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권씨 정승공종(安東權氏 政丞公宗 - 시조 권상좌)

작성일 : 2019-01-29 14:10 수정일 : 2019-09-02 15:3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 및 本貫의 由來)


안동권씨 정승공종 시조 권상좌의 단비(壇碑)와 후손들의 시향봉사(時享奉祀) 모습

 

 안동권씨(安東權氏) 정승공종(政丞公宗) 시조 권상좌(權上佐)는 송()나라 국자감 권여(權輿)의 손자로 초명(初名)이 상재(尙載)이다. 1330년(원나라 문종 1)에 몽고에서 출생한 그는 금화처사(金華處士)로 일컬어졌던 허겸(許謙)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9세 때 예의책 (禮疑策 : 예론에 대한 답안)으로 장원급제, 진사에 오르고 이어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와 검열관(檢關官)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되었다.  1349년(고려 충정왕 1) 원(元)나라 감찰어사로 고려에 왔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원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충혜왕비(忠惠王妃) 덕녕공주(德寧公主)의 만류로 고려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尙載)는 당시 정승인 계림대군 왕후(王喣)의 사위가 되었는데, 몇 달 후에 충정왕(忠定王)의 명으로 왕후의 윤자(胤子)가 되어 왕상좌(王上佐)로 성과 이름이 고쳐져서 왕적(王籍)에 오르고, 죽은 충선왕(忠宣王)의 사당(祠堂) 봉사손(奉祀孫)이 되었으며 영가군공 (永嘉郡公)에 봉(封)해졌다. 영가군(永嘉郡)은 지금의 안동(安東)이다.

1351(충정왕 3)에 원나라 위왕(衛王)의 노국공주(魯國公主)가 고려 강릉대군(江陵大君 후일 공민왕이 됨)과 함께 고려에 올 때 노국공주호행사의 임무를 맡았다1352(공민왕 1)에 왕상좌는 비서원외랑(祕書員外郞)에 올랐고 이어 국자좨주(國子祭酒)와 찬성사(贊成事) 지중서문하평장사(知中書門下平章事) 동수국사(同修國史) 지제고(知制誥) 판총부사(判總府事) 등을 두루 역임하고 1367(공민왕 16)에 시중(侍中)에 올라 요승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였다.  1372(공민왕21)에 도첨의우정승판이부사(都僉議右政丞判吏部事)에 이르렀던 왕상좌는 이듬해 신우(辛禑)가 신분에 맞지 않게 강녕대군(江寧大君)에 피봉되는 것을 개탄하여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을 얻어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 후일 공양왕(恭讓王)이 시중(侍中) 우현보(禹玄寶)를 보내 유제(諭祭)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아들 법화(法和)가 왕적을 삭제하고, 권씨(權氏)로 복성(復姓)에 따라 왕상좌도 본성인 권씨를 회복하였다. 아들 법화는 권씨를 회복하면서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였으며, 계림대군 왕후(王煦)와 가계를 달리하니 왕후와 왕상좌의 양부 관계가 파양되었다. 이런 연유로 왕상좌는 성휘(姓諱)권상좌(權上佐)로 되었으며, 안동권씨(安東權氏) 정승공종(政丞公宗)이 이뤄지고 권상좌가 시조가 되었다.  묘는 송경(松京:개성)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어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고암리 산 29번지에 설단하여 시제를 받들어 오다가, 20095월에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224-4로 단비(壇碑)를 옮겨 시향봉사(時享奉祀)를 한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정승공종(政丞公宗)"은 정승공 종중에서 1960년대 이후에 종전에 사용하던 명칭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당종(唐宗)" 대신에 사용하기 시작한 공식 명칭으로서, 정승공 종중(宗中), 정승공 종족(宗族) 및 정승공 종인(宗人)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안동권씨 정승공종 상계 조상 묘역 전경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224-4

 시조 상좌의 아들 법화(法和)1353(공민왕 2)에 출생, 공민왕 21년에 좌대언(左代言)에 올랐으나 신우의 참위(僭位)를 개탄하여 양주(楊州)  어등산(御登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이 개국된 후 1394년(태조 3)에 태조 이성계가 안거(安車)를 보내 그를 입궐케 하고, 계림군 왕후의 손자 숙(肅), 엄(嚴), 도(道) 둥과 함께 왕씨(王氏)에서 본래의 성인 권씨(權氏)로 복성(復姓)케 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권법화(法和)에게 우정언(右正言), 좌승지(左承旨)에 이어 이듬해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숭륵대부(崇祿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 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적은 7조항의 <막민칠조소문(瘼民七條疏文)>을 올려 왕의 칭송을 받았다.  1396년(태조 5) 권법화는 지족소(知足疏)를 올리고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보낼 것을 승낙을 받고 양주(楊州) 어등산(御登山) 일면을 하사(下賜)받아 그곳에서 생을 보냈다. 권법화는 진양류씨(晋陽柳氏) 절도사(節度使) 류승(柳陞)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시조 권상좌가 군봉된 영가군(永嘉郡)이 안동(安東)의 옛 지명으로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하여 계통을 이어왔다.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상좌의 손자(孫子)이자 법화의 맏아들 권보(權補)가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가 홍천(洪川) · 양근(楊根) 두 고을을 다스리고 영평 군수(永平郡守)로 나갔다. 이때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자들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개탄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지방으로 북행할 때 이 고을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보(補)는 이태조의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군부신자(君父臣子)간의 강상(綱常)을 진언하다가 병을 얻어 관아에서 졸(卒)했다.  후에 문종(文宗) 때 그의 충정이 알려져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보(補)의 아우 권비(禆)는 경력(經歷)을 역임했고, 셋째 거(袪)는 중랑장(中郞將)을, 막내 권하(礻賀)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지족옹(知足翁) 법화의 손자이자 보의 맏아들 권수기(守紀)는 문무예에 능했다. 1394년(태조 3) 12월에 한양(漢陽) 수진방에서 출생했던 그는 1419년 (세종 원년)에 별시무과에 장원하여 경상도병마우후에 임명되고 이어 선전관(宣傳官), 승정원 우부승지를 거쳐 1422년(세종 4) 태종(太宗)의 국장에 호장으로 활약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로 나가 해안에 보루를 쌓고 선을 갖추어 방비책을 견고히 하여 호남지방 해안에는 적들이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보의 차남 권수경(守經)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했다.

송계재(松溪齋) 수기(守紀)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권윤인(允仁)은 1411년(태종 11) 8월 양주에서 출생, 15세 때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 부터 땔나무를 해다 팔아 쌀을 바꾸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출천지대효(出天之大孝)로 일컬어졌던 그는 지성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했는데, 그가 24세 되던 해인 1434년(세종 16) 10월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 가 두풍(頭風)으로 병석에 누워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하자, 그는 목욕재계하고 한밤중에 하늘에 기원하기를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기가 병을 앓게 해달라고 40여일을 빌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머루를 먹고 싶다고 했다. 때가 동짓달이었는데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인 산골짜기를 울며 머루를 찾아 헤매는 중 마침 그곳을 날아가던 까마귀에 이끌려 따라갔다가 양지바른 곳의 머루를 얻게 되어 어머니의 병환을 치유하게 되었다.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1436년(세종 18) 효렴과(孝廉科)에 뽑혀 춘추관 기주(春秋館記注)를 역임하고 통정대부로 수원부사(水原府使)와 집현전 학사,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 둥을 두루 거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 春秋館事)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고 이어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1451년(문종 원년) 나라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이 내려졌다. 성삼문(成三問)은 그가 지은 별단에 <권윤인(權允仁)의 효행은 실로 하늘이 내린 것>이라 극찬했다.

송계재 수기의 차남 권윤의(允義)는 형 윤인과 함께 어머니 봉양에 극진하여 향리에서 형제간 효제지성(孝悌之誠)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등과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오위부별시위(五衛府別侍衛) 사직(司直)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추증되었다.

문무겸전으로 유명했던 권종손(宗孫)은 좌참찬 윤인의 아들로 1425년(세종 7) 4월 11일 양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할머니가 “대종(大宗)을 이루려면 자손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종손(宗孫)으로 지었다. 후일 종손은 아들 8형제와 딸 셋을 두었다.  1455년(세조 원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개탄한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충절을 기리며 지내다가 사육신(死六臣)의 참화를 전해 듣고 <사육신애사>를 지어 그들의 절의를 기렸다. 

문무겸전하여 전라병사(全羅兵使), 도승지 등 여러 문무관직을 역임한 종손은 슬하에 83녀를 두었으나 장남에서 4남까지는 모두 조졸하여 후손이 없고, 다섯째 극효(克孝)가 다섯 차례나 장령에 제수된 인물로 사당(祠堂)을 받들었으며 국암장령공파(菊庵掌令公派)  파조가 되었고, 여섯째 극제(克悌)는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오헌감찰공파(梧軒監察公派) 파조가 되었고, 일곱째 극충(克忠)은 진사로 대암진사공파(大庵進士公派)의 파조가 되어 계대를 이었으며, 송계재 수기의 둘째 아들 권윤의(允義)의 손자 권극균(克均)이 양심재세마공파(養心齋洗馬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수경의 증손 권준(權遵)장단공파(長湍公派)의 파조가 되어 안동권씨 정승공종(일명 당종唐宗)은 이들 다섯 파( )로 계통을 이룬다.



 

안동권씨 정승공종 상계도

 

 

 

 

 

 

 

 

 

 

 

 

 

 

 

 

한편 윤의(允義)의 아들 권치(錙)는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홍문 · 예문(弘文 · 藝文) 양관(兩館) 제학(提學)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권극균(克均)은 1510년(중종 5) 성균관진사로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와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냈다.

그 외 수경(守經)의 아들 권거(擧)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학명을 떨쳤고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거의 아들 근신(謹臣)은 1540년(중종 3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훈도(訓導)를 역임했다. 근신의 아들 준(遵)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지냈다.

이 밖에도 국암장령 공파 문중의 인물로는 국암(菊庵) 극효(克孝)의 아들 자락재(自樂齋) 권거경(居敬)이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 <동국의 안자(顔子)>로 불리었고, 그의 아들 민중(敏中)과 임중(任中) 형제가 뛰어났다. 문과에 급제했던 권민중은 전랑(銓郞)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지냈고, 그의 아우 권임중은 1633년(인조 1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이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둥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

부교리 민중의 아들 권몽서(夢瑞)는 음직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지냈고, 임중의 맏아들 권몽응(夢應)은 사직참봉과 사재감 봉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우 권몽협(夢協)은 학명이 높았다. 몽협은 일찍이 백부(伯父) 민중에게서 <대학(大學)>을 배우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동계 (桐溪) 정온(鄭蘊),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해 학문이 뛰어났으며, 1637년(인조 15)에 장악원 판사(掌樂院判司)로 휘하의 악공(樂工)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에 쳐들어온 청국군(淸國軍)을 만나 크게 질타(叱咤)한 것이 지병을 악화시켜 순직(殉職) 하였다.

몽협의 맏아들 권대윤(大胤)은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고, 둘째 아들 권호윤(豪胤)은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문인으로 생원(生員)이 되었다. 1660년에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났을 때에 기년설(朞年說)을 반대하고,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후 영조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추증되고, 이어 공조참의(工曹參議)로 가증(加贈)되었다. 호윤의 손자 현(鉉)은 19세에 생원이 되고, 선친의 유훈에 따라 평생 유학자(儒學者)의 길을 걸어 유림(儒林)의 사범(師範)이 되었다. 81세 때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오헌감찰공파 문중의 인물로는 오헌(梧軒) 권극제(克悌)의 아들 권만종(萬鍾)은 향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을 수습할 때에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昆壽)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만종의 아들 권응규(應奎)는 종숙부 자락재 거경(居敬)한테서 학문을 배웠으며, 탁월한 경술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을 때에 정여립(鄭汝立)의 간사함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일로 파직되자 전리(田里)로 귀향하여 장형 응두(應斗)와 함께 성리학의 원리를 탐구하였다.

두일거사(杜逸居士) 옹두(應斗)의 아들 권복례(復禮)는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고, 극제의 5세손이며 증호참(贈戶參) 휴(休)의 셋째 아들인 세화(世化)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대암진사공파 문중의 인물로는 대암(大庵) 극충(克忠)의 중손 권선복(先福)이 숙종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10세손 권준(埈)이 충무위 사용(忠武衛司勇)을 거쳐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라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양심재세마공파 문중의 인물로는 양심재(養心齋) 극균(克均)의 손자 옹원 (應元)이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임란공신(壬亂功臣) 선무원종이등공신(宣 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되었고, 손자 권응형(應亨)은 훈련원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손자 권응성(應聖)은 봉사(奉事)를 지내고, 임란공신 선무원종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중됐다.

응형의 아들 권유남(裕男)은 훈련원 첨정(僉正)과 용안현감(龍安縣監)을 거쳐 통정대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으며, 응성의 아들 권지담(祉潭)은 무과에 급제하여 충장위(忠壯衛)를 거쳐 오위 부호군(五衛副護軍)을 지냈다•

유남의 맏아들 권세준(世準)은 무과에 급제하여 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을 거쳐 통훈대부 행 귀후서 별제(行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고, 둘째아들 권상준(尙準)은 장릉참봉(長陵參奉)과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지내고, 선전관을 거쳐 구령만호(仇寧萬戶)를 역임하였고, 셋째아들 익준(益準)은 청수만호(靑水萬戶)와 무겸선전관과 문산만호(文山萬戶)를 역임하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지담의 아들 임준(任準)은 음직으로 통훈대부 행 훈련원 판관(判官)을 지냈다.

장단공파 문중의 인물로는 장단공(長湍公) 준(遵)의 아들 권택(澤)이 생원시 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냈고, 어모장군 택 아들 권시형(始衡)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북우후(行北虞候)를 지냈으며, 병란공신(丙亂功臣) 이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품되었고, 시형의 아들 권극중(克中)은 무과에 급제하여 금위영 종사관(禁衛營從事官)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지냈다.

어모장군 극중의 맏아들 성여(聖與)는 현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둘째 아들 성행(聖行)은 1671년(현종 12)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고, 1686년(숙종 12) 무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수문장과 훈련원 주부(主簿)와 판관(判官)을 역임하였고, 셋째아들 성대(聖大)는 성행의 쌍태생 아우로 1684년(숙종 10) 식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를 비롯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둥 여러 관직을 거쳐 함종현감(咸從縣監)을 지냈으며, 통정대부로 승품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이와 같은 후손들이 정승공종 안동권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안동권씨 정승공종 항렬표(行列表)

세(世)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항렬자

忄(心)변자

○道

言변자

○行

日변자

○用

보조자

正○

○容

興○

○起

運○

○世

세(世)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항렬자

亻(人)변자

○敎

秉○

○執

義○

○尙

보조자

國○

○成

宰○

○相

基○

○承

세(世)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항렬자

耿○

○均

銶○

○泰

桂○

 

보조자

○坊

玟○

○泌

模○

 

 

조선시대 인물

권법화(權法和) : 1353(공민왕2)- 1396(태조5) 자()는 이범(而範), 호는 지족응(知足翁), 정승공 상좌(上佐)의 아들. 1372년(공민왕 21) 좌대언(左代言)을 지냈다. 1394(태조3) 양촌 권근(權近)이 씨족을 밝힐 때 계림군 왕후의 손자 숙(肅) 등과 함께 권씨로 복성하였다. 이때 태조가 그를 좌승지에 임명하였으나 불취했고 이 듬해 다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판도판서 (版圖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했다. 이해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 겸 보문각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세자를 세워 조정의 기강을 바르게 하고 산업을 부흥하며 민생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려 태조의 칭찬을 받았다. 1396년(태조5)에 전조 좌대언을 치사하고 '신(臣)은 복성하고 분에 넘치는 직분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만족하다'는 지족소(知足疏)를 올리고 양주로 귀향할 때 어등산 일면을 하사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고암리 산29번지에 있다가  2009년 기축 5월에 이장하여 지금은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224-4에 있다.

안동권씨 정승공종중 묘역 표석과 2세 권법화 신도비

 

권 보(權 補) : 1378(우왕4) - 1398(태조7) 자()는 선장(繕章), 지족응 법화(法和)의 장자. 양촌 권근의 문 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음사(蔭仕)로 세자시강관(世子侍講官)을 거쳐 홍천현감(洪川縣監)과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다. 1398년(태조7) 문과에 급제, 영평군수 (永平郡守)로 나가 있을 때 , 마침 왕자들의 골육상쟁을 개탄하여 함흥으로 북행하는 이태조의 행렬이 영평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태조의 어가(御駕) 앞에 나가 군부신자(君父臣子)간의 강상을 진언하다가 태조의 노여움 을 사서 그로 인해 병을 얻어 관아에서 운명했다. 후에 문종(文宗) 때 그의 충정이 알려져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경연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권 비(權 禆) : ? - 1409(태종 9) 자(字)는 익장(益章), 지족옹 법화 차남. 경력(經歷)을 지냈다.

권 거(權 袪) : ? - 1409(태종 9) 자(字)는 헌장(憲章), 지족옹 법화 삼남.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권 하(權 礻賀) ?- 1412(태종 12) 자(字)는 경장(敬章), 지족옹 법화의 사남.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했다.

권수기(權守紀) : 1394(태조 3)-1424(세종 6). 자(字)는 국경(國經), 호는 송계재(松溪齋), 지족옹 법화(法和)의 손자, 증 이조참판 보(補)의 아들. 1419년 (세종1) 별시무과에 급제, 경상도병마우후와 선전관을 거쳐 승정원우부승지를 지내고 가선대부로 전라도수군절도사에 올라 해안지역의 방어책을 세워 외적의 침입을 차단했다.

권수경(權守經)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사강(士綱). 증 이조참판 보(補)의 차자. 문과에 급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했다.

권윤인(權允仁) : 1411(태종 11)- 1464(세조 10). 자는 천유(天由). 송계재 (松溪齋) 수기(守紀)의 장자. 1436년(세종 18) 효렴과(孝廉科)에 급제, 춘추관 기주(春秋館記注),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지신사(知申事)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1442년(세종 24)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鑑春秋館事)와 세자이사 (世子貳師)를 역임했다. 문종 원년에 효자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권윤의(權允義)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윤명(允明). 송계재 수기의 차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오위별시위(五衛別侍衛)를 역임했다. 가선대부 한 성좌윤(漢城左尹)에 추증됐다.

권장손(權長孫) : 생몰연도 미상. 의정부 사인(舍人) 하(礻賀)의 손자, 처사 수정 (守精)의 아들. 군수(郡守)를 지냈다. 영의정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의 사위다.

권종손(權宗孫) : 1425(세종 7)- 1499(연산군 5). 자는 경원(景元), 호는 송당(松堂), 시호(諡號)는 익헌(翼憲).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윤인(允仁)의 아들 1451년(문종 1) 문과에 급제, 문무겸전으로 기성랑(騎省郞)을 시작 으로 좌통례(左通禮),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전라병 사(全羅兵使), 도승지(都承旨), 상서원 부제조(尙瑞院副提調), 동지경연춘추 관사를 지냈으며,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1458년(세조 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를 올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다시 관직에 등용돼 1467년(세조 13)부터 3년간 삼척부사(三涉府使)를 지냈으며, 1477년(성종 8)에 전라도수군절도사, 1487년(성종 18)에 영해부사 (寧海府使), 1491년(성종 22)에 개천군수를 역임했다.

권 치(權 )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여형(如衡), 호는 매산(梅山). 사헌부 감찰 윤의(允義)의 아들. 문과에 급제,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양관제학(兩 館提學)을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했다.

권금성(權金成) : 생몰연도 미상. 송계재 수기(守紀)의 손자, 가각고 녹사동정(架閣庫錄事同正) 윤례(允禮)의 아들. 중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찬성(贊成) 홍경주(洪景舟)의 장인이다.

권근신(權謹臣) : 생몰연도 미상. 대사성(大司成) 수경(守經)의 손자, 진사 거(擧)의 아들. 1540년(중종 35)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권극효(權克孝) : 1475(성종 6)- 1553(명종 8) 자는 사행(士行), 호는 국암 (菊庵). 익헌공(翼憲公) 종손(宗孫)의 아들. 일두(一蠶) 정여창(鄭汝昌)과 한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문신이며 학자다. 1489년(성종 20) 15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입학했다. 1498년(연산군 4) 무 오사화로 추삭(追削)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신원(伸究)을 청원하고, 정여창과 김굉필의 유배해지를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11월에 안변(安邊)으로 귀양을 갔다가 좌의정 노사신(盧思愼)의 주청으로 12월에 방면됐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정여창과 김굉필의 사사(賜死)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망(停望) 처분을 받았다. 1507년 (중종 2)에 사헌부 집의(執義), 1509년(중종 4)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성거산(聖居山)에서 주역을 강론했다. 이후에도 지평에 일곱 차례, 사헌부 장령(掌令)에 다섯 차례나 제수되었으나 모두 블취했다. 1518 년(중종 13) 44세 때 사간원 정언(司陳院正言)이 되어서는 김안로(金安老) 의 파직을 청했고, 그해 겨울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자리를 옮겼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삼사(三司)의 논척을 받아 삭탈관직 되었다. 1541년(중종 36)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시강원 시강관(侍講院侍講官)에 제수됐으나 사직서를 올려 산반(散班)에 부속되었다. 1556년(명종 11)에 어서(御書)로 "계세지효(繼世之孝)” 넉자의 큰 글씨와 함께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묘소를 정하고 묘지(墓誌)를 찬(撰)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언행록(言行錄)을 지었다. 1578년(선조 11) 사림(士 林)의 소청으로 양주(楊州) 일민사(逸民祠)에 봉향되었는데, 1637년(인조 15) 청국군의 방화로 일민사가 블타버렸다. 안동권씨 정승공종(政丞公宗) 의 국암장령공파(菊庵掌令公派) 파조(派祖)이다.

권극제 (權克悌: 1477(성종 8) - ? 자는 사경(士敬), 호는 오헌(梧軒). 익헌공 종손(宗孫)의 아들, 국암 극효(克孝)의 아우다. 한훤 김굉필의 문하에 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했다. 1507년(중종 2) 안당(安)의 천거로 금오랑(金吾郞)이 되고, 이듬해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상황을 논고(論告)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홍원군수(洪原郡守)로 내침을 당하자 사직서를 올리고 부임치 않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국암 극효(克孝)와 함께 정암 조광조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러자 남양(南陽)에 은둔하고는 일체 남들과 만나지 않았다. 그 후 남곤(南哀) 등이 패(敗)하니, 동지성균관사 김안국(金安國)이 임금에게 서용(敍用)을 청하자 우거(寓居)를 연성(蓮城)의 초지(草芝)로 옮겨 몸을 숨겼다. 몸을 드러내지 않고, 성리(性理)에 정진하여 공맹(孔孟)의 성경(聖 經)에서부터 정주(程朱)의 집설(輯說)에 이르기까지 읽고 꽤 뚫어 통달했다. 저서로 오헌집(梧軒集)이 있다. 동고 이준경이 묘지를 썼다. 안동권씨 정승공종의 오헌감찰공파(梧軒監察公派) 파조이다.

권극균(權克均) : 생몰연도 미상. 자는 평륜(平倫), 호는 양심재(養心齋),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치()의 아들. 1510년(중종 5)에 진사(進士)가 되고,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지냈다. 사후 통정대부 세자시강원 보 덕(世子侍講院輔德)에 추증되었다. 안동권씨 정승공종의 양심재세마공파(養 心齋洗馬公派) 파조이다.

권 준(權 )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이도(而道), 진사 근신(謹臣)의 아들. 1544년(중종 39) 문과에 급제, 평창훈도(平昌訓導)를 거쳐 장단부사(長湍府使)를 역임했다. 안동권씨 정승공종의 장단공파(長湍公派) 파조이다.

권거경 (權居敬) : 1523(중종 18) - 1585(선조 18) 자는 직재(直哉), 호는 자락재(自樂齋), 파조 국암공(菊庵公) 극효(克孝)의 아들. 퇴계 이황(李i晃) 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에 사직참봉(社稷參奉)에 제수되었다. 1562년(명종 17)에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에도 통정대부로 승품돼 한성소윤(漢城小尹)에 추천되었으나, 통정(通政) 이면 족하다고 사양하니 부사직(副司直)에 부직(付職)되었다.

권 택(權 澤) : 1554(명종 9) - ? 자는 공윤(公潤) 또는 자심(子深), 파조 장단공(長湍公) 준()의 아들. 1585년(선조 18) 식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냈다.

권민중(權敏中) : 1570(선조 3) - 1638(인조 16) 자는 혜백(慧伯), 파조 국암공의 손자, 자락재 거경(居敬)의 아들. 한강 정구(鄭述)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3년(광해군 5) 별시문과에 급제, 한림(翰林)과 전랑(銓郞)을 역임했다.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일 때 권신 정인홍(鄭仁弘)을 논척했다가 삭녕군수(朔寧郡守)로 좌천됐다. 1637년(인조 15) 최명길(崔鳴吉)의 주화론(主和論)의 실패를 논척했다가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관아(官衛)에서 별세했다.

권임중(權任中) : 1570(선조 3) - 1651(효종 2) 자는 이신(而信), 호는 우은(愚隱), 두문(杜門). 파조 국암공의 손자, 자락재 거경(居敬)의 아들, 홍문관 부교리 민중(敏中)의 쌍생아 아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한강 정구(鄭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04년(선조 37) 통덕랑(通德郞)을 제수 받고 벼슬길에 나갔으며,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듬해 성균관 유생들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거(停擧) 의 명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 때 공주(公州)로 어가(御駕)를 수행하였고, 환궁해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승품되었다. 1626 년(인조 4)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고, 1633년(인조 11) 별시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 둥 여러 관직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덕원부사(德源府使)가 되었다. 그 후에도 좌승지(左承旨) 응을 거쳐 연안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를 역임했다.

권집중(權執中) : 1572(선조 5) - 1634(인조 12) 자는 성고(聖固), 파조 국암공의 손자, 자락재 거경(居敬)의 3남. 인조 때 선공감 부정(總工監副 正)을 거쳐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역임했다.

권응규(權應奎) : 1528(중종 23) - 1602(선조 32). 자는 성서(聖瑞), 파조 오헌공(梧軒公) 극제의 손자, 성균진사 만종(萬鍾)의 아들. 1587년 (선조 20)에 효행으로 천거돼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정여립을 논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돼 고향 안산(安山)으로 낙향했다.

권응원(權應元)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洗馬公) 극균(克均)의 손자, 진사 경달(景達)의 아들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임란공신(壬亂功臣)으로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됐다.

권응형(權應亨)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의 손자, 진사 경달(景達)의 차남. 훈련원 도정(都正)을 지냈다.

권응길(權應吉)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의 손자, 진사 홍달(弘達)의 아들.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임란공신으로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됐다.

권시형(權始衡)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치원(致元), 파조 장단공의 손자, 성균관 사성(司成) 택(澤)의 아들 무과에 급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행북우후(行北虞候)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유공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되고, 가선대부로 승품됐으며 부호군(副護軍)에 부직되었다.

권몽협(權夢協) : 1589(선조 22) - 1637(인조 15). 자는 치화(致和), 호는 경국헌(景菊軒), 파조 국암공의 증손, 좌승지 임중(任中)의 아들. 1630년 (인조 8) 진사가 되고, 이듬해 광릉참봉을 시작으로 형조정랑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었다. 1637년(인조 15) 노란(虜亂) 때 악공(樂工)을 거느리고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가던 중에 청군을 만나 송파(松坡)에서 순직했다.

권복례(權復禮)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치극(致克), 파조 오헌공의 중손, 유학 음두(應斗)의 아들. 훈련원 판관(判官)을 지냈다.

권선복(權先福) : 1640(인조 18) - 1705(숙종 31). 자는 행부(幸富), 파조 대암공(大庵公) 진사 극충(克忠)의 증손, 처사 학손(鶴遜)의 아들. 숙종 때 돈령부 도정(都正)을 지냈다.

권지생(權祉生)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의 증손, 임란공신 응원(應元)의 아들.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르고, 행용양위 부사과(行龍衛副司果)를 지냈다.

권유남(權裕男) : 생몰연도 미상. 자는 문수(文緩), 파조 세마공의 증손, 훈련원 도정 응형(應亨)의 아들. 훈련원 첨정(僉正), 용안현감(龍安縣監)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했다.

권지남(權男)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의 증손, 훈련원 도정 응형(應亨)의 차자. 현령(縣令)을 지냈다.

권지담(權潭) : 1607(선조 40) - ? 자는 경원(慶元), 파조 세마공의 증손, 증좌승지 응성(應聖)의 아들. 1637년(인조 15) 별시무과에 급제, 충장위(忠壯衛)를 거쳐 오위부호군(五衛副護軍)을 지냈다.

권극중(權克中) : 1621(광해군 13) - ? 자는 정숙(正叔), 파조 장단공의 중손, 가선대부 부호군(副護軍) 시형(始衡)의 아들. 1644년(인조 22) 정시무과에 급제, 금위영(禁衛營) 종사관(從事官)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지냈다.

권대윤(權大胤) : 1607(선조 40)- 1637(인조 15). 자는 경주(景冑). 파조 국암공의 현손, 장악원 판사(判司) 몽협(夢協)의 장자. 인열왕후(仁 烈王后)의 장례에 집사(執事)를 하고,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지냈다.

권호윤(權豪胤) : 1623(인조 1)- 1684(숙종 10). 자는 경준(景俊), 호는 동빈(東濱), 파조 국암공의 현손, 장악원 판사 몽협(夢協)의 차자. 권시(權) 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 14세에 칠서(七書)와 <춘추좌씨전>을 독파하고, 태학에 들어가 <소학>을 강의하였다. 1642년(인조 20)에 20세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9년(효종 10)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났을 때, 기년설을 반대하고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삭녕군(朔寧郡) 왕피현(往避峴)에 가서 은거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고결한 인품과 높은 견식을 갖춘 인물로 존경받았으며, 30년의 은거생활을 통하여 학문에만 힘썼으며, 천문과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773년(영조 49)에 채제공(蔡濟恭)의 추천으로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손자 현(鉉)이 수질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자,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가 가증(加贈)되었다. 저서로는 <동빈만륵(東濱漫錄)>이 있다.

권세준(權世準) : 1641(인조 19)- ? 자는 기지(基之), 파조 세마공의 현손, 형조참의 유남(裕男)의 장자. 1670년(현종 11) 별시무과에 급제, 문겸 선전관을 거쳐 통훈대부 행귀후서 별제(行歸厚署)를 역임했다.

권상준(權尙準) : 생몰연도 미상. 자는 사룡(士龍), 파조 세마공의 현손, 형 조참의 유남(裕男)의 차자. 1665년(현종 6) 장릉참봉(長陵參奉), 1668년 (현종 9)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가 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677년 (숙종 3)에 구령만호(仇寧萬戶)가 되었다.

권익준(權益準) : 생몰연도 미상. 파조 세마공의 현손, 형조참의 유남(裕男) 의 3남. 1697년(숙종 23)에 청수만호(靑水萬戶), 1700년(숙종 26)에 무겸 선전관이 되었으며, 3년 후인 1703년(숙종 29)에 문산만호(文山萬戶)에 임명되고, 그 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을 지냈다.

권임준(權任準) : 1645(인조 23)- ? 자는 사형(士亨), 호는 수죽당(修竹堂), 부호군 지담(祉潭)의 차자. 울직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권성행(權聖行) : 1652(효종 3)- 1699(숙종 25). 자는 적도(迪道), 파조 장단공의 현손, 어모장군 행무신겸선전관(行武臣兼宣傳官) 극중(克中)의 차자. 1671년(현종 12)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고, 1686년(숙종 12) 중시(重試)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거쳐 훈련원 주부(主簿)와 판관(判官)을 지냈다.

권성대(權聖大) : 1652(효종 3)- 1710(숙종 36). 자는 대이(大而), 파조 장단공의 현손, 행무신겸선전관 극중(克中)의 3남, 훈련원 판관 성행(聖行)의 쌍생아 아우. 1684년(숙종 10) 33세로 식년시 문과(文科)에 급제, 승정원 가주서 (承政院假注書)에 임명되고, 부봉사(副奉事), 성균관 학정 (學正)으로 승진했고, 성균박사와 서학교수를 거쳐 1690년(숙종 16)에 문겸선전관(文 兼宣傳官)이 되었다. 곧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이듬해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임명됐으며, 1696년(숙종 22)에 남포현감(藍浦縣監)이 돼 부임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 注官)을 겸직하였고, 이듬해에 식년 무과 복시(覆試)의 참시관(參試官)으로 뽑히고,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가 곧 어천찰방(魚川察訪)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에 문겸선전관이 돼 내직으로 들어왔다가 이듬해에 비인현감(庇仁縣監)에 부임했다. 그 후 함종현감(咸從縣監)을 거쳐 통정대부로 승품돼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권세화(權世化) : 1667(현종 8)- 1757(영조 33). 자는 여성(汝聖), 호는 오송헌(五松軒), 파조 오헌공의 후손, 중호조참판(贈戶曹參判) 휴(休)의 아들. 현석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다. 1726년(영조 2) 경학으로 추천돼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47년(영조 23) 대왕대비의 은혜를 찬송하기 위하여 존호(尊號)를 지어 올리니, 조정에서 통정대부로, 곧이어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렸다. 그 후 가의대부에 이어 자헌대부로 승품되고, 1756년(영조 32)에 90세로 정헌대부 (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별세했다.

권시갑(權時甲) : 1672(현종 13)- ? 자는 중보(中甫) 또는 군일(君一), 호는 둔옹(遯翁), 파조 세마공의 후손, 통훈대부 행귀후서 별제(行歸厚署 別提) 세준(世準)의 아들. 1699년(숙종 25) 28세로 식년시 무과에 급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권만갑(權萬甲) : 생몰연도 미상. 자는 평보(平甫), 호는 가능(嘉陵), 파조 세마공의 후손, 선전관 상준(尙準)의 아들, 생부는 통훈대부 행귀후서 별제 세준(世準).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행의로 천거돼 오위 부사과 (五衛副司果)를 지냈다.

권 현(權 鉉) : 1693(숙종 19)- 1773(영조 49). 자는 경보(景寶), 호는 경담(鏡潭), 파조 국암공의 후손, 중형조참판(贈刑曹參判) 의엽(義燁)의 아들. 1711년(숙종 17)에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선친의 훈시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유림(儒林)의 사범이 되니 배우러 오는 자가 많았다. 1762(영조 38)에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돌아가자, 성균관에 나가 유생들과 함께 무고한 죄로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1772년(영조 48) 80세로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 이듬해에 81세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곡장(哭狀)을 지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권필상(權弼尙) : 1708(숙종 34)- 1771(영조 47). 자는 여양(汝良), 파조 국암공의 후손, 처사 충현(忠賢)의 아들. 무과 중시(重試)에 급제, 법성첨절 제사(琺城僉節制使)를 지냈으며, 품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권 함(權 香咸) : 1688(숙종 14)- 1734(영조 10). 자는 형백(馨伯), 파조 오헌공의 후손, 처사 세현(世賢)의 장자. 1717년(숙종 43) 식년시 무과에 급제, 군수(郡守)를 지냈다.

권 의 (權 香奇) : 1692(숙종 18)- 1756(영 조 32). 자는 형숙(馨叔), 파조 오헌공의 후손, 처사 세현(世賢)의 차자. 무과에 급제하여 1732년(영조 8) 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고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됐다. 1736년(영조 12)에 오위장(五衛將), 1742년(영조 18)에 보성군수(寶城郡守)가 되었다가 1747년(영조 23)에 다시 부호군이 되었다. 그 후 1752년(영조 28)에 경 주영장(慶州營將)이 돼 부임했으며, 1756년(영조 32)에 호군(護軍)이 되었다.

권상화(權尙和) : 1694(숙종 20)- ? 자는 춘백(春伯) 또는 화백(和伯) 파조 오헌공의 후손, 동지중추부사 이형(以衡)의 아들. 1725년(영조 1) 32 세로 정시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권유경(權維經) : 생몰연도 미상. 자는 대이(大), 파조 세마공의 후손, 부 사과 만갑(萬甲)의 아들. 무과에 급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냈다.

권중삼(權重三) : 1711(숙종 37)- 1770(영조 46). 자는 화징(華澄), 파조 국암공 후손, 처사 남성(南星)의 아들. 무과에 급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권덕홍(權德弘) : 1718(숙종 44)- 1768(영조 44). 자는 대윤(大潤), 파조 오헌공의 후손. 처사 복(馥)의 아들. 무과에 급제, 1736년(영조 22)에 오위부장(五衛部將)이 되고, 2년 후에 인의(引儀)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고, 1750년(영조 26)에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부임했다.

권사흥(權思興) : 1806(순조 6)~ ? 자는 진여(進汝) 파조 세마공의 후손, 처사 성중(聖中)의 아들.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고,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권형증(權亨曾) : 1850(철종 1)~? 자는 효삼(孝三), 파조 장단공의 후손 처사 철()의 아들. 1893(고종 30) 사헌부 감찰이 되고 이듬해 도정(都正)을 지냈다.

권수노(權綏魯) : 1805(순조 5) ~ ? 자는 이형(而亨), 파조 국암공의 후손, 무과급제 동수(東守)의 아들. 1854(철종 5) 무과에 급제, 부호군을 지냈다.

권영규(權榮圭) : 1819(순조 19)~1897(고종 34). 자는 사유(士裕), 파조 국암공 후손, 처사 동학(東學)의 아들, 생부는 무과급제 동수(東守). 1886(고종 23)에 감교(監校)에 임명되었으며, 그후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했다.

권두규(權斗圭) : 1791(정조 15)- 1879(고종 16). 초명은 두석(斗錫). 자는 문회(文會), 파조 오헌공의 후손, 증 예조참의(贈禮曹參議) 처인(處仁)의 아 들. 1875년(고종 12)에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이 되었으며, 1891년(고종 28)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중됐다.

권용원(權容遠) : 1809(순조 9)- 1895(고종 32). 자는 명생(明生), 파조 오헌공의 후손, 중 호조참판 형직(衡直)의 아들. 오위장(五衛將)을 지냈으며 , 1888년(고종 25)에 수직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가되었다.

권 준(權 埈) : 1844(헌종 10)- ? 자는 원일(元日), 파조 대암공의 후손, 처사 귀욱(貴郁)의 아들. 충무위 사용(忠武衛司勇)을 거쳐 1887년(고종 24)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올라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권태영(權泰榮) : 1846(헌종 12)- 1920(왜정). 초명은 종직(鍾稷), 자는 일화(一和), 호는 국하자(菊下子), 파조 국암공 후손, 처사 집()의 아들. 훈도(訓導)를 지냈다.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익히고, 일찍이 성재(性齋) 허전 (許傳)과 도의(道)로서 교유하여 경술과 문장이 탁월했으나, 시세(時勢) 가 혼미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873년(고종 10) 에 종중 문집인 <영가세고첩(永嘉世帖)>을 찬집(纂輯)하였고, 1900년(광 무 4) 경자에는 종중의 창간 세보인 <안동권씨당종세보(安東權氏唐宗世譜)>의 창제(創製)를 주재하였다.

권종숙(權鍾淑) : 1835(헌종 1)- 1879(고종 16). 자는 치중(致中), 파조 국암공 후손, 증 호조참판 태노(泰魯)의 아들. 오위장을 지냈다.

권신영(權信榮) : 1828(순조 28)- ? 초명은 영신(永信), 자는 윤원(允元), 파조 국암공 후손, 처사 사노(仕魯)의 아들. 1875년(고종 12)에 무과에 급제, 1881년(고종 18) 절충장군에 오르고 오위장을 지냈다.

권종혁(權鍾) : 1835(헌종 1)- ? 자는 치대(致大), 파조 오헌공 후손, 지 중추부사 용원(容遠)의 아들. 훈련원 판관을 지냈다.

권종록(權鍾祿) : 1852(철종 3)- ? 자는 치옥(致玉), 파조 오헌공 후손, 가선대부 해원(海遠)의 장자. 1885년(고종 22) 무과에 급제, 훈련원 주부와 판관을 지냈으며, 1894년(고종 31)에 통위영(統衛營) 좌2소대관(左二小 隊官)이 되었다. 이듬해에 군제개혁에 따라 참위(參尉)와 포공국역원(砲工 局驛員)이 되었고, 1897년(고종 34)에 정위(正尉)로 승진하고, 1898년(광무 2) 대한제국 시위제1연대 포병중대장(侍衛第一聯隊砲兵中隊長)이 되었 다. 1900년(광무 4) 육군 참령(參領)으로 승진되고, 군부포공국 공병과장 (軍部砲工局工兵課長)에 임용됐으며, 이듬해에는 시위대친위대 군물조사위원(侍衛隊親衛隊軍物調査委員)을 겸하였다.

권종하(權鍾夏) : 1855(철종 6)- ? 자는 치경(致景), 파조 오헌공 후손, 가선대부 해원(海遠)의 차자. 1887년(고종 24)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2년(고종 29)에 오위 부사과에 임명되고, 후에 호군(護軍)이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정3품에 승품된 후에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권시영(權時榮) : 1851(철종 2)- ? 자는 덕경(德敬), 파조 대암공 후손, 처사 원석(元錫)의 아들. 1883년(고종 20)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

권덕영(權悳榮) : 1832(순조 32)- 1891(고종 28). 자는 의석(宜錫), 파조 장단공 후손, 처사 낙규(樂圭)의 아들.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권국영 (權國榮) : 1847(헌종 13)- ? 자는 종국(鍾國), 파조 장단공 후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우규(禹圭)의 장자. 1892년(고종 29) 옴직으로 사 헌부 감찰을 지냈다.

권낙영(權洛榮) : 1850(철종 1)- ? 자는 종벽(鍾壁), 파조 장단공 후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우규(禹圭)의 차자. 1892년(고종 29)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권종락(權鍾樂) : 1886(고종 23)- 1926. 일명 종구(鍾九), 호는 운경(雲 耕), 파조 장단공 후손, 처사 기(琦, 관명 仁秉)의 아들. 1919년 기미 3. 1 운동 때 고향 충남 보령군 주산면에서 만세시위(萬歲示威)를 선창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2년 3개월을 복역중 에 옥중(獄中)에서 순국하였다.

권득수(權得洙) : 1873(고종 10)- 1907 별명은 각(), 자는 성근(成根), 파조 국암공 후손, 오위장 신영(信榮)의 아들. 1907년경 200여 의병을 지휘하는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 지평, 양근, 이천, 양주에서 구국항전을 전개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권병수(權秉洙) : 1862년(철종 13)- ? 파조 오헌공 후손, 훈련원 판관 종혁(鍾)의 아들. 행 훈련원 주부(主簿)를 지냈다.

권 자(權 慈) : 1864(고종 1)- ? 자는 내공(乃功), 파조 장단공 후손, 사헌부 감찰 덕영(悳榮)의 아들. 움직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권 희(權 ) : 1898(고종 35, 광무 2)- 1955. 파조 오헌공 후손, 처사 준영(俊榮)의 아들. 1919년 4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일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거국적으로 외치기 위해 사발통문(沙鉢通文)을 회람 시키는 둥 독립 운동(獨立運動)을 하다가 야간 밀의(密議) 중에 일헌(日憲)에게 발각, 체포 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족보와 문집 발간 목록

<세보(世譜) 발간>

1. 안동권씨당종세보(安東權氏唐宗世譜) : 1900년 발간 초판, 6권

2.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 1900년 발간 재판, 3권. 별칭 "경자보(庚子譜)"

3.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 1960년 발간, 2권. 별칭 ‘‘후경자보(後庚子譜)”

4.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 1996년 발간, 4권. 별칭 ”을해보(乙亥譜)"

5. "경자보(庚子譜)" 2001년 영인 발간.

6.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 2016년 발간, 4권. 별칭 ‘‘병신보(丙申譜)"

 

<문집(文集) 발간>

1. 영가세고첩(永嘉世攷帖) : 1873년 발간

2. 영가세 고첩 (永嘉世攷帖) : 1960년 필사 발간

3. 영가세고첩(永嘉世攷帖) : 1993년 영인 발간

4. 영가세고첩 (永嘉世攷帖) : 1차 보완판 1996년 발간

5. 안동권씨정승공종중사록(安東權氏政丞公宗中史錄) : 2011년 발간

6. 영가세고첩 (永嘉世攷帖) : 2차보완판 2016년 발간

7. 안동권씨정승공종 이야기 : 2018년 발간

안동권씨정승공종대종회(安東權氏政丞公宗大宗會)

02629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천호대로83길61(장안동) 화성빌딩 ☎ 02) 925-0227  회장 권기복(權基福)

 

씨알문화축제(2018년 10월10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참가한 안동권씨 정승공종 회장단 깃발 행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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