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원주이씨(原州李氏),이춘계(李椿桂)

작성일 : 2018-03-17 15:28 수정일 : 2019-09-03 10:11

  

 ▶ 원주 이곡사는 시조 춘계공 이하 14위의 조상 위패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으로 1989년 10월 30일 창건되었으며 원주이씨 종중의 표상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원주이씨의 연원

원주이씨(原州李氏)의 원조(元祖)는 서기 기원전(紀元前) 200년대에 중국 한고조(漢高祖)때 진란(秦亂)을 피하여 중원절서지방(中原浙西地方)에서 고조선(古朝鮮)에 들어오신 이래 고대(古代) 씨족사회(氏族社會)를 이루고 군거(群居)하여 신라(新羅) 16대 흘해왕조(訖解王朝)(서기310년-365년대)에 원시조(遠始祖) () 진민공(眞民公)께서 신라에 득사위(得仕位)하시고 진민공의 27세손인 휘() 도균공(道均公)의 둘째(次男)이신 28세손 휘() 춘계공(椿桂公)께서 고려17대 인종(仁宗), 18대 의종(毅宗) 양대(兩代) (서기1122-1170)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내신 바, 춘계공(椿桂公)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그 후손이 원주에 집성촌을 이루고 원주(原州)를 본관(本貫)으로 하고 소목상전(昭穆相傳)하여 오늘의 대성(大姓)으로 발전하여왔다.

 

시조(始祖)로부터 8세손(八世孫) 중시조(中始祖) 희백(希伯) 부령공(副令公)의 자() 9세손(九世孫) 녹규(祿圭) 판위공(判衛公)10(十世) 임공(琳公), 인공(璘公), 침공(琛公) 3형제를 두었으니 1男 임() 봉어동정공(奉御同正公)이 동정공(同正公) 시조(始祖)이며, 2男 인공(璘公)의 자 11세손(十一世孫) 방진(邦珍) 현령공이 12세손인 아들 완() 주부공(主簿公)과 거() 봉례랑공(奉禮郞公) 형제를 두었으니 장남(長男) 완공(玩公)이 주부공(主簿公) 파시조(派始祖)가 되었고, 차남(次男) 거공(琚公)이 아들 6형제(六兄弟)를 두었으니 13世 기(), (), (), (), (), () 6형제(六兄弟)가 각기 은사공(隱士公), 교도공(敎導公), 사용공(司勇公), 사직공(司直公), 갈촌공(葛村公), 평천공(平川公)으로 6개 파시조(派始祖)를 이루게 되었고, 녹규(祿圭) 판위공(判衛公)3(三男) () 병사공(兵使公)은 병사공파(兵使公派) 시조(始祖)로서 모두 9개파()로 분파(分派)되어 있다.

원주이씨 중흥비

  

 

▶ 이곡사(梨谷祠) 삼문(三門사당(祠堂)과 삼문 출입은 경건한 숭모의 마음으로 양측문을 이용하는데 입문시(入門時)는 이곡사 위치에서 볼 때 우측문, 출문시(出門時)는 좌측문을 이용하고, 중문(中門)은 영혼신(靈魂神) 출입문으로 일반참배객은 출입을 삼가하여야 한다.

 

▶ 이곡사 경내  추원단 전경

 

시조 춘계공(椿桂公) 갈명(비문) - 7인비(仁庇)

1() 시조(始祖)의 휘()는 춘계공(椿桂公)이며 고려 인종, 의종 양 조정에 벼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2()의 휘는 수승(守升)이고, 묘소는 광주 온정동(廣州 溫井洞)에 있다고 전해오는데 알려지지 않았다.

3()의 휘는 단성(端誠)이고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냈다.

4()의 휘는 유광(有光)이고 좌경군(左京軍)을 지냈다.

5()의 휘는 겸()이고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6()의 휘는 공량(公亮)이고 국자진사를 지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머리깎고 북방 이민족의 복장을 하라는 명()이 내리자 불복하고 은거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7()의 휘는 인비(仁庇)이고 호조총랑(戶曹總郞)을 지냈다.

7()까지의 묘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8()의 휘는 희백(希伯)이고 고려 남부부령(南部副令)을 지냈다.

이때부터 문중을 빛낸 후손이 많고 빛나는 문헌(文獻)이 많으나 다 기술하기 어렵다. - 갈라진 물줄기가 긴 물은 그 물 근원이 반드시 깊으며,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는 그 뿌리가 튼튼한 법이다. 공의 덕업(德業)이 그렇듯 성대(盛大)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후손이 이렇듯 번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묘소가 전해지지 않아 우리가 근본의 은덕을 정성드려 갚을 묘소가 없음에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므로 신축년(辛丑年)에 도유사(都有司) 재훈(在薰) · 강연(康淵)씨 등 종중의여러분과 협의하여 찬조금을 모아 여기에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설치하여 이제는 높으신 영령을 봉안한 곳이 있으니 뭇 후손들이 조상을 우러러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29 세손 전원성군수 중연(重淵)  29 세손 영연(泳淵) 삼가 기록함. 그 사적을 써서 비 뒷면에 기록하노라.

 

8세 중시조 희백공(希伯公)의 전기(傳記)

▶ 8세 중시조 희백공 希伯公 묘소 - 강원 원주시 간현로186번길 132

 

시조(始祖) 춘계공(椿桂公)8세손 휘() 희백공(希伯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남부부령(南部副令)의 관직을 지냈으며 일행천리(一行千里)하는 조화무쌍(造化無雙)한 희귀인재(稀貴人材)였다.

()은 생존시 송도(松都)에서 유언(遺言)하기를 만고에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나의 묘지는 수로(水路)에 운구(運柩)하여 정박지점(碇舶地点)에서 구산(求山)하라하였으므로 하세(下世)한 후 사자(嗣子) () 녹규공(祿圭公)이 유언(遺言)을 받들어 고위영구(考位靈柩)를 배에 모시고 남한강 상류로 수로운구중 현 간현안섬강나루터에서 해가 저물어 정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출선(出船)하고저 하였으나 배가 교착(膠着)되어 불리(不移)하므로 상주(喪主)인 공()이 전날 밤의 선고유언(先考遺言)이 현몽(現夢)으로 계시(啓示)됨을 상기하고 동반한 지사(地師)와 의논하여 근방에서 구산(求山)하게 이르러 현 이목동(梨木洞)의 선고묘지(先考墓地)가 길지(吉地)임을 탐구하고 명당(明堂)을 정하여 안장하였다 하며, 이곳 산세는 치악산이 주봉이고 좌편으로 백운산 문필봉(白雲山文筆峰)이 연하여 장장장엄(長長莊嚴)한 산맥의 정기가 길지(吉地)에 응결되고 부배형국(俯拜形局)의 삼태산(三台山)을 바라다보는 인산지수(仁山智水)의 절경지지(絶景之地)이며 진검상절병형(眞劍上節柄形)인 동시 괘등형국(掛燈形局)이고 이중삼중으로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옹위(擁衛)하고 있으며 이목동입구(梨木洞入口)의 섬강수(蟾江水)는 등유(燈油)에 비하여 천만년을 장유불식(長流不息)하고 영세(永世)에 마르지 않을 것이므로 후손이 크게 번성하고 문관(文官)보다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이 원주일대를 터전으로 삼고 군거(群居)하여 집성지(集成地)를 이루고 있으며 부령공(副令公)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추모(追募)하고 있다.

부령공묘갈명(副令公墓碣銘)은 표면에 큰 글씨로 高麗南部副令李公希伯之墓라고 쓰고 그 뒷면에 皇明崇禎後 二十四年(一六六七丁未 九月)라 써서 건립하였다.

▶ 희백공 希伯公 묘소에서 바라본 전경

 

9세 녹규공(녹규공) 판위공 묘갈문(判衛公墓碣文)

▶ 9세 녹규공의 묘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대덕리 대덕동)

표면에 큰 글씨로 ‘정순대부판위위시사이공녹규지묘(正順大夫判衛尉時事李公錄圭之墓)’라고 썼고 뒷면 음기(陰記)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은 원주의 대성(大姓)인 이씨로 국자진사(國子進士) 휘 수승(守升)의 후손이다.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공량(公亮)인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인비(仁庇)인데 판도총랑(版圓總郞)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희백(希伯)인데 남부부령(南部副令)을 지냈고, 응양상장군(應揚上將軍) 원충갑(元沖甲)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공(公)을 낳았다.

공은 고려 조정에 벼슬하여 판위위시사(判衛尉時事)에 이르렀다. 아들의 휘는 임(琳)인데 동정주부(同正主簿)이였고, 또 아들 휘 인(璘)은 종부사령(宗薄寺令)으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역자 주)하였으며, 아들 휘 침(琛)은 강원도절도사(江原道節度使)였는데 딸이 금성 부원군(金城府院君) 최철(崔哲)에게 시집갔다.

세상을 빛낸 벼슬을 한 자손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조정에 벼슬하여 장상(將相; 장수와 재상의 합칭어. 역자 주)의 지위에 오른 외손들도 손꼽지 못할 정도로 많으니, 이는 공이 쌓은 덕이 많아 그 경사가 후손에게서 피어난 증거라 할 수 있다. 묘는 원주시 호저면 대덕리 대덕동 간좌곤향(良坐坤向)으로 자리하였다.

만력39년(광해군3년. 서기1611년. 역자주)에 8대손 첨지(僉知. 관명. 첨지중추부사. 역자주) 봉(逢)과 현감 응엽(應曄), 사성(士誠),광백(光白)과 군수(郡守) 정수, 인민(仁敏) 생원(生員) 택(澤), 외손인 판서 강신(姜伸), 참의 남이공(南以恭),승지 정각(鄭穀), 병사(兵使) 이응해(李應懈),이응표(李應彪), 군수 원욱(元彧), 주서(注書) 원탁(元鐸)등이 작은 빗돌을 세웠었는데 돌이 부서지고 상석(床石)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만력무자(萬曆戊子. 선조시. 서기1588. 역자주)이후 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빗돌머리 부분이 깨어지고 글자획이 마손되었다. 이에 후손인 군수(郡守) 만득(晩得)과 통덕랑(通德郞) 석정(碩禎), 유학(幼學) 정표(廷杓), 석한(碩漢),비형(鼻亨),석지(碩祉),만중(萬重),덕방(德芳), 진화(進華) ,덕관(德寬) 등과 첨지 문한(文漢) 및 외손인 당시 원주 목사 이창령(李昌齡), 횡성 현감(橫城縣監) 정우주(鄭雨柱) 등이 서로 의논하고 출력(出力. 돈을 냄. 역자주)하여 다시 빗돌을 세우고 상석까지 설치하여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

승정 갑신후 65년(숙종34년, 서기1708. 역자 주) 2월에 세움 생원(生員) 정반(廷撮)은 삼가 쓰다. 』

파명(派名)과 파시조(派始祖)

1 ) 동정공파(同正公派) 始祖. 임(琳)

9세 판위위시사 녹규공(祿圭公)의 맏아들로 봉어동정(奉御同正)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공양왕 말기에 이성계 세력에 대항하다가 청주 감옥에 갇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을림(乙琳)으로 개명하고 객지를 유랑하며 행방을 은익하였다 함. 후손들이 춘천과 경기도 평택 일대에 퍼졌다.

2) 병사공파(兵使公派) 始祖 침(琛)

9세 녹규(祿圭)의 3남으로 武科 등제하여 관직이 종2품 강원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운곡원천석(耘谷 元天錫)선생의 사위다. 그 후손들이 북한지역에 널리퍼졌고 남한에서는 별로 찾을 길 없으니 안타깝다.

3) 주부공파(主簿公派) 始祖 완(玩)

11세 재령현령 방진(邦珍)의 맏아들로 주부(主薄)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향리에 은거했다. 그러나 손자인 포(苞)는 벼슬길에 나가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 이 되었다. 포의 손자인 세영(世榮)이 충남 부여로 옮겨가 그 후손들이 부여와 서천을 비롯한 층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퍼졌다.

4) 은사공파(隱士公派) 始祖 기(起)

11세 방진(邦珍)의 차남 거(珉)의 6형제 중 맏이가 起이다. 높은 학문을 닦았으나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벼슬길도 외면하고 향리에 숨어 살았다. 문중을 잘다스리고 자손들을 교화하여 진정한 은사(隱士)로 기림 받았다. 자손들이 가장 많이 퍼졌으며 원주, 횡성을 중심으로 전국에 흩어져 산다.

5) 교도공파(敎導公派) 始祖 추(趨)

12세 珉의 2남으로 학문이 깊어 그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갔다. 멀리 맹산(孟山)으로 초빙되어 교도(敎導)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고 훌륭한 스승으로 추앙 받았다. 세상에 드문 오대봉군(五代奉君)의 영예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趨의 후손이다. 북한 지역과 충청도 일대에 퍼졌다.

6) 사용공파(司勇公派) 始祖 월(越)

12세 珉의 3남으로 사용(司勇). 수의(修義) 등을 지냈다. 후손들이 양평을 비롯한 경기도 일원에 분포한다. 양평의 입향시조를 모신 종중산만도 250 정보에 이른다. 사용공파 양평 전통종가(傳統宗家) 종손 원규(元奎)는 누대의 만석군으로 숱한 선행으로 유명하다. 경기도에서 인정한 종가이다.

7)사직공파(司直公派) 始祖 부(赴)

12세 珉의 4남으로 司直을 지냈다. 사직은 5위 소속의 행정 실무자다. 후손들이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에 퍼져 살다가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많다. 대학자 광정(光庭)을 비롯하여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8) 갈촌공파(葛村公派) 始祖 필

12세 珉의 5남으로 치악산 아래 갈촌에 숨어 살았다.

기쁨과 즐거움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자연과 더불어 살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다.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고 사람들이 존경의 뜻으로 갈촌처사(葛村處士) 라 불렀다. 영의정 旭을 비롯한 武科 장원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후손들이 주로 홍천과 춘천에 정착했으며 서울, 원주 일대에 퍼졌다.

9) 평천공파(平川公派) 始祖 진(趂)

12세 珉의 6남으로 세상 명리에 뜻이 없었다. 숨어서 덕을 쌓으며 평천강(平川江. 오늘날 원주 섬강)에 나가 고기도 낚고 시와 음악을 즐겼다. 두루 세상 구경을 다니며 막힘없이호쾌하게 살았다. 사람들이 평천거사(平川居士)라 불렀다. 후손들이 원주를 비롯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 퍼졌다.

 

굽이쳐 흐르는 강 위에 기암절벽과 울창한 소나무가 잘 어울리는 아담한 아양정 (홍천군 문화재/ 홍천군 화촌면 아양정길 77-10(군업리 산 297-3))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바위 절벽 위에 아양정(峨洋亭)이 세워져 있으며, 아양정 아래로는 홍천강 지류인 군업천이 흐르고 있다. 아양정(峨洋亭)19035월 권은(權隱) 이계선(李繼善)이 군업2리 마을 한가운데에 서당을 짓고 원주이씨(原州李氏) 문중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을 1912년에 정각(亭閣)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나 이 정각은 6.25동란 때 소실되었고, 19544월에 현재의 장소인 뒷산 감무봉에 중건하였다. 아양정은 정면 2,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정면에 峨洋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에 오르면 주정헌(主靜軒)‘이란 편액과 이초은(李樵隱)이 지은 아양정기(峨洋亭記)‘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 이름 아양(峨洋)‘아아양양(峨峨洋洋)‘을 줄인 것으로, ’峨峨라 함은 태산같이 높음을 말하고, ’洋洋은 바다처럼 넓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의 경치를 일컬은 것이라 한다.

●나라는 국기(國旗)와 국가(國歌)가, 종중(宗中)은 종기(宗旗)와 종가(宗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