 오봉 권선생 같은 분이 있을 따름 이다... ”‘오봉헌 중건기’( 안동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 오봉 권책 조선조 4대 세종 임금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단종)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시작이다.

권책(權策 1444 ~ )의 자는 경지(經之)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 안동이며, 부친 권자홍(權自弘) 1427년 전시 을과를 급제해 지평, 한림 등을 역임했고, 맹사성, 윤희, 김문기 등과 함께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며 홍문관 부제학으로 문종의 비 현덕황후(顯德王后) 권씨와 4촌간 이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종부(宗父) 충장공 권자신(權自愼) 과 형() 권저(權著)와 권서(權署)가 사육신과 단종복위 모의에 참여했는데 모의가 발각돼 집안에 화가 입었다.

권책은 나이가 어려서 화를 면하고 영해로 귀향왔다. 유배 생활 중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와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지극한 충성심으로 애통해 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훗날 장릉(장릉·조선6대 단종의 능)유신(莊陵遺臣)으로 지칭 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관련 사료로 방증을 얻을 수 없다. 창수 미곡의 단양 신씨 딸과 혼인 한 후 인량리에 정착했다.


권책과 왕바위 이야기

창수면 인량리 뒷골에 커다란 왕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섯 신하(사육신 지칭)가 엎드려 예를 표하는 듯한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를 왕바위라 한다어린 조카 단동을 쫏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권 책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됐는데 당시 나이 13세로 참형을 면하고 이곳 영해로 유배돼 귀양살이 했다,

이때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권 책은 죽령고개에서 대성통곡을 했으며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이 왕바위를 끌어안고 피맺힌 통곡을 하다가 여러 번 기절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왕바위라 불렀다. 권 책은 매월 초하루 보름에 왕바위에 가서 분향하고 종일토록 통곡했으며 두문불출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또한 분을 못이겨 분하여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노하고 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프한다”(憤號天地怒 寃泣鬼神悲 )라는 시를 지었다 한다. 고종 때 후손과 마을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추모하여 왕바위(王巖)’이라는 두 글자를 바위에 새겼으며, 멀고 가까운 선비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옥같은 추모시를 지었 바쳤다고 했다.

권책은 1834(헌종 즉위년) 창건된 충현사에 문종비 현덕황후의 동생 종숙 권자신, 후손, 권상길과 함께 배향되었다. 충현사는 1855(철종 5) 서원으로 됐다가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그 자리에 대봉제사(大峯濟舍)가 세워졌으며, 1999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81호로 지정됐다. 영덕군에서는 오봉종택이 소재 한 창수면 인량리 일대를 3대 문화권 문화, 생태, 관광기반 조성사업으로 관광객의 좋은 휴식처로 새로 단정했고, 새로운 관광 명소로 관광객 맞을 준비를 마쳤다. (전재 경북일보)


부정공파 37(예천군 용문면 출신권동칠(權東七) 트렉스타 대표

 

중국 공장 중단하고 22년 만에 부산행  혁신적인 기술 잇따라 선보이며 40여 개국에 수출

네스핏, 보아 다이얼, 아이스그립, 트렉스파이크. 신발업계에서 손꼽는 트렉스타의 신기술들이다. 2012년 개발한 네스핏은 신발을 발 모양 그대로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2만 명의 발 모양 데이터를 토대로 발가락, 발바닥 모양을 적용했다. 균형을 잡아주는 밑창 IST’, 이중 특수구조 미드솔(중창)로 중심력을 강화한 신기술 하이퍼 폼도 해외에서 각광받았다. 지난해엔 손을 쓸 필요 없이 신고 벗을 수 있는 신발인 핸즈프리차세대 세계 일류상품에 선정됐다.

지난 5월 말 부산 녹산산업단지 내 트렉스타 본사에서 만난 권동칠(62) 대표는 트렉스타가 세계 시장에 브랜드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앞선 기술력 덕분이라며 이 세상에 없는 신발을 만들자는 목표로 연구개발(R&D)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트렉스타는 매장을 통해 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해외 바이어들과 직접 계약을 진행해 기술로 검증된 제품만이 판매가 가능한 차별화된 글로벌 마케팅을 하고 있다. 아시아 아웃도어 브랜드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현재 40여 개 나라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손 댈 필요 없는 핸즈프리신발 개발


부산의 한 신발업체에서 일하던 권 대표는 1988년 동호실업을 설립하면서 신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엔 해외 업체들에 등산화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납품했다. 1990년대 초반 글로벌 브랜드들이 생산기지를 중국, 동남아 등지로 옮기면서 국내 신발산업의 위험신호가 감지되자 그는 1994년 자체 브랜드 트렉스타를 출시했다. ‘편안한 신발이라는 평가 속에서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수출국이 크게 늘어났다.

트렉스타는 국내 아웃도어 업계에서 보기 드문 수출형기업이다. 전체 매출의 10% 이상을 꾸준히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특히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3국과 일본, 중국 등지에서 인기가 높다. 유럽 아웃도어 미디어그룹인 EDM이 발간하는 아웃도어 전문지 콤파스(Compass)’는 지난해 말 세계 1000여 개 아웃도어 신발브랜드 중 트렉스타가 아시아 신발브랜드 1, 세계 12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트렉스타의 등산화 기술은 소비자 편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국내 소비자 2만여 명의 발 모양을 연구해 한국인 발에 최적화한 모양을 적용한 네스핏(nestFIT) 기술이 대표적이다. 이 기술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수출이 급증했다. 권 대표는 글로벌 시장은 기능에 대한 경험과 확신만 있으면 상품과 브랜드를 모두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2015년에는 손을 쓸 필요 없이 신고 벗을 수 있는 신발인 핸즈프리를 내놓았다. 밑창 뒷부분에 있는 바퀴를 지면에 굴리면 앞에 연결된 끈이 자동으로 묶인다. 신발을 벗을 때에는 뒤꿈치에 돌출돼 있는 버튼을 발로 누르면 조였던 끈이 느슨해져 손쉽게 벗을 수 있다. 이 제품으로 지난해 2월 세계 최대 스포츠 아웃도어 전시회인 국제스포츠아웃도어용품박람회(ISPO)에서 황금상 및 아시아제품상을 수상했다.

권 대표는 모든 아이디어는 사람의 편의성을 고민하다가 나온다핸즈프리 제품도 신발 끈을 묶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아내, 열손가락 절단이라는 장애를 딛고 히말라야 8000m10좌를 연달아 정복하고 있는 산악인 김홍빈씨를 보고 떠올렸다고 말했다. 핸즈프리 역시 40여 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덴마크에서 인기다. 판매가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한번 구입한 고객의 재구매율이 높다는 설명이다.

2016년에 출시한 초경량 트레일 워킹화 메가웨이브와 내년 초 출시 예정인 트렉스파이크도 같은 맥락이다. 메가웨이브엔네스핏, IST 등 트렉스타의 자체 기술과 함께 신기술인 하이퍼 폼을 적용했다. 낮은 밀도와 높은 밀도, 이중특수구조 중창으로 제작했으며 아치형 깔창과 중창으로 신발의 중심력을 향상시켰다. 웹스파이크는 신발 뒤축에 달린 작은 다이얼을 돌려 쉽게 중창과 겉창에 위치한 스파이크를 빼고 넣을 수 있게 설계되어 빙판길부터 일상생활까지 폭넓게 사용이 가능하다.

스마트공장 구축으로 경쟁력 강화


최근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성장세가 한풀 꺾인 후 회복이 더디다. 권 대표는 이를 두고 비정상이 정상화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아웃도어 시장은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과열양상이었다차분해진 시장에선 결국 편의성, 건강성을 강조한 제품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위해 트렉스타는 안전화의 캐주얼화를 모토로 한 차별화 전략을 세우고 안전화 시장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 군화시장 석권에 이어 인도, 러시아, 스웨덴 등에 군화 수출길을 열었다.

권 대표는 지난해 말 중국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22년 만에 부산으로 생산시설을 되돌리기로 결정했다. 부산의 녹산국가 산업단지에 스마트 자동화 공장을 짓고 내년 하반기부터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 연말 5~6대의 신발생산 로봇을 설치해 자동화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권 대표는 새로 짓는 스마트공장은 자사 유통망과 연계되고 고객이 원하는 신발 제작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면 바로 생산할 수 있는 구조라며 공장 자동화가 이뤄지면 40% 가량의 인건비 절감효과가 있어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과의 인건비 경쟁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마트 공장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권 대표는 산업부와 부산시에 자동화 표준공장을 만들자고 건의했다. 현재 컨소시엄이 만들어져 70억원의 자본금으로 자동화 공장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자동화 공장은 신발에 들어가는 갑피 등 수십 개에 달하는 부분을 고객이 원하는 형태에 따라 조립한다. 신발 업계의 화두인 맞춤형 신발을 신속하게 제작할 수 있다. 권 대표는 공장 자동화가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원가를 40% 절감하고 품질이 좋아지면 주문량이 늘고 이것이 결국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며 현재 공장 자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신발 대기업에서 일자리를 줄인 곳은 하나도없다고 강조했다. 권 대표는 중국, 베트남 공장은 대부분 대만 자본이 투자한 곳으로, 이들에게 몰린 글로벌 브랜드의 주문 물량을 되찾아 오는 것이 목표라며 대만 기업들보다 먼저 자동화가 정착되면 한국이 다시 한 번 글로벌 신발 브랜드들의 생산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현들의 올곧은 정신·대대로 이어온 가풍성공의 비결"

 

- 용문에는 왜 인재가 많이 나오는지.

 

집집 마다 가학과 가풍이 있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란 말처럼 늘 마을의 어르신들은 선()을 중시했다.

 

또 초간 권문해 선생은 백석지기 부자는 나지 않을지언정 학문하는 자는 백대토록 계속된다는 부불백석문한계승지지(富不百石文翰繼承之地)’처럼 재물보다 학자가 많이 나는 명당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남에게 글을 배우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할 정도로 선현들은 집안의 가학을 중시했으며, 초간 권문해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에게 글을 배우러 가는 것도 큰집 어르신들에게 혼이 날까 봐 지금의 유천으로 돌아가서 안동까지 돌아갔을 정도다.

- 어릴 적 고향에 대한 기억은.

너무 가난했다. 등록금 낼 돈이 없어 어머니가 이웃에서 돈을 빌려와 등록금을 내곤 했다. 어머니는 8km 정도 되는 예천읍의 장 길을 걸어서 다니며 절약해 공부를 시키셨다. 지금도 가슴이 메여오고 너무 감사해 사회에 나와 악착같이 공부하고 사업에 매진하는 힘이 됐다.

-용문 출신의 고위직 공무원들을 비롯한 사업가들이 많은 데 성공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

선현들의 올곧은 정신과 대대로 이어온 가풍이 밑바탕이 돼 어느 분야에 진출해도 성공할 수 있고 인정을 받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대해서.

은퇴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늘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산자락과 마을의 소나무, 용문의 돌담길 등 모든 것이 그리운 곳이다. 내 고향 용문으로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경북일보>

 

본 기사는 각 성씨의 파종회 기사 견본입니다. <권오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