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거창신씨시조(居昌慎氏 始祖),신수(慎修)

작성일 : 2018-03-18 14:55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유래

중국 고대에 東周의 왕족이었으나 기원전 450년경에 태자 건(建)이 계모 등과의 권력다툼에서 태자의 지위를 잃게 되자 이웃나라에 망명하였던 바 그 아들 승(勝)이 오(吳)나라에 가서 신현(慎縣)이라는 곳에 정착하고 당시의 관행에 따라 그곳의 지명을 성씨로 하니 이것이 중국신씨의 기원이라 한다.

중국 신씨의 유래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는 여러 설이 있으나 문중에서 중국신씨들과 연계하여 2차에 걸친 탐사를 통하여 도출된 추론으로 앞으로의 연구를 통하여 사실로 확인 될 때까지는 위에 적은 유래가 개연성이 가장 높은 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시조(始祖)는 신수(慎修)이시다. 수(修)는 고려 문종 22년, 서기 1068년에 송나라 개봉부사람으로 송나라 진사였고 학식이 높고 의학에 정통하였다 (문헌근거 : 고려사, 고려사절요)

서기 1068년 고려 문종 22년 7월에 송이 북방의 신흥세력인 걸안의 압력을 고려와 함께 견제할 목적으로 고려와 정식 국교를 열기 위하여 사신 학자 등 많은 인적 물적 교류를 했는데 그 중 사신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개경에 정착 하였다. 수(修)가 귀화하자 한창 중흥기를 맞은 고려에서 문종에게 크게 중용되었다.

수(修)는 11대 문종에서 15대 숙종에 이르기까지 5대왕 34년간 력사(歷事)했으며 숙종 때에는 최고품계의 벼슬에 올라 수사도 좌복사 참지정사(守司徒 左僕射 參智政事)에 올랐다.

서기 1101년 신사(辛巳) 12월에 졸(卒)하시니 나라에서 제제사(弟祭使)를 보내오고 공헌공(恭獻公)의 諭號를 내렸다. 慎氏는 고려 고종 년 간에 7세조 執平께서 神號衛大將軍으로 抗夢戰을 이끄시다가 戰死하시고 당시의 조정이 親元派에 의하여 장악되자 그 아드님 成께서 居昌劉氏인 처가의 연고지를 찾아 거창에 世居사신 연유로 거창을 本貫으로 삼게 된 듯 하다.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조공(祖公)을 비롯 십세조위(十世祖位)의 제단祭壇

居昌慎氏 始祖 유래 記이후 개성에 정착하여 고려시대 와 조선조 초기까지 그 곳에 세거하였던 바 13世 까지 單傳으로 이어지면서 일부는 失傳하기도 하고, 조국이 분단되면서 반세기 이상 후손들이 갈 수 없는 땅이 되어 十世祖까지의 墓가 없을 뿐 아니라 祭享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구나 북한의 사회주의 政體가 조상의 묘를 유지하게 하였을지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남한의 宗中에서 우선 통일이 될 때 까지만 이라도 門中의 都先山인 경남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 龜山齋 先山 山麓에 갈 수 없는 墓에 가름하는 十祖位 祭壇을 設壇하기로 하고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지역에 있는 선대의 묘소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所望하면서 都先山 山麓에 터를 마련하여 1990년 11 원4일에 十祖位 祭壇을 竣工하고 그해부터 음력 10월10 일에 祭享을 드리고 있다. 그래서 거창의 龜山齋는 인근의 四先山과 함께 門中에 생전에 반드시 찾아가 참배해야 하는 더욱 의미 있는 聖所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孝 思想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일깨워 가르치기 위하여 大田市가 造成한 “뿌리 공원”에 居昌慎氏 의 “성씨 유래비”가 있다.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 위에 힘차게 솟아 森羅萬象에 생명의 힘을 공급하는 태양을 이고 있는 모습의 碑에 우리성씨의 유래가 간추려 적혀 있다.

華麗하진 않지만 莊重하고 嚴肅한 분위기도 좋고 碑文도 聽明한 집안의 後裔답게 文學的이다. 돌에 새긴 대로 천만년 거기에 있어 우리 문중의 빛을 萬邦에 비추어 줄 것이다.

• 始祖: 恭獻公(공헌공) 諱는 修, 正一品 守司徒(수사도)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관직에 재임했으며 특히 학문 과 의술에 고명하신 분이시었다.

• 二世祖: 尙書公(상서공) 諱는 安之, 예종임금과 인종임금 당시 수주지사(水州知事) 병부상서(丙部尙書) 관직을 역임, 漢學과 의술에 통달하시어 주로 中國에 보내는 國書를 담당하여 지으셨던 분이시다.

三世祖: 諱는 永隣(失傳)

四世祖: 諱는 應龍(失傳)

※ 위의 二世祖와 四世祖에 관한 것은 世譜에는 기록이 없었으나 여러 가지 방면으로 문헌을 조사 연구하여 밝혀졌다. 그러나 宗論이 통일되지 않고 있어 그대로 참고 로만 적어 둔다.

• 五世祖: 太保公의 諱는 翼, 太子太保 종1품의 王子師 벼슬에 임했었다.

• 六世祖: 小保公의 諱는 世功, 太子少保, 종2품의 王子師의 벼슬에 계셨다.

• 七世祖: 將軍公, 諱는 執平, 동북면을 담당하는 兵馬使(병마사)로 혁혁한 전공올 세우셨으나 모함으로 전사 하시어 그로부터 고려조가 쇠퇴하기 시작 많은 恨을 남게 하셨다. 묘소는 함경도 北靑郡 中山里에 안장하시다.

• 八世祖: 檢校公 諱는 成, 軍器監事 벼슬에 이르고 居昌에 기처하시니 1260년 경에 居昌을 本貫으로 삼으셨 다. 配位는 居昌 劉씨이다.

• 九世祖: 同正公 諱는 元幹, 檢校 禮賓承(예빈승) 同正벼슬에 계셨고 配位는 진주 鄭씨이다.

• 十世祖: 評理公 諱는 儒(유), 匡靖大夫(광정대부), 門下評理(문화평리), 密直副使(밀직부사) 上護軍(상호군) 정2품 벼슬에 계셨다.

※ 이상 十祖位의 묘소는 대부분 失傳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990년 宗親들의 헌성금으로 祭壇을 꾸미시고 통상 龜山齋(구산재)라 하여 모시고 있다

• 十一世祖: 榮州公 諱는 思敬, 벼슬은 朝散大夫(조산대부) 知榮州郡事에 이르렀고, 贈嘉靖大夫(증가정대부) 이조참판이시다. 配位는 江陽 郡夫人 협천 李씨이다. 묘소는 거창군 구산(龜山)에 계시고 이곳을 가리켜 우리 慎씨의 都先山이라 한다.

• 十二世祖: 判書公 諱는 仁道, 벼슬은 安城현감에 이어 李氏朝鮮이 개국하고 漢陽에 천도하자 초대 漢城府尹으로 贈正憲大夫 호조판서 이시다.

묘소는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에 계시고 이것을 가리켜 鳳山齋(봉산재)라 하며 이곳을 우리의 次先山이라 하고 있다.

배위 盧씨의 묘소는 거창군 남상면, 栗峴齋(율현재)라 한다. 세번째 先山이다.

• 十二世祖: 襄烈公 諱는 以表, 通政大夫判 利1+1縣事 贈 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戱林府院君이며 그의 孫은 章成 公 諱 承善께서는 領議政, 14대손인 그는 예종 때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었으며, 성종 때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여러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연산군 때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임영대군(臨漏大君: 세종의 넷째아들)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딸은 연산왕비(燕山王妃)가 되었으며, 아들 수근(守勤)이 정승이 되고, 손녀(수근의 딸)가 또 왕비(中宗妃)가 되었으므로 그 영화는 극에 이르렀다. 묘소는 거창군 구산에 계시고 배위 薛씨의 묘소는 산청군에 있으며 生林齋(생림재)라 하며 이 곳을 네 번째 先山이라 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거창신씨는 전국에 51,1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