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태원선우씨시조(太原鮮于氏),선우정(鮮于靖),태원선우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4-02 12:02 수정일 : 2018-04-02 12:22

득성의 연원

우리나라 선우씨(鮮于氏)의 기원은 기자(箕子)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그의 장자 송(松)이 2대 장혜왕(莊惠王)으로 즉위(卽位)하면서 아우 중(仲)을 우산국(于山國)에 봉(封)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였음으로 조선과 우산국에 있는 자손들이 조선(朝鮮)의 선(鮮)과 우산(于山)의 우(于)자를 각각 취하여 선우(鮮于)라고 성을 삼았고 본관을 태원(太原)이라고 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뒤에 41대 애왕(哀王, 휘는 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하여 금산군(金山郡: 현 전라북도 익산군)에 마한(馬韓)을 세웠는데, 10대 계왕(稽王)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때 원왕(元王)에게는 아들 3형제(兄弟)가 있었는데 그 중 양(諒)이 평안남도 용강군 오석산으로 들어가 황룡국을 세우고 왕으로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왔고, 하나는 청주한씨(淸州韓氏), 다른 하나는 행주기씨(幸州奇氏)가 되었다.

양(諒)의 10세손 병(柄)에 이르러 나라를 고구려(高句麗)에 빼앗기고 서민(庶民)으로 태원선우씨의 세계(世系)이어 왔으나 고증과 문헌이 없어 소목계통(昭睦系統)을 밝히지 못하고 원손(遠孫)으로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정(靖)을 1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원선우씨는 전국에 3,3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태원선우씨 분파도

항렬표

역대 인물 - 태원선우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선우석(鮮于碩) : 부윤(府尹)을 지냄

선우성(鮮于成) : 중낭장(中郎將)을 지냄

선우복 : 상호군을 지냄

선우수(鮮于守) : 안흥부원군윤(安興府院君)

선우적(鮮于迪) : 소윤(少尹)을 지냄

조선시대 인물

선우경(鮮于景) : 별장(別將)을 역임했다.

선우현(鮮于賢) : 중량장(中良將)을 역임했다.

선우다일(鮮于多日) : 중량장(中良將)을 역임했다.

선우강(鮮于江) :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했다.

선우석(鮮于錫) :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했다.

선우협(鮮于浹) : (1588~1653) : 자(子)는 중윤(仲潤) 호(號)는 둔암(遯庵). 시호는 문간(文簡). 숭인전(崇仁殿) 감(監) 선우식(鮮于寔)의 차남(次男). 일찍이 김태좌(金台佐) 문하(門下)에서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를 배우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신독제(愼獨齊) 김집(金集)을 찾아가 도(道)를 물었으며, 평안도(平安道) 용악산(龍岳山)에 들어가 후진을 가르치며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묘리를 터득한 학자로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했는데 인조말에 희릉(禧陵, 중종(中宗)의 비(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인종의 母后) 참봉(參奉)에 제수되고, 효종(孝宗)이 학행과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성균관 사업(成均館 司業)으로 정중하게 부르자 벼슬에 나아가 치심궁리(治心窮理)의 요체와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도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으며 세상에서 그를 “관서부자(關西夫子)”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유고(遺稿) 「태극변해(太極辦解), 태극문답(太極問答), 역학설(易學說), 성리서(性理書)」 등이 전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효종 무술9년(1658)에 평안남도 용악산록에 용곡서원을 세우고 숙종 계해9년(1683)에 사액하였다. 묘는 평양 서쪽에 있는 형태산에 있고 묘비에는 문인들이 “遯庵先生”이라고 기록하였다. 후손들은 선우둔암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선우혁(鮮于爀) : 한말 독립운동가.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체포(逮捕)되어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金九), 여운형, 이광수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교통부 차관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