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양성이씨시조(陽城李氏),이수광(李秀匡)

작성일 : 2018-03-17 23:40

양성이씨(陽城李氏) 창씨(創氏) 유래(由來)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이 서기 1,040년대 송(宋)나라에서 특진금오위대장군 상주국(特進金五衛大將軍 上柱國)의 작위(爵位)를 받으시고, 고려(高麗)에서 삼중대광보국 양성군(三重大匡輔國 陽城君)에 봉해짐으로 득성(得姓)하였다.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에 와 문종조(1,047~1,083)에 벼슬하여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겸전(剛柔兼全)한 외교술로 상호이해를 잘 타일러 슬기롭게 설득 무마하여 그들의 동침야욕을 봉쇄, 선린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나라를 안연(晏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제일(第一)로 책훈되었다. 또한 출장입상(出將入相)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에 비하였다.

송나라에 변란이 있어 고려에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 달에 세 번 승첩(勝捷)을 거두매, 송나라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위의 벼슬을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양성(陽城)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李秀匡)이 정란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에서 연유 되었다. 시조의 유지(遺址)가 양성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떨어져 있었다고 전해 왔는데, 표지(標識)가 없어 실전 했다. 양성은 지금 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팽택시 죽백동 일원에 있는 옛 지명이다. 따라서 양성이씨는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의 유좌지원(酉坐之原) 양성이씨 시조묘역에 시조위 외 5위를 설단, 매년 음 10월 1일에 세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양성이씨는 상주국공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후, 900여년 30여대를 내려 오는 동안 남한에만 4만4천여명에 이르는 수에 달했으며, 장상(將相)이 줄을 이어 려조에는 주로 정치 외교무대에서 화려한 활동을 해 왔으나, 조선조에 와서는 충절청직한 사족의 긍지를 고수하여 정치보다는 학문을 선호하고 부귀보다는 안분에 자족해온 씨족으로 오늘에 이르러 오고 있다.

양성이씨의 가훈 "석탄공 계자시"( 陽城李氏 家訓 "石灘公 戒子詩")

“북풍이 울부짖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너희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지나 않는지 걱정되어 한숨 지누나.

망령되게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면 끝내 이익 됨이 없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면 도리어 해를 입는 법.

색은 반드시 몸을 망치니 모름지기 삼가야 하고, 말은 자칫하면 자기를 해치기 쉬우니 깊이 생각 하여 말 할지어다.

우리가 할 일은 충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충효를 몸소 실천하면 그 명예 자연히 온 나라에 알게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