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2-05 12:20 수정일 : 2018-08-07 15:16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용인이씨시조(龍仁李氏) 이길권(李吉卷)이며 신라말 용인에서 탄생 하였으며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이며 도승인 도선대사가 공을보고 장차 왕을 도와 큰일을할 재목이라고 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그후 서로 친교하는 사이가 되셨고 공이 많이 배우는바가 있었다 한다.
때는 신라의 국운이 쇠하여 혼미를 거듭하는 란세에 견훤은 완산에 웅거하여 후백제라 칭하고 궁예는 고구려 옛터에서 반 하다가 신라 진성여왕육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바꾸어 태봉이라 하였다. 그후 궁예가 폭악교만 하고 폭정으로 민심이 멀어지자 신라 경명왕 이년 혁명 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때 이길권은 용인지방의 토호로서 왕건을 도와 궁예와 견훤을 평정하고 동예의 고부이 오환등을 격파하여 삼한을 통합 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태조가 즉위 한 후 말하기를 주나라의 대업을 일으킨 여상이나 한나라의 개국을 도운 장자방의 공에 견주어 어찌 이모의 공이 가볍다 하랴 하시며 오백호의 식읍과 산성군에 봉군 하였다 그러나 청렴겸양한 그는 이를 굳이 사양 하면서 신은 본시 산골에서 나무나 하고 신이나 삼으면서 궁하게 살려는 터이온데 어찌 이같은 후녹을 감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그의 뜻과는 달리 또다시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숭록대부 태사의 벼슬을 내리고 사후에는 안의의 시호를 내렸다.
관향에 대하여 처음 창성 하게 된 것은 시조인 이길권이 용구에 계적한데서 유래 되는 것으로 전한다. 그후 그 고장이 용구, 구성, 용인현 등등으로 지명이 변천됨에 따라 용구이씨, 구성이씨, 용인이씨로 불려져 왔으나 관향이 다른 것은 아니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용인이씨조상인물
고려에 용인이씨 인물로는 시조인 이길권을 비롯하여이헌정 대호군 판부전서 시호는 양간
이정 예부상서 우복사 태자태사 시호는 문익
이회 이부상서 사공 좌복사참지정사 시호는 문정
이효공 태위 시호는 안화
이현후 평장사 사도 시호는 정혜
이보 태사 중서령 시호는장강
이진문 태보 문하시랑 시호는 무숙
이인택 태위 시호는위혜
이당한 호부상서 내사령 국사령 사공 시호는 문화
이유정 공부상서 내시랑중 송국태사 시호는 충신
이석 태부 시호는 문광
이광시 총부전서 판도판서 판전의사사 시호는 간숙
이중인(시호는충숙)의때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새로이 이왕조가 등장 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흉간을 좌시 할수 없었던 그는 앞날을 개탄한 나머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절신이다.
이조가 들어서 그를 다시 구성백으로 봉하자 단호히 이를 물리치면서 백이 숙제와 같은 충절이 더렵혀질까 염려된다 하며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자손들 에게도 이조에는 삼대까지 벼슬하지 말라 타이른 다음 못내 이것이 심화가 되어 팔판(팔판서)과 더불어 성거산에 들어가 분신 자결할 것을 모의하고 나무를 산과 같이 쌓아놓았는데 이들 자손들이 찾어와 읍소만류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팔자이고 보니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크게 비통해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배위 되시는 천안전씨 족보에도 그가 중서성 상서와,구성부원군이 라고 적혀있으며 곧은 충절을 기리는 찬시 까지도 실려있다.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소는 용인의 삼대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매년 시제가 봉행 되고 있으며 한편 의정부시 송산사에도 조송산,원양촌,김농암,김일노정,유송은 고려 오선생과 같이 배향되었다.
용인이문이 그를 중시조로 모시는 것은 시조로부터 선대조 산소를 전부 실전된데다 그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 때문이다. 고려말 형조전서를 지낸 그의 장남 이사영은 이성계일파에 몰려 목은이색등이 유배될때 남원 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의 아들 백찬까지 이중인의 손자로 삼대가 벼슬에 나가지 않었다.
그러나 이중인의 둘째아들 이사위는 아버지의 유언과는 달리 고려조에 관찰사등 벼슬을 하고 이조에서도 개성유후를 지냈다.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형제가 걷는길은 서로 달랐다.
이사위가 아버지의뜻(불사이군)을 어길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용인이씨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 개국후 이성계는 민심과 정국안정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려유신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등을 돌렸다. 때문에 유신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날로 심했다. 탄압에 견디지 못한 유신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걱정하다가 이사위를 대표로 내세워 벼슬길에 나가도록 종용하였다. 그는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같은 동료들의 처지와 개성백성들의 신망을 저버릴수 없어 벼슬길에 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았다 한다.
용인이씨는 여러파중 가장 수가 많고 융성을 누리기는 십육세이백지의 후손으로 자손의 수나 벼슬한 수가 전체의 60%에 달한다.
○이백지(태종.관찰사.청백리) ○정호 대선사 ○이행검(단종.병마절도사) ○이담(선조.관찰사) ○이덕회(선조.남원판관) ○이일(선조.무용대장) ○정민(선조.정란공신) ○이사경(광해.대사간) 등은 조선초기의 용인이씨의 인물이다.
그중 이행검은 이징옥의란을 당시 함경도 진무로 있으면서 그를 계략 으로 종성에 머물게 한뒤 붙잡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으로 책록 됐다.
이효독(군자감정)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과 군자감정이며 성종때의 인물로 성품이 매우 활달 하고 위엄을 삼가며 대인관계가 매우 성실 하였으며 관직 에 있을때도 근면 신중하고 사리가 밝았다 한다.
특히 효성과 우애로 이름났 으며 어느날 조모님 께서 병이 나시어 지렁이즙이 좋다는 의원말에 이를 구해다 드렸더니 먹기를 꺼려 하심으로 공께서 즉석에서 이를 마셔 보이면서 들게 하셨다 한다.
그리고 아우 효언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을때에도 매일같이 래왕하면서 손수 조약하는등 정성으로 병을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같은 효맥도 길이 이어져오는 또하나의 가범이 되고 있다.
이홍간은 사간 효독의 삼남으로 중종때의 인물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또한 당세의 명인들과 사귀는 것을 즐겼고 특히 조광조 김정등과 친했다.
일찍이 한림으로 있을때 김정과 시사를 논하면서 시폐를 개혁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처사케되면 반드시 후회할때가 있을 것이라고 자주 말한 것이 과연 예언한 대로 후일 기묘사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조광조는 참화까지 당하였다. 평안도 평사때의 일이다.
이공에게 남곤이 유림의 영수 로서 두번씩이나 고변의 이름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 스러운 일이라고 거듭 규탄한 말이 남곤에게 알려저 미움을 사게되어 변방으로만 쫓겨다녔다 한다.
남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서 장령에 오르고 그후 영산군이 류배케되자 경연에 나가 세종때의 양녕대군의 고사를 들어 강경히 무고임을 건의 할때 좌우의 조신들은 손에 땀을쥐고 들었을정도 였다고 한다. 마침내 중종도 얼굴빛을 고치고 갸륵히 여기어 방면케 하셨는데 조야는 이일을 모두 통쾌히 여겼다고 한다.
또한 을사사화로 사간 곽순이장살되자 누구하나 친구로서 찾는이가 없어 의논하니 모두 꺼려함으로 공만이 홀로 주위의 눈에 관계없이 문상 하였다고 한다. 후에 동지부사에 이르셨고 이렇듯 어떤 세도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소신을 밝혔다한다.
이정민은 호는 옥계 홍산현감 향성의 아들로 박사암 정송강 성우계등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송강이 류배되었을 때는 공 혼자만이 유배지를 자주 찾아 문안 하였다고 한다. 박지화 율곡등에게 사사했고 한때 사우들의 많은 칭찬도 받았다. 35세에 사마시급제하고 이몽학의 난을 이르키자 창의병을 모집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에 들었다. 당진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떠났는데 그 까닭은 다름 아니라 공이 거처했던 세심태는 경치가 집안에 갑지로 알려젔는데 광해가 이를 뺏고 대신 벼슬을 주려하자 공은 이를 피해 홍주의 봉수산하에 은거 하다가 말년에야 집을짓고 옥계자라 자호 하였다. 그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한편 일기를 적었는데 시사를 쓰시면서 아무 두려움 없이 사실대로를 솔직히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춘추필법이라 말했다고 하는데 바로 옥계파안록이 그 저서이다.
이담은 의학.천문.산수에 능했던 성리학자로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그는 소학을 배울때 과부의 아들에게 특이한 행실이 없거던 시귀지 말라는 구절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밤낮없이 수학 에 힘썼다고 한다. 그는 정미사화(명종3)에 화를 입어 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는데 귀양가면서도 어찌나 태연한지 금부도사 조차 감탄했으며 풀려나 많은 하객들이 찾아와 축하하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 도리어 하객이 무안했을 만큼 신중 침착했다한다.
이일은 중종33년 용인시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여나고 명종13년 무과급제 선조16년 니탕개가 북변의 경원을 공격하자 그는 경원부사에 특배되어 주야로 달려가 임지에 당도했으나 종성마져 포위되었다.
방비에 책략을 다한 결과 드디어 번호 스스로 철수 하였다. 선조17년 니탕개가 다시 2만여 대군으로 회령을 침공하자 회령부사로 발탁되어 그소굴을 습격하여 소탕하는등 크게 공을 세웠다. 선조19년 북병사에 오르고 동21년 대군으로 시전번호의 본거지를 처서 그를 항복시킴으로서 이때부터 북변이 무사 안정케 되었다 한다.
특히 사람을 보시는 눈이 남달라서 이무렵 조산만호였던 이순신이 군법에 저촉되어 중죄로 다스리게 되었을 때 평소 그의 충용함을 아시는 공께서 이를 계청하여 백의종군케 한바 있어 뒷날 수군통제사가되어 이충무공이 나라를 구할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공은 자헌대부 무용대장 개성유수 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겸 지훈련도총관 공은무과급제후 선전관을 위시해서 칠부사 이첨사 전라좌수사 평안도 병사를거쳐 선조33년 남병사가 되셨으나 병으로 정평에서 향년64세로 하세 하였다. 그후 의정부 좌참찬이 증직 되고 경종때 장양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사경의 호는 쌍곡 선조 신축문과에 장원하고 광해조 1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이때 경상,충청,감사들이 올린 진찬장에 이미 폐위된 인목대비의 존호를 쓴사실을 묵인 했다 하여 대북의 탄핵을 받자 자진 사퇴 하여 논쟁을 멋게 하고 이때부터 대각에 들기를 좋아하지 안했다.
그후 승지와 병,예조참의등을 지내셨고 특히 인목대비의 유폐를 보고서는 벼슬 하기를 낙락치 않게 생각 하셨다. 천성이 중후청근 하시고 고을을 맡아 치적이 많아 이름이 났다.
워낙 성품이 곧아 당시의 대세도였던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과는 척분간 인대도 조금도 아부하거나 위협에 굴하는일이 없이 오직 소신에 따라 시비가 분명하고 청렴하여 란세의 완인으로 조신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이후천 쌍곡공의 장남 호는 백치 음직으로 용강현령 으로 계실때 지방 세도들이 많아 관의 령이 서지 않고 백성들이 여기에 붙어 도망가 숨는자가 많았다.
공께서 이를 아시고 세도들의 압력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이를 조치하여 바로 잡았다.
광해군10년 정시문과에 급제 장령이 되시어 시관 김윤 임건등의 비행을 탄핵하여 파직케 하고 지평을 거처 인조2년 명장 모문용이 병력5천을 이끌고 후금을 막는다는 구실로 함흥부를 침공하자 조정에서는 공을 접빈 유격장군으로 삼아 이들의 진격을 막게했다.
대임을 맡은 공은 임기응변의 계책을써 남하를 저지하고 무사히 책임을 완수하여 한국 전사상 유격장군으로 손꼽히게 되셨다. 인조10년 내첨사정 으로 계실 때 춘향친제에 불참한 허물로 그만두셨다가 그 후 종묘 서령 영흥부사를 지내시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70세된 고향친구 4인과 더불어 57계를 만들어 여생을 즐기셨다 한다.
이교악 호는 석음와 후망의 아드님 송우암과 동향으로 일찍이 우암께서 공의 자품을 사랑하시고 자손들과 같이 가숙에서 배우게 했다. 오랫동안 문하에서 보고 배워 성취한 것이 많으셨고 숙종 22년 사마시급제 순안현령 동 31년 알성문과에 장원 지평으로 계실 때 숙종께서 전위의 교가 계시어 등대간쟁하실 때 음성이 매우 크다보니 성상께서 저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시니 좌우에서 교악입니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하교를 거두게 하시니 공의 힘이 컷다한다.
동37년에는 이방언과 함께 최석정을 공척하여 관작을 삭탈케 하고 그의 저서 예기류편을 불사르게했다. 유생 곽경두가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하자 왕의 진노를사 홍우선 이택등과 이를 옹호 하셨다가 안주로 유배되시기도 했고 그후 정언,황해감사, 충주목사 수원부사를 역임하시고 청나라에 동지부사로 다녀와서 다시 대사간 승지가된 얼마 후 소론 윤증일당이 노론을 탄압하고 우암의 사원을 철폐하자 이를 듣고 통변 하였으나 도리어 화를 당하여 경산,동래등지로 류배되셨다.
그후 풀려 영조원년 승지의때이다. 정유가 토역의 소를 올렸는데 성상의 진노가 매우커 정을 면박 하시면서 책상머리의 기물을 깨고. 상소문을 내던지신다 하니 좌우에 시립한 조신들도 모두 떨고 얼굴빛이 없었은나 공만은 태연하여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손수 상소문을 주워 올리면서 간절한 간을 거듭하여 드디어 성상을 감오케 하였다 한다. 그 후 동지의금 한성부우윤 도승지 형,예조참판 대사헌등을 지내시고 동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기용되자 삭출되여 고향에 내려와 계시다가 동4년 소론파인 이인좌의 난이나자 울분심화 끝에 66세로 하세하셨다.
이세백(숙종.좌의정)은 조선조에서 용인이씨가 배출한 최초의 정승이다. 장희빈 사사때에도 세자가 공을 잡고 살려주기를 읍소했으나 공은 대의 로서 랭정하게 이를 거절 하셨다는 일화도있다. 수암 권상하가 어느날 세자에게 공을 평하기를 당세의 현상을 논할때 흔히 김수항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신사때의 일은 아마도 문곡도 그에게는 머리를 낮추어 따랐을 것이라며 참으로 옛사람중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어질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까지 말했다한다. 한마디로 그때의 조정에서는 공을 덮을만한 인물이 없을정도로 출중하였고 심한 당쟁속에서도 공만은 그지위가 확고부동하고 초연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은 그의 아들이다. 숙종말년에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사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 명.조태채)이 숙청 될때 운산에 3년간 유배되었으며 후일 영조즉위 양관대제학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미환국으로 다시 추방되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영조8년 사은사가되어 청나라에 다녀온후 다시 영의정에 오르니 바로 부자정승이다. 이세백의 종손 이보혁은 영조때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이인좌난을 토평한 공을세워 분무공신 3등과 인평군에 봉군되었다 영조 24년 부총관. 동29년 한성판윤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경호와 이중호는 그의 아들들이고 정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재협은 이보혁의 손자요 이경호의 아들이다.
이밖에 조선조의 인물로는 이의철(영조.대제학) 이보천(영조.이판) 이숭호 (정조.예판)이재간(정조.이판) 이재학(순조.형판) 이규현(순조.형판) 이원명 (헌종.이판) 이삼현(고종.이판) 이돈상 (고종.공판)등이있다 이재간은 이중호의 아들로 이보혁의 손자다 이재학은 이숭호의 아들로 명형관으로 유명했다.
헌종조에 화가 이재관은 구름,초목,비조의 그림과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 송하인물도,약산초상,전가독서도,월하선인도,취적도 등을 남겼으며 이조 중기 이후의 인물로는 아래와 같다
이보혁 영조때의 인물 음보로 기용되어 영조 9년 호조 병조참판 동 14년 공,홍주도감사 재직중 남형의 책임으로 그만 두셨다가 그후 풍덕부사 한성부좌윤 동 31년 이인좌난때 성주목사로서 정희량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공신 3등 과 인평군에 봉군되시고 강원도 관찰사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유명하고 후에 인평부원군의 작호를 받으시다.
동 24년 부총관 동 29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셨다. 시호는 충정이고 아드님 형제(경호,중호)와 손자(재간,재협)가 각각 판서와 영의정에 올라 더할 수 없는 일가의 영예를 누리셨다.
이경호 영조때의 인물 영조 11년 생원시 동 29년 충주목사때 정시문과에 급제 벼슬은 판결사 대사간 한성부우윤 대사헌 및 병조,예조참판을 거쳐 동 28년 인양군습봉 경기감사 호조, 예조, 병조의 삼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우참찬 판의금부사등에 오르시고 70세가 되어 아드님의 은공으로 보국숭록대부가 가자되고 기사에 드셨으며 지중추부사가 되셨다.
공이 한성부우윤이 될 때의 일화다. 영조 36년 성상께서 영상에게 이르기를 이경호는 사람이 지성스럽고 소박하며 사무에도 매우 밝은 사람 이란 말씀이 계신 것이 연유가 되어 우윤이 되었다고 한다. 상은을 무상한 영광으로 여긴 공은 자신의 집무실을 무화라 이름짓고 현판까지 걸었다 한다.
이숭호 어려서부터 총명 호학하시어 널리 경사에 통달하시고 특히 병려문에 능하시어 약관에 이미 세상일에 밝으셨고 행세하는 유학자가 되셨다. 영조 37년에 정시문과 급제 설서 봉교 그 무렵 무단결근으로 한때 경양도찰방으로 좌천되었으나 그후 정언 비변사랑관 으로 재직중 또다시 영남의 창고 관리부실로 유배되셨다.
이어 여러 벼슬을 거쳐 동 49년 대사간 승지 정조 4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대사간 동 6년 사은부사로 재차 청나라에 가셨고 다음 한성부좌윤 대사헌 병조참판 동 11년 예조판서 한성부판윤등을 거쳐 함경도감사를 끝으로 벼슬을 떠나셨다. 좌찬성이 증직되시고 효간의 시호가 내리셨다.
이재간 이조판서와 판의금을 지내신 중호의 아드님으로 또한 관직이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공의 조부이신 충정공께서 임자보 간행의 비용을 전담하신데 이어 공도 해서감사로 재직시에 계사보 출판의 비용을 전액 출연 하였다. 공은 위계가 숭록대부에 올랐다.
이재학 호는 지보 예판 숭호의 아드님 영조 46년 정시문과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정조 4년 대사간 그후 각조 참판을 두루 지내시고 전라감사 동 17년 동지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신후 대사헌 동 19년 형조판서때에 의옥사건을 잘다스려 명형관으로 유명하셨다.
성품이 매우 총명 치밀 하시고 풍채도 단아 수려 하시였으나 이마에 기골이 있으셨다한다. 화려하거나 놀이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책상과 기국만을 벗삼으셨다. 모든일에 이해가 빠르고 손익에 어긋남이 없어 이름이 났었고 특히 형관으로 이름을 떨쳐 오래동안 그직책에 계셨는데 한번보면 그 진위를 잘 판단 하시어 누구도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재협은 인양군 경호의 아드님 영조 33년정시문과에 장원 지평 교리를 걸쳐 암행어사로 호서지방을 순찰 하시고 필선 문학을 겸하시었다.
그후 헌납 수찬 대사간 승지가 되시고 정조원년 대사헌 동 5년 병조판서와 인릉군을 습봉하시었다. 동11년우의정을 대배하고 이어 좌의정 동13년 영의정에 오르셨으나 석달만에 득병으로 향년 59세로 하세하셨다. 공은 매우 겸손하고 성실하며 모든일에 사심이 없으시고 오로지 국사에만 충실 하셨다. 영의정에 오를 기회가 보다 일찍 있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심지어 성상의 종용에도 고사하시다가 뒤늦게야 영의정이 되셨다.
이재관 호는 소당 헌종때의 화가로 너무 유명하고 전후 백년동안 으뜸이었다고한다.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 어머님을 봉양했고 특히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모두 천수의 재질이라 했다. 구름 초목 나는 새와 초상화에 뛰어나셨고 현종 2년 영흥 선원전의 태조어진이 도적으로 인하여 훼손된 것을 복원하여 그 공으로 등산진첨사가 되셨으나 59세로 병사 하셨다.
작품으로는 송하인물도 약산초상 전가독서도 월하선인도 취적도등 허다하고 당시 부산 동래관의 일본인들은 공의 영모도를 좋아해 매년 사들였 다고 한다. 현재 국립박물관에는 작품의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이원명 호는 종산 순조 29년 정시에 문과급제하고 벼슬은 대사성 경기감사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대사헌 광주유수 이조판서를 지내셨다. 위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시호는 문정이다. 저서로 정사집요 20권 동야휘집 12권 종산만록 10권 등이 있다.
○교악 대사헌○세백 우의정○의현 영의정○재협 영의정
○세면 대사간○재방 오위장○보혁 인평군○순현 오위장
○한상 오위장○필현 부총관○휘 부총관○준호 대사간
○원일 부제학
○행검 절충장군 ○적 사복사정 ○덕회 남원판관 ○유일 훈련원정 ○정민 정난공신 ○사상 동부승지 ○준악 예빈사정 ○정악 파주목사 ○길보 경기감사 ○효독 군자감정
○일 무용대장 ○병길 내금위장 ○후천 형조참의 ○후산 개성유수 ○진은 중추부사
○의철 예조판서 ○보천 이조판서 ○중호 이조판서 ○언 공조판서 ○돈상 공조판서 ○숭호 예조판서 ○재간 이조판서 ○재학 이조판서 ○원명 이조판서 ○보온 이조판서 ○경호 이조판서 ○규현 형조판서 ○삼현 예조판서 ○원종 장례원경 ○면영 장례원경
○덕현 참판 ○진방 참판 ○정현 공참 ○세증 호참 ○세최 이참
○의노 공참 ○의무 호참 ○보행 이참 ○보관 이참 ○재관 화가
○승충 공참 ○수강 부사 ○수평 부사 ○사보 감사 ○계종 부사
○실 참의 ○주호 공참 ○석호 병참 ○재경 참판 ○조현 호참
○직현 공참 ○세재 감사 ○세영 참판 ○진영 참판 ○재협 영의정
용인이씨는 이조에서 상신 삼인 대제학 삼인 문형 일인 청백리일인 판서십육인 문과급제자 팔십육인 한성부판윤 12인 판의금부사 6인 도총관오인 등 당수의 무과급제자와 이조에 벼슬한 분중 품계와 실직이 다같이 삼품이상 을 지낸 숫자만도 근 250인 에 달하고 있으므로 삼품이하 까지 셈한다면 그수는 더욱 많은수에 이른다.
그중에는 부자정승(세백;의현)도 있고 삼상사판 ;삼상(세백;의현;재협) 사판(보혁;경호;중호;재간)을낸집을 포함하여 육판서(숭호;재학;규현;삼현원명;돈상)집과 팔대에 걸처 십사분의 정경부인(후연;정악;세응;의진;보혁 경호;중호;재협;재간의 각배위) 이 된집도 있다.
이들 모두가 대사간을 지낸 이사경의 후손들 이며 여기에 수록된 것은 그 일부라며 시조 태사공 으로부터 42세까지 그간 천년 세월이 흘렀으나 려조와 이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고 나라와 가문을 빛내었다.
일제때의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였던 이원선 이월노등이 있는데,특히 이월노는 한말부터 독립운동에 투신 1927년 정의부 지역책임자로 활동하며 군자금 모금등에 종사했으며 1930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는등 활약이 컸다.
또한 여성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부인과 일제시대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아주여사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인이다. 용인이씨는 인구수에 의하여 관직 기타등을 비례한다면 전국의 260여 성중 그 순위가15위 전후의 상위권내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정녕 정조대왕은 용인이씨는 그 가계도 오래되고 이름난 조상의 음덕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의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니 가히 대성이라 하신 우악한 하교처럼 대성명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조선조 급재자 (86명 88과종)
수령(태종14년.식년시) 길보(세조3년.별시) 개보(세조3년.별시) 우보(세조10년.별시) 길보(세조12년.중시) 길보(세조12년.발영시)
기 (성종5년.식년시) 적 (성종14년.식년시) 효독(성종14년.식년시) 윤형(성종17년.식년시) 효돈(연산4년.식년시) 원간(연산10년.식년시)
효언(중종5년.식년시) 홍간(중종8년.식년시) 숙간(중종19년별시) 영성(중종32년.식년시) 담 (중종33년.별시) 희령(명종6년.별시)
신충(명종19년.식년시) 사경(선조34.식년시) 홍망(선조38년.증광시)
후천(광해10년.정시) 사상(인조2년.정시) 후산(인조16년.정시)
익화(현종4년.식년시) 세백(숙종1년.증광시) 진은(숙종4년.증광시) 두악(숙종8년.증광시) 의창(숙종9년.증광시) 세재(숙종20년.알성시)
의현(숙종20년.별시) 세최(숙종25년.정시) 교악(숙종31년.알성시) 세덕(숙종31년.증광시) 제항(숙종37년.식년시) 세면(숙종35년.춘당대시)
보욱(숙종45년.증광시) 인빈(영조5년.식년시) 정항(영조9년.식년시) 중호(영조16년.알성시) 영조(영조18년.정시) 명조(영조21년.정시)
의암(영조23년.정시) 의철(영조24년.정시) 의노(영조26년.식년시) 보관(영조26년.알성시) 경호(영조29년.정시) 보온(영조32년.정시)
재협(영조33년.정시) 재간(영조35년.별시) 숭호(영조37년.정시)
재학(영조46년.정시) 보천(영조47년.식년시) 보행(영조47년.식년시)
언호(영조51년.정시) 신호(정조1년.정시) 성륜(정조6년.별시) 덕현(정조7년.식년시) 래현(정조13년.식년시) 치호(정조18년.정시) 석호(정조22년.식년시) 형 (정조22년.식년시) 근호(순조1년.증광시) 조현(순조5년.증광시) 함갑(순조9년.별시) 규현(순조13년.증광시) 재학(순조13년.증광시) 준호(순조20년.정시) 면호(순조23년정시) 원익(순조25년,정시) 배림(순조25년.정시) 학증(순조26년.별시)
은상(순조27년.정시) 재신(순조27년.증광시) 원명(순조29년.정시)
삼현(헌종7년.정시) 재문(헌종15년.식년시) 익상(철종2년.정시)
정현(철종7년.별시) 면영(철종12년.식년시) 재황(철종12년식년시) 돈상(고종1년.증광시) 교현(고종2년.식년시) 원일(고종4년.식년시) 원중(고종18년.식년시) 원희(고종22년.정시) 문영(고종28년.증광시)
헌영(고종31년.전시)
집성촌
집성촌은 용인시 수지읍 일대로 6백여년 동안 용인이씨 일문이 가풍을 이어온 동족촌락으로 고려말 절신 이사영이 터를 잡은 것은 확실치 않으나 시조 이길권이 구성백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이 일대에 살았을 것이란 추측이며 고려가 망하자 이사영은 물론 그의 아버지 이중인도 그의 아들 이백찬(지영천군사)도 벼슬을 버리고 삼세불사의 충절을 지킨 것이다. 이같은 선조의 기질탓인지 이마을은 조선조에 이렇타할 인물이 없었으며 50여가구에 250여명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수지지역이 신도시로 변모함에따라 집성촌의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인접지역인 용인시 포곡면 신원리 일대는 이사영의 아우 이사위는 이조에 개성유후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끊임없는 벼슬을 하였으며 선조조의 명장인 이일이 이고을 출신으로 지금도 40여가구 150여명이 살고 있는데 거의 이일의 후손들로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인이씨는 남한에 총 9,796가구에 32,0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