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진주소씨(晉州蘇氏),알천공

작성일 : 2018-05-02 14:32 수정일 : 2018-05-02 15:34

진주소씨(晉州蘇氏) 내력과 시조(始祖)와 선조(先祖)

소씨(蘇氏)는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 충주, 능주, 익산, 조양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진주소씨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소씨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등한 수천 년의 세월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땅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유구(悠久)한 씨족사를 지닌 성씨라 일컬을 만하다.

소씨(蘇氏)의 연원(淵源)은 동구이(東九夷:배달겨레의 옛 이름)중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왕의 칭호)이 기원전 4241년 풍주배곡(風州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全國土)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姓)을 소(蘇),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는 말과 함께 그의 61세손(世孫)인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비서압, 부소압으로 현재의 길림성)의 하백(河伯)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풍이(風夷)가 기성(己姓)을 소성(蘇姓)으로 바꾸어 소씨가 되었는데, 태하공이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灤河)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때에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 나라 이름을 유소국(有蘇國)이라 하였다. 그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대륙으로 가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백손(伯孫)이 경주로 옮겨 후진한 군주(後辰翰 君主)가 되고 그 뒤 27대(代) 동안 살았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이 바로 진공(辰公)의 5세손(世孫)이다.

기원전 57년에 와서 소백손(蘇伯孫)의 5세손 소벌(蘇伐)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세워 신라(新羅)를 건국했고 벌(伐 = 蘇伐都利)의 25세손 알천(閼川 = 改諱 慶)은 서기 638년 선덕여왕(善德女王) 7년 이찬(伊湌)이 되면서 각간(角干)에 올랐고, 서기647년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2월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고 각종 문헌에 기록되었다.

시조(始祖) 소경(蘇慶)은 진공(辰公:휘 백손)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한 후, 서기 660년(태종무열왕 7년) 봄 3월 3일에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공의 15세손인 계령(繼笭)공이 고려조(高麗朝)에서 크게 현달하여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고, 그 따님이 헌종(獻宗)의 왕비(王妃)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蘇氏)가 진주(晉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주소씨는 시조를 경자보(庚子譜) 족보 수간(편찬)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희철(希哲)공으로 삼아왔으며, 1951년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보(世系譜)인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소종만(蘇鐘萬) 소장(所藏)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하여 비로소 문헌사적(文獻事蹟)과 분묘소재(墳墓所在)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상대등 경(慶)공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辛酉譜)에 나타나 있다.

상대등공의 묘역은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975년 봄에 찾아 봉심(奉審)하게 되었다.

소경(蘇慶)은 577년(진지왕 2년)에 태어나 신라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17관등을 초월하여 임명하던 최고 관직으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여 다스리는 한편, 화백과 같은 신라6대 귀족회의의장)에 올랐다.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군신들이 공에게 섭정을 청하였는데, 이를 사양하며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崇重)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추대하였다. 태종무열왕이 경공(慶公)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이신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공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초명(初名:본명)은 소알천(蘇閼川)이다.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손(孫)이 없었는데, 어느날 꿈에 선조인 백공(白公 = 蘇伐公)이 나타나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구치자(9장군)를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후 경공께서 660년(태종무열왕 7년) 3월 3일 그곳 도사곡(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결국 661년 1월 10일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이에 그 기쁨으로 경공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경사로울 경자(慶字)를 써서 '경(慶)'이라 개명(改名)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까지 9세 9장군(9世 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치자(九豸者 : 장군)를 얻었다.

신라 말기에 왕봉규(王逢規)의 난(亂)으로 인해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장군(將軍) 격달(格達)이 왕건(王建) 휘하에서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무관의 으뜸 벼슬)에 올라 고려(高麗)때까지 관직을 지냈으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계령(繼苓)공을 비롯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광보(光輔) 등 7명의 정승(政丞)이 배출되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15만을 헤아리던 소씨(蘇氏)는 몽고의 침입으로 두 번째 멸문지경이 되었다가 희철공(希哲公)이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가운(家運)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여 1261년(고려 원종 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무숭(茂崇)이 진주를 사관(賜貫) 받았다.

한편 도사(都事)를 거쳐 구례 현감(求禮 縣監)을 지낸 자파(自坡)공의 아들 7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세량(世良)공이 대사간에 오르고, 다섯째 아들인 세양(世讓)공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명(東鳴)공의 아들 두산(斗山)공이 숙종(潚宗)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 당할 때 개탄(慨嘆)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로는 소씨(蘇氏)의 관계(官界) 진출(進出)이 크게 둔화(鈍化)되었다.

이상과 같이 뚜렷한 고증(考證)과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씨족의 기원(紀元)과 흥기(興起)를 밝혀주고 있는 성씨는 흔치 않으니, 이는 우리 민족 역사와 함께 매우 귀중하고 소중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소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 전통(傳統)과 가풍(家風)을 이은 명문가(名門家)로써 긍지(矜持)와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집(文集), 유물(遺物), 유적(遺蹟) 등 관리와 전국 종친들의 결속(結束)을 다지는데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라고 있다.


통일신라 직계 구대구장군의 영광 (統一新羅 直系 九代九將軍의 榮光)

시조(始祖) 휘 경(諱 慶)공과 영아부인(玲阿夫人) 자부(子婦) 이우부인(利雨夫人)등이 이상동몽(異狀同夢)으로 “청강(菁江)에 이사하면 구치자(九豸者)를 얻을 것이다”라는 소벌공 꿈을 꾸고 2993년(서기660년) 경신년(庚申年) 3월 3일에 도사곡(塗斯谷)으로 이사한 후 얻은 손자 3세 복서(福瑞)공부터 11세 격달(格達)공에 이르는 통일신라국에 구대구장군이 대대로 배출되었으니 이는 우리 소씨의 대영광(大榮光)이므로 여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 첫째 장군 복서(福瑞:일명 福世)공은 2세 노흔(老欣)공과 예부령(禮部令) 석경태(昔京太)공의 딸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 사이에 3남중 장남으로 2994년(서기 661년) 문무왕 신유년(辛酉年) 1월 10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귀족인 소씨의 혈통을 충실히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영특 용맹하였고 화랑도에 입문한 후 3010년(서기 677년) 정축년(丁丑年) 4월에 국선(國仙)이 되어 화랑도를 지휘하였고, 3012년(서기 679년) 기묘년(己卯年) 2월에 문무왕(文武王)의 지시로 탐라(耽羅:제주)를 정벌할 때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3029년(서기 696년) 병신년(丙申年) 효소왕(孝昭王) 5년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됨으로서 직계 구대구장군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공이 청주총관에 재임 중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한해(寒害)로 인하여 주민이 어려울 때는 식량을 나누어 주는 등 주민 치정에 열중하였으며 국가를 위하여 많은 공을 쌓았고 3075년(서기 742년) 경덕왕(景德王) 1년 임오년(壬午年) 9월19일 작고하였다.

◎ 둘째 장군 억자(億滋)공은 3세 청주총관 복서(福瑞)공과 대아찬(大阿湌) 김은구(金隱九)공의 딸인 현효부인 김씨(玄孝夫人 金氏) 사이에서 3012년(서기 679년) 문무왕 19년 을묘년(乙卯年) 3월 9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화랑도에 입문하여 심신의 연마와 학업에 능통하여 3041년(서기 708년) 성덕왕(聖德王) 7월 국선(國仙)이 되어 화랑도를 대표하였고, 이후 각종 국난에 공을 세웠으며 3044년(서기 711년) 신해년(辛亥年) 성덕왕 10년에 한주총관(漢州摠管 : 당시는 중원 현재 광주:廣州)이 되었고, 3058년(서기 725년) 을축년(乙丑年) 4월에 전 고구려 북방과 만주지역에 세워진 발해국(渤海國)에 사신으로 다녀 오는 등 관할지역의 통치는 물론 국정 전반에 관한 참여와 인근 국가 간 친선 유지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공은 3072년(서기 739년) 기묘년(己卯年) 효성왕(孝成王) 3년 12월 2일에 작고하였다.

◎ 셋째 장군 후준(後俊)공은 4세 한주총관 억자(億滋)공과 중시(中侍) 배원훈(裵元訓)공의 딸인 대희부인(大熙夫人) 사이에 3043년(서기 710년) 경술년(庚戌年) 성덕왕 9년 2월 20일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3060년(서기727년) 성덕왕 26년 정묘년(丁卯年) 8월에 국선(國仙)이 되었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던 중 3070년(서기 737년) 2월 성덕왕이 승하하고 효성왕이 즉위하게 되었을 때, 효성왕은 공의 선대조상 공로를 가상히 여기어 공을 상주총관(尙州摠管에 임명하시니 이는 구시목(九柿木)의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3082년(서기749년) 3월 경덕왕(景德王)은 천문박사(天文博士)와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둘 때 공의 학식과 천문지리에 박식함을 인정받아 천문박사에 임명했고, 그 후 3133년(서기 800년) 경신년(庚申年) 8월 8일 작고하였다.

◎ 넷째 장군 검백(劍白)공은 5세 상주총관 후준(後俊)공과 상대등 배부(裵賦)공의 딸인 선촌부인(仙村夫人) 사이에 3075년(서기 742년) 효성왕(孝成王) 4년 임오년(壬午年) 1월 1일에 출생하였다. 공도 또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아 화랑도에 입문한 후 3093년(서기760년) 경자년(庚子年) 경덕왕 19년 3월에 국선이 된 후 수도 방위군에 재임 중인 3108년(서기 775년) 혜공왕(惠恭王) 11년 6월 이찬 김은거(伊湌 金隱居)의 모반과 8월 이찬 염정문(廉正門) 등의 연속된 모반이 일어나자 공이 용감히 모반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우고, 3123년(서기 790년) 경오년(庚午年) 원성왕(元聖王) 6년에 웅주도독(熊州都督)으로 승진하게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리다가 3163년(서기 830년) 경진년(庚辰年) 흥덕왕(興德王) 5년 10월 21일 88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 다섯째 장군 상영(尙榮:일명 向榮)공은 아버지 웅주도독 검백(劍白)공과 시중(侍中) 김유정(金惟正)공의 딸인 유천부인(裕川夫人) 사이에 3108년(서기 775년) 을묘년(乙卯年) 5월 5일 태어났다. 공은 3123년(서기 790년) 경오년(庚午年) 원성왕(元聖王) 6년 9월에 어린 나이로 국선(國仙)이 되었다. 공은 국가에 충성심이 강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동료와 아래 사람에게 인자하며 통솔력이 강하여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때 당나라에서는 지역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의 해변에 침입하여 여자와 재물을 약탈함이 빈번해지므로 3152년(서기 820년) 헌덕왕(憲德王)은 공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어 양국 간의 친선과 우호를 다지도록 하였다. 공은 당(唐 )나라를 방문하여 충실히 소임을 완수하고 귀국하자 3154년(서기 821년) 신축년(辛丑年) 공을 청주도록(菁州都督)으로 임명하여 구치자(九豸者)의 다섯째 장군이 되었다. 이때 신라국 전역은 기근이 심하여 자손을 팔아 호구지책을 삼을 정도였고, 공은 관미(官米)를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농사에 열중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3155년(서기 822년) 3월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칭하고 역모하자 공은 헌덕왕과 더불어 김헌창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후 국정이 안정되자 3158년(서기 825년) 기사년(乙巳年) 4월에 도독(都督)을 사임하고 소촌(蘇村: 南谷)으로 이사하여 후손과 후학들을 양육하다가 3178년(서기845년) 기축년(乙丑年) 7월 7일 작고하였다. 이곳에서 7대(代)동안 살았다.

◎ 여섯째 장군 목(穆)공은 청주도독 상영(諱 尙榮)공과 시중 차주원(車周元)공의 딸인 백죽부인(白竹夫人) 사이에 3133년(서기 800년) 경진년(庚辰年) 11월 13일 태어났다. 공도 조상들의 뒤를 따라 화랑도에 입문한 후 3149년(서기 816년) 병신년(丙申年) 4월에 국선이 되었으며 특히 학문에 열중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등 탐구력이 탁월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예에도 열중하여 장군으로서의 기질을 다듬었으며 국왕을 수행하여 각 주군(州郡)을 순방하였고 왕실을 충성으로 지켰으며 3171년(서기 838년) 무오년(戊午年) 2월에 김양(金陽)이 청해진(淸海鎭)에서 모반하자 이를 정벌하였다. 공은 문학과 저술에 열중하던 중 늦은 나이인 3195년(서기 862년) 임오년(壬午年) 경문왕(景文王) 2년에 청주도독(菁州都督)에 임명된 후 3203년(서기 870년) 경인년(庚寅年) 11월 20일 작고하였다. 공은 당대의 대문장가로서 저서로서는 역대제왕고(歷代帝王攷)와 풍류사(風流史)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 등이 있고 구대구장군중 여섯 번째 장군이며, 삼대 소문장 중 첫 번째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이고 희경(僖景)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 일곱째 장군 은(恩)공은 청주도독(菁州都督) 목(穆)공과 이숭정(李崇正)공의 딸인 계월부인(桂月夫人) 사이에 둘째 아들로 3160년(서기 827년) 정미년(丁未年) 12월11일 출생하였다. 공도 또한 화랑도에 입문하여 3178년(서기 845년) 을축년(乙丑年) 4월에 국선이 되었으며 3181년(서기 848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연구한 결과 당나라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귀국하여 젊은 나이로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었으니 이때가 3183년(서기 850년) 경오년(경午年)이다. 일부에서는 장인 대아찬(大阿湌) 최씨 후원의 덕분이라고 하나 이는 구시목(九柿木)의 음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은 부친의 대문장을 이어받아 문장이 저명하였고 저서로는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동이풍속고(東夷風俗攷), 동이성씨고(東夷姓氏攷), 신라명벌록(新羅名閥錄) 등 9책을 남겼으며 부친 휘 목(穆) 과 삼남 휘 문(汶)을 합쳐 당대 소씨 삼대소문장(三代蘇文章) 이라고 세상에 알려져 칭송이 자자하였다. 3221년(서기 888년) 무신년(戊申年) 3월 29일 작고하였고 효정(孝定)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 여덟째 장군 송(淞)공은 웅주도독 은(恩)공과 대아찬(大阿湌) 최귀(崔貴)공의 딸인 송로부인(松路夫人) 사이에 둘째 아들로 3192년(서기 859년) 기묘년(己卯年) 12월 2일 출생하였다. 공도 또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화랑도에 입문한 후 3210년(서기 877년 정유년(丁酉年)에 국선이 되었고 헌강왕(憲康王)이 시문을 좋아하고 문장가를 우대함을 보고 최치원(崔致遠)등 명사의 문필을 탐독하여 문무가 당대에 떨치자 헌강왕(憲康王)은 3218년(서기 885년) 기사년(己巳年)에 강주도독(康州都督)에 임명하였다. 그후 3222년(서기 889년) 기유년(己酉年)에 개훤(介萱)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봉기로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전장(戰場)에 나가 있을때 왕봉규(王逢規)와 차윤웅(車閏雄)이 공의 명예와 재산, 부인을 탐내어 역모를 꾸민 후 사병으로 하여금 공을 사살하고 허위로 보고하여 왕봉규 자신이 강주도독이 되니 애석하게도 32세의 젊은 나이로 3223년(서기 890년) 경술년(庚戌年) 11월 18일 작고하였다.

◎ 아홉 번째 장군 격달(格達)공은 강주도독 송(淞)공과 시중 김윤한(金允漢)공의 딸인 정효부인(正孝夫人) 사이에 3224년(서기 891년) 신해년(辛亥年) 4월 14일 유복자로 태어났다. 공은 화랑도에 입문하여 문무를 연마하고 심신을 단련하는데 유독히 총명하고 몸이 거대하여 청소년시절부터 장군의 기질로 기골이 장대하게 성장하였다. 3249년(서기 916년) 악양(岳陽)에 고소산성(姑蘇山城)을 쌓는등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고, 후일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고,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이 되니, 시조 경공(慶公)이 진주로 이거한 후 구시목(九柿木)의 은덕으로 구대구장군(九代九將軍)이 배출되었으니 현몽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조 상대등 경(上大等 諱 慶)공, 그의 손자 사공 복정(司空 諱 福廷)공, 5세손 중시 후로(中侍 諱 後老)공, 6세손 집사성시중 유문(執事省侍中 諱 柔文)공, 7세손 집사성시중 희영(執事省侍中 諱 希榮)공, 9세손 집사성시중 사(執事省侍中 諱 思)공 등은 신라조 육정승(六政丞)었으며, 8세손 청주도독 목(菁州都督 諱 穆)공, 9세손 웅주도독 은(熊州都督 諱 恩)공, 10세손 문(汶)공은 신라 삼대소문장(三代蘇文章)으로 진주소씨의 기틀을 잡았으니 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빛나는 진주소씨의 영광이다.


고려국 소사(高麗國 蘇史) - 진주소씨11세부터 27세까지 약사(晉州蘇氏 11世부터 27世까지 略史)

단기 3251년(서기 916년)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고려국(高麗國)을 건국한 이래 단기 3725년(서기 1393년) 34대 공민왕(恭愍王)때까지 475년 간 우리 진주소씨(晉州蘇氏)도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서부터 국구(國舅), 정승(政丞), 판서(判書), 장군(將軍)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었고 충효열(忠孝烈)에 빛나는 명문벌(名門閥)임을 후세들은 잊지 않길 바란다.

➤ 11세 강평공(康平公 諱 格達)은 대장군으로서 고려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 큰 공을 세워 단기 3269년(서기 936년)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이 됨으로써 진주소씨(晉州蘇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고려 명벌(高麗 名閥)로 정초(定礎)를 굳히었다.

➤ 12세 진흠(振欽)공은 선대 격달장군(格達將軍)의 음덕(蔭德)을 이어받고 영특 총명하여 단기 3283년(서기 950년) 광종(光宗) 경술년(庚戌年)에 판관(判官)이 되었다.

➤ 13세 류(瑬)은 자(字)가 경지(景之)요, 세월이 장기화 되고 묘소를 확인치 못하여 전국종친회에서 단기 4329년(1996년) 병자년(丙子年)6월 22일 경기도 안성시 원곡동 지문리 보가존이에 설단제향(設壇祭享)하였다

➤ 14세 호(顥)공은 이부상서(吏部尙書)와 호부랑중(戶部郞中)이며, 동생인 현(顯)공은 단기 3367년(서기 103년)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배명 받음으로써 형제가 상서(尙書)를 지냈다.

➤ 15세 계령(繼笭)공은 단기 3404년(서기 1071년) 문종(文宗) 경술년(庚戌年)에 신호위 상장군(神號衛 上將軍)에 이어서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며 영애(令愛)가 헌종왕비(獻宗王妃)로 책봉 되므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 되었고 소문리(蘇文里)에 구인사(九印祠)와 하마비(下馬碑)를 하사받아 건립하였는데, 이때에 중서령(中書令) 최사추(崔思諏)가 시를 지었다, “소씨문중에 아홉 해태가 마땅히 탄생하여 명문이 죽지 않음은 하늘의 도이라”(蘇門九豸 應出名門不死 天神祐)라고 읊었다. 동생 경보(景輔)공도 단기 3395년(서기 1062년)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이다.

➤ 16세 문하시중 광보(門下侍中 光輔)공, 문하시중 경보(門下侍中 景輔)공, 문하시중 세린(門下侍中 世麟)공, 문하시중 이관(門下侍中 以寬)공, 상서령 신관(尙書令 信寬)공, 문하시랑 평장사 한공(門下侍郞 平章事 漢公)공, 문하시중 무종(門下侍中 茂宗)공, 정당문학 문철(政堂文學 文哲)공, 정당문학 정(政堂文學 靖)공은 고려조 구정승(九政丞)이다.

➤ 17세 세기(世麒)공은 예부상서(禮部尙書)이나 무후(无后)이고, 제(弟) 세린(世麟)공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이다.

➤ 18세 이관(以寬)공은 단기 3504년(서기 1171년) 명종 1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이고 수문전대학사(修門殿大學士)이며, 동생 신관(信寬)공은 상서령(尙書令)이다.

➤ 19세 경손(慶遜)공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사 상장군(樞密院事 上將軍)으로 사정(沙丁)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 겸 개성부 순무사(開城府 巡撫使)이다.

➤ 20세 한공(漢公)공은 시중상서 문하시랑 평장사(侍中上書 門下侍郞 平章事)이고, 동생 한거(漢巨)공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 21세 무종(茂宗)공은 시중상서 평장사(侍中上書 平章事)이고, 동생 무숭(茂崇)공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이다.

➤ 22세 함(涵)공은 산원동정(散員同正)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으로 단기 3587년(서기 1254년) 고종(高宗) 41년에 몽고군이 침범하였을 때 차라대(車羅大)의 막장 아모간(阿母侃)의 일만대군을 맞아 아군 일천명과 진위(振威)에서 격전하여 순절(殉節)하였으므로 고종(高宗)은 진위 여좌동(如左洞) 일대의 전장(田庄)을 하사(下賜)하였다.

➤ 23세 희철(希哲)공은 정의대부(政議大夫)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고, 동생 문철(文哲)공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며, 영곤(永崑)공은 상서(尙書)이다.

➤ 24세 정(靖)공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단기 3649년(서기 1316년) 충숙왕(忠肅王) 3년에 구장지(九將志)를 찬하였고 구인사지(九印祠志)를 재간(再刊)하였으며 단기 3653(서기 1320년)에 부소보(扶蘇譜:延祐譜)를 발행하고 서문을 쓴 고려말기에 중대한 문헌을 남겼으며, 동생 단(端)공은 문과(文科) 정의대부(政議大夫)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역임하였다.

➤ 25세 약우(若雨)공은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를 역임하였고 단기 3653년(서기 1320년) 충숙왕 경신년에 11세 휘 격달(格達)공이 현문(玄文)으로 간행한 동근보(東槿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동생 약운(若雲)공은 염주 병마사(鹽州 兵馬使)로 단기 3667년(서기 1334년) 갑술년에 경원적(慶源賊)을 토벌하여 부사(府使) 승진되었고, 약해(若海)공은 성균춘방진사(成均春房進士)이다.

➤ 26세 을경(乙卿)공은 광정대부 개성윤 판도판서(匡靖大夫 開城尹 版圖判書)이며 단기 3707년(서기 1374년) 공민왕(恭愍王) 정란(政亂)으로 진위(振威)에 낙향하였고, 동생 을충(乙忠)공은 사각고판각(史閣庫判閣)이며, 을신(乙信)공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이고, 을생(乙生)공은 성균진사(成均進士)이며, 경보(敬輔)공은 숭문원 승지(承文院 承旨)이다.

➤ 27세 담(覃)공은 운주령 겸 권농방어사(雲州令 兼 勸農防禦使)이고, 동생 천(遷)공은 사재감소윤(司宰監少尹)이며, 율(栗)공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는 등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15만명이 생존하였으나 몽고의 침략전쟁으로 멸문지경이 되었으며, 경기도 평택, 안성지역과 경북 대구지역, 전주, 익산지역, 남원, 보성지역, 공주, 청양지역, 진도, 완도 등지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문하시중 광보(門下侍中 光輔 ), 문하시중 경보(門下侍中 景輔), 문하시중 세린(門下侍中 世麟), 문하시중 이관(門下侍中 以寬), 상서령 신관(尙書令 信寬), 문하시랑 평장사 한공(門下侍郞 平章事 漢公), 문하시중 무종(門下侍中 茂宗), 정당문학 문철(政堂文學 文哲), 정당문학 정(政堂文學 靖)은 고려조 9정승(九政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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