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5-27 19:46 수정일 : 2019-11-27 11:58
흥해최씨의 연원(興海崔氏의 淵源)
흥해최씨는 고려중업(의종~명종)에 형제 4공(四公)이 국가에 유공하여 각소 봉군하니 백형은 연(洐)이니 월성군 : (지금경주)에 봉해졌고 중형은 한(漢)이니 永川君에 봉해졌으며 공은 셋째이니 곡강부원군에 증봉(增封)되었고 넷째는 익(瀷)이니 好山君 : (順天)에 봉해져서 세상에서 一門이 가려(佳麗)하여 사군풍류(四君風流)라고 일컬었다.
그후 백중계(伯仲季) 삼파는 각처에 흩어져 살아서 그땅의 이름으로 본관을 옮겼고 오직 공께서만이 고을의 옛집에서 천년(千年)을 다하고 고종(考終)하니 흥해 곡강고을의 오산간좌원(鰲山艮坐原)에 장사 지냈으며 곡강(曲江)은 공에게 장구(杖屨)의 향이 되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해최씨는 전국에 14,792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흥해최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최호(崔 湖) : 흥해최씨시조, 곡강부원군은 고려조 의종 명종년 간에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검교대장군(檢校大 將軍)으로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곡강부원군을 관조(貫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배위(配位)는 소국부인(小國夫人) 황씨(黃氏)이다.
최영(崔 瑛) : 고종원종년간에(1213~1274) 중군도통사(中軍都統使)로 활약하였다. 고종43(1255)년에 대장 군으로 승천성(昇天城)에 침입한 몽고병을 위유(慰諭)하여 물러가게 했으며 원종3년(1262) 상서좌복야(上書 左僕射) 원종4년(1263) 동지추밀원사태자빈객(同知樞密院事太子賓客)이 되었다. 원종9년(1268)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서 단련조병도감판사(團練造兵都監判事)를 겸했고 이듬해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운 뒤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임연이 주살(誅殺)되고 원종이 복위된 뒤에도 첨지정사(僉知政事)에 올랐었다.
최흘(崔 屹) : 병조판서
최도 : 도사(都事)
최용영(崔龍泳) : 밀직사사
최천하(崔天河) : 문하시중
최천장(崔天藏) : 충숙왕 11년(1324) 2월에 밀직사사 최천장을 추성좌명보절공신(推誠佐命保節功臣)으로 포숭(褒崇)되였다.
최천지(崔天沚) : 대동찰방
최만리(崔萬理) : 금자광록대부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祿大夫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최강(崔 康) : 밀직사사 조선조에 문과하여 지주사(知州事)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 문하로 문도공(文度公) 소찬(所欑)행장에 의하면 공은 자질(資質)이 진순(眞醇)하고 기도(氣度)가 관후(寬厚)하며 검공(謙恭)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염정(恬靜)으로 스스로를 지켜 사물 (事物)과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최윤관(崔胤寬) : 여조에 은자광록대부이부상서 좌복야(銀紫光祿大夫吏部尙書左僕射)
최교원(崔敎元) : 초휘 효원(孝元), 음통훈대부행강동현령
최한(崔 僩) : 일명 순(洵) 세종조 음통훈대부행 신령현감 일운강동현령증통정대부
최자(崔 滋) : 고려유신(高麗遺臣)으로 이조에 들어와 태조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여러번 불렀으 나 불취(不就)하였으며 동지(同志) 칠십이현(七十二賢)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자정(自靖)하였으며 스스로 부르기를 자호(自號) 수은(樹隱)이라 하였다.
최연(崔 淵) : 세종~성종조, 세종1년 기해(141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20년 무오(1438)에 문과하여 행 성균관전적(典籍)에 올랐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보직(補職)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옮겼으며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제수되었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이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처 다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경유(經由) 고령현감으로 나갔다.
외직(外職)은 대구 곤양(昆陽) 흥해의 세 곳 군수(郡守)를 전역(轉歷)하였고 목민관(牧民官)의 치적(治蹟) 을 거두었다. 다시 내직(內職)에 돌아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거처 청환직(淸宦職)으로 시종(始終)한 공을 사림(士林)이 엄선(嚴選) 청백리(淸白吏)에 그 영화로움을 세상에서 칭송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정헌대부(正憲大夫) 홍문관대제학에 중직 되었다. 공이 김해에 이거(移居) 강호(江湖) 김선생 숙자(叔滋)와 인근에 사셨으므로 도의(道義)로 상종(相從) 교부(交孚) 우선(友善) 계의(契誼)가 유독(有篤)하였다.
최증(崔 澄) : 세종27면 을축(乙丑) 진사로서 병과(兵科)에 합격하여 용양위상호군(龍驤衛上護軍)에 이 르고 병조함의로 병조참판에 승진되어 동지성균관사를 겸직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올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였다. 특가(特加) 정헌대부(正憲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최구(崔 玖) :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무인세보에 발문을 남겼다.
최충(崔 冲) :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최자순(崔自淳) : 종사랑통정대부 청도향현에 올라있다.
최효순(崔孝淳) : 字 행원(行源) 號 눌옹(訥翁) 문종원년 신미(1451)에 영상(領相) 황희(黃喜)가 공을 천거(薦擧)하여 춘추관(春秋館) 사관보(史官補)로 이어 홍문관(弘文館) 박사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올려 장령(掌令)으로 불렀으나 진소(陳疏)하여 고사(固辭) 불취(不就)하였다.
최홍(崔 泓) :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
최윤홍(崔允泓) : 字 중홍(仲洪) 조선조 중종 20년 성균관 을유진사시 급제
최숙하(崔淑河) : 字 청일(淸一) 號 역원(櫟園) 司憲府 持平
최숙진(최숙진) : 字 윤여(潤汝) 행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겸 경연춘추관편수관(經연春秋館編修官)
최팔준(崔八俊) : 병조판서, 사재감직장 구(玖)의 증손으로 후손이 이북(以北) 황해도와 강원도에 분포되어 있다. 묘지(墓地)가 삭령군 마장면 거문동 입석리 경자지원(朔寧郡馬場面巨文洞立石里庚坐之原)이다. 직계후손 12位의 묘위가 차례로 모셔있다.
최경운(崔慶雲) : 무과하여 행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겸 진주영장(晋州營將)
최여림(崔汝霖) : 사헌부감찰
최여실(崔汝實) : 증 통정대부 밀양에서 포항시 양덕동(良德洞) 사량(思良)으로 이거(移居)한 사량종문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최응인(崔應寅) : 병절교위(秉節校尉)
최연(崔 演) : 字 계문(契文) 號 이돈재(利遯齋) 성종 2년 신묘(1471)생 중종2년 정묘(1507)에 선음(先蔭)으로 특제(特際) 주부(主簿)
최방우(崔邦宇) : 승의랑(承義郞) 상옹원(司甕院) 참봉 증 보국숭록(輔國崇祿)
최사원(崔泗院) : 字 현우(賢禹) 號 연파(蓮坡) 통덕랑행 예조정랑
최영수(崔永洙) : 문과하여 행 이성(利城) 현감
최지형(崔沚瑩) : 문과하여 성균관전적 증 가선(嘉善) 이조참판
최지위(崔地緯) : 공조좌랑 비안(比安)현감 안동진관병마첨절제도위( 安東鎭管兵馬僉節制都尉)
최계동(崔繼潼) : 字 대방(大防) 세종23년 신유(1441)에 성균진사, 문종원년 신미(1451)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주서(注書) 박사(博士)를 거처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고 직강(直講)을 거쳐 영산(靈山)현감으로 나가니 품계는 통훈, 합천군수, 함흥군수로 나가니 통정대부의 품계를 더하였다. 역임한 세고을의 아전과 백성이 친애하고 울연히 성적(聲績)이 있어 마침내 태상(太常二奉常寺正)에 이르러 예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선생 종직(宗直)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었고 공은 밀양에서 거창가조 남면 평촌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공의 후손을 거창과 밀양 김해로 분포하고 거창종문의 입향조이다. 유재우(有齋宇)하니 오도재(五道齋)이다.
최순동(崔順潼) : 벼슬은 문종1면 임신(1452)에 무과에 올라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이다. 공은 세상을 보고 몸을 감추고 오직 봉친(奉親)하는 일에만 즐거워 하였다. 지체(志體)를 효로서 봉양함이 세상에 알려졌었다. 세상의 번등(飜謄)함과 외표(外表)만 힘쓰는 것을 학문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듣고 싫어하였다.
최건동(崔健潼) : 號 흥안(興安)이며 문과하여 현신교위(顯信校尉)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사직(副司直) 종지(終至)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이르다.
최숙량(崔淑粱) : 字 흥원(興源) 호 평촌(坪村) 창신교위공은 한원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선생과 우서(友婿=同壻)로 일두(一蠹) 정여창(정여창)선생과 더불어 거창군 가조면 도리( 居昌郡加祚面道理) 오도산하(吾道山下) 수포대(水瀑臺)에서 도학(道學)을 강마(講磨)했으니 공이 대의 주인(主人)이었다. 후손이 오도재(吾道齋) 경내(境內)에 모현정(慕賢亭)을 창건하여 삼현(三賢)을 추모하고 있다.
최운수(崔雲水) : 自 천택(天澤) 號 난실(蘭室) 중종 35년 경자(1540)에 천훈도(薦訓導) 명종5년 경술(1550)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산림(山林)에 종적을 감추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생을 마치다.
최운로(崔雲露) : 공은 성행(性行)이 청결(淸潔)하고 검소(儉素)하여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알려져 특제(特除) 공조좌랑이 제수(除授)되었다. 일찍 군서(郡西) 도음산(禱蔭山)하에 정사(精舍)를 짓고 경학(經學)에 뜻을 부처 지명(지명)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이 앞장서서 용감하게 의려(義旅)에 나가니 낭관(郎官)의 교지(敎旨)가 있었으나 공(功)이 없으면서 은(恩)에 외람되게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공은 흥해 지역 종문의 현조(顯祖)이다.
최환(崔 煥) : 字 문원(文源) 중종11면 병자(1516)에 진사시하여 중종23년 무자(1528)에 별시문과에 등제 사 헌부장령 성균관사성 승(陞) 찬선(贊善) 외직에 고성(固城) 현령 진주(晋州) 나주(羅州) 목사 성종2년(1471)에 신묘중수세보(辛卯重修世譜) 편찬
최팔개(崔八凱) : 字 성거(聖擧) 號 죽은(竹隱) 공은 천성(天性)이 영오(潁悟) 숙달(夙達)하였으며 도의(道義)와 충애(忠愛)가 중심에 쌓여 밖으로 영기(英氣)가 발하였다. 젊어서부터 강개(慷慨)하게 경제(經濟)의 뜻이 있어 기사(騎射)를 잘하여 그 아우 팔원(八元)과 분의(奮義)하여 칼을 잡고 가동(家僮) 수십인을 거느리고 부산 언양(彦陽)에 이르러 왜적 수백(數百)을 무찌르고 부산에 돌격하여 수많은 적을 무찌른 뒤에 대진(大陣)이 함락함에 아우가 사절(死節)한 것을 보고 종사무탁(宗社無托)함을 염려하여 돌아와서 선영(先塋)하에 초혼장(招魂葬)하였다. 실기(實記)를 남겼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스스로 공(功)을 숨겨 자취를 감추었다. 위로 4대 사적(事蹟)이 읍지(邑誌)와 실기에 밝게 실려있다.
최팔원(崔八元) : 생부 응해(應海) 字 군거(君擧) 號 죽포(竹圃) 선조18년 을유(1585)24세에 을과(乙科)에 뽑혀 벼슬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무공랑박사(武功郞博士) 승사랑전생서봉사(承仕郞典牲署奉事)이다. 나이 31세에 임진란을 당하여 형 팔개(八凱)와 더불어 분의(奮義)에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처자(妻子)를 회곡(回谷) 산중에 조치하고 난에 임하니 장정(壯丁) 28의 정병(精兵)으로 동래부사(東來府使) 송공상현(宋公象賢)의 진(陳)에 이르는데 언양(彦陽)에서 갑자기 왜적(倭賊)을 만나 분격(奮擊) 참획(斬擭)수십급하였다. 드디어 적(敵)은 흩어져 양산(梁山)에 이르러 우참(又斬) 30여급하여 마침내 부산(釜山)에서 수만의 적을 만나 싸우는 중에 맹장(猛將) 빗을 베이니 난이 거의 평정되는 듯 했으나 평창청일(平漲淸日)에게 큰 피해를 끼친 공은 공일대(一代)의 승첩(勝捿)이었으나 공은 사절(死節)하고 뒤에 형 팔개(八凱)공이 국가에 포전(褒典)을 입지못함 을 한(恨)하여 왔었다. 공의 4대의 사적(事蹟)이 읍지에 실려 있다.
최응담(崔應淡) : 字 군응(君應) 號 회당(晦堂) 공은 젊어서부터 강개(慷慨)하고 대절(大節)이 있었다. 나이 29에 임진란을 당하여 먼저 의려(義旅)를 수창(首唱)하여 3백여 장정(壯丁)을 모아 화산군(花山君) 권응수(權應銖) 진(陳)에 나아가 적을 베어 죽임이 심히 많으니 많은 사람이 공을 경산대장(慶山代將)에 추대하여 성보(城堡)를 보호하니 화산군 권공이 그 의훈(毅勳)을 아름답게 여거 상부에 보고하니 특별히 훈련부정(訓練副正)을 제수하였다.
최순재(崔順齋) : 字 원시(元始) 절충장군부호군
최원성(崔遠聲) : 종사랑참봉 공은 총예탁이(聰睿卓異) 한자질(姿質)과 천품(天稟)을 받아 일찍 외부(外傅)깨 나가 견해(見解)가 절윤(絶倫)하고 철문(綴文)과 속사(屬辭)에서 가끔 사람을 놀라게 하여 영예(英譽)가 자울 (藉蔚)하더니 나아가 약관(弱冠)에 이르자 장인인 신빙옹(愼聘翁)이 동계(桐溪) 정선생(鄭先生)의 추천으로 인하여 바야흐로 현달(顯達)한 자리에 있었으나 공은 염정(恬精)하고 스스로 지조(志操)를 지키어 일찍이 처가(妻家)가 영귀(榮貴)한 고로 진달(進達)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조수(操守)의 고상함을 이로 미루러 가히 알 수 있었다. 후진교육과 창진을 했으니 향당의 사표가 되었다. 유재우(有齋宇)하니 옥산재(玉山齋)이다.
최흘(崔 汔) : 통덕랑 증 가선
최인흡(崔仁洽) : 字 칙여(則汝) 무과 훈련원주부 인조원년 수문장(守門將)으로서 공을 세워 공신록(功臣錄)에 오르다. 형제4공이 무과로 활약했으니 의흡(義洽) 무과훈련원판란 신흡(信洽) 무과 부산첨사 도흡(道洽)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임란공신 응담(應淡)의 아들들이다.
최경호(崔景灝) : 字 시창(時昌) 훈련원판관
최두이(崔斗義) : 字 여직(汝直) 한성좌윤
최유보(崔有輔) : 號 동강(東剛) 첨지중추부사
최남두(崔南斗) : 통정대부 字 천추(天樞) 여력과인(膂力過人)하다. 무과에 올라 지응관감찰( 支應官監察)이다.
최유진(崔有軫) : 형제간 우애 돈독하여 형의 出世를 위하여 진력하였음
최귀수(崔貴壽) : 무과급제 이립(利立)의 아들 밀양에서 김해지역 무송(茂松)으로 이거(移居) 비음산(飛音山)밑에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세속(世俗)을 피하여 자경(自耕)하였고 자녀교육에 힘쓴 김해종문의 입향조이다.
최산절(崔山節) : 字 여앙(汝昻) 통정대부 김익견(金益堅) 삼곤계(三昆季=三兄弟)와 더불어 부산(釜山)마을에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사노당(四老堂)이라하고 창진후학(獎進後學)하니 거창(居昌)종문의 현조이다.
최후원(崔後遠) : 사재감첨정 字 경운(景雲) 호 주암(柱巖) 봉직랑 단양군수(丹陽郡守)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들나다 동계(桐溪)선생 정온(鄭蘊) 오계(梧溪) 조공(曺公) 정립(挺立)과 임공(林公) 덕부(悳怤)와 더불어 낙모 대(落帽臺)에서 구중회(九重會)를 만들고 향약창계(鄕約刱溪)하니 팔송(八松) 정공(鄭公) 필달(必達)이 한거서(閒居序)를 남겼다.
최산정(崔山琸) : 수문장(守門將) 훈련주정
최진방(崔振邦) : 字 효백(孝伯) 호 구강(九崗) 통정대부
최응두(崔應斗) : 선무랑 字 천경(天經) 승사랑(承仕郞) 통정대부
최도흥(崔道興) : 의 배(配) 영천이씨(孝婦烈婦) 구고(舅姑)를 섬기는데 효를 다하고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지아비(夫) 장일(葬日)에 미처 자절(自截)하여 지아비를 따라 운명하였다. 사실이 나라에 들려 정문(旌門)을 세우니 비문에 실려있다.
최원복(崔元福) : 字 수오(秀五) 號 일우재(一遇齋) 공은 천자(天資)가 순눌(淳訥)하여 어릴적부터 힘써 공부하고 뜻이 돈독하였다. 무신년간(1728) 열넷(14)에 민숙야재(閔夙夜齋) 익수(翼洙) 문하에서 수업(受業)한지 5, 6년에 경학(經學)이 정수(精遂)하니 민공(閔公)이 항시 창우(獎詡)함이 특이(特異)하였으니 지금까지 세의(世誼)가 유지되어 왔다. 병판공종문의 현조(懸祖)이다.
최규형(崔奎烱) : 字 창숙(昌叔) 강계판관(江界判官) 공은 사모지효(事母至孝)하여 병극단지(炳劇斷指)하니 스승 농수(農叟)공께서 입석(立石) 선묘(先墓)에 농수공이 시를 지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최세걸(崔世傑) : 중추부사 여우(汝禹)의 아들 字 사영(士英) 절충장군 행부호군 통정대부 공조참의
최준걸(崔俊傑) : 가선대부다
최대해(崔大海) : 字 양호(養浩) 號 관란(觀爛) 공이 영오(穎悟)의 재조(才操)로 힘써 공부하는데 게으르지 않 았으며 몸소 체험하는 공부에 마음을 두며 성리(性理)의 글에 젖어 기루니(涵養) 문사(文辭)가 굉박(宏博)하 여 울연(蔚然)히 우리당(吾黨)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서른여덟(38)에 임난(壬亂)에 김해가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접하여 몸을 던져 싸우고자 성곽(城廓)에 이르자 성은 이미 함락(陷落)되어 통곡하여 금은산(金隱山)밑으로 돌아와 대암(大巖)의 곁에서 금서(琴書)로 자오(自娛)하고 소영(嘯咏) 자적(自適)하여 종신(終身)토록 세상에 나아오지 않았으니 후인들이 공의 성덕(盛德)을 아름답게 여겨 그 바위를 덕암(德巖)이라 이름하고 덕암은 곧 마을이 되었다.
최홍망(崔弘望) : 통정대부
최윤정(崔胤貞) : 字 복원(復元) 호 종묘당(終墓堂) 매오(梅摀) 김공 익견(益堅)께 수업(受業)하였고 우종(又從) 하겸재(河謙齋) 배계헌(裵戒軒)과 교유(交遊)하였다. 문장(文章)과 효행으로 세상에 들낮었다. 헌종4년 계묘(1663)에 사마진사(司馬進士)하고 청행(請行)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기를 상소(上疏)하는데 앞장서 복합몽윤(伏閤蒙允)되어 당시 백성들이 그 공(功)을 힘입은바 컸다.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 매오(梅塢) 긱익견(金益堅) 팔송(八松) 정필달(鄭必達) 제공(諸公)과 더불어 김한훤당(金寒暄堂) 정일두(鄭一蠹) 정동계(鄭桐溪) 3선생 서원을 도산(道山)에 창건하였다. 진사(進士) 김두병(金斗柄)과 더불어 사노당(四老堂)을 중수(重修)하고 편액(扁額)을 영모재(永慕齋)라 하였다.
최인달(崔仁達) : 字 선호(善豪) 훈련봉사부호군
최석규(崔錫圭) : 字 은뢰(恩賚) 호 송고(松皐) 공은 제가효제(齊家孝悌)로 수신(修身)하여 종신(終身)하였다.
최명규(崔命圭) : 字 화실(和實) 號 우계(愚溪) 중추부사
최창대(崔昌大) : 字 성백(盛伯) 호 의대(懿大) 통정대부
최기대(崔基大) : 강계판관 초휘 기우(器宇) 字 여홍(汝洪) 號 사정(思亭) 농수(農叟) 최공을 스승으로 모셨다. 정조1년 정유(1777)에 진사(進士)하여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10년간 공부하고 만년(晩年)에 고향 사량(思良) 선영하에서 존양(存養) 성찰(省察) 천리(踐履)으 공(工)을 닦았다. 많은 저술(著述)이 있었으나 화재(火災)를 겪고 고 근존(僅存) 문집 2권이 세상에 전하여 오고 있다.
최호대(崔浩大) : 字 군직(君直) 가선대부
최추성(崔樞成) : 공조참의 세걸(世傑)의 셋째 아들, 字 화숙(華淑) 문과하여 통훈대부 행 장당악원정(掌樂院正) 동지성균관사
최천익(崔天翼) : 字 진숙(晋叔)호 농수(農受) 공은 문장 덕행이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다. 네번 복시(覆試)에 장원(壯元)을 하였다. 벼슬을 단념 흥해지역에서 후진교육에 종사하였다. 재종질(再從侄) 경(璟)은 찬행록 유림(儒林)에서 서원(書院)을 세우니 사(祠)는 학림(鶴林)이라 하고 묘우(廟宇)는 상선(尙善)이라 하고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찬 봉안문(奉安文)하니 나머지 상세(詳細)한 것은 농수문집(상하)에 실려있고 흥해읍지 및 교남지(嶠南誌)에 기록되어있다.
최영선(崔榮善) : 응서(應瑞) 증 가선대부
최현(崔 峴) : 字 우백(雨白) 통정대부
최해익(崔海翼) : 字 도남(圖南) 號 지와(旨窩) 성품이 검소하였고 덕성이 굉대하였고 문사(文詞)가 대천(大闡) 하였다. 일찍이 고지(高旨) 서사(書舍)에서 교수(敎授)하니 성취(成就)한 분이 많았었다. 곡강세고(曲江世稿)에 공의 문한(文翰)이 실려있다.
최해두(崔海斗) : 字 두남(斗南) 號 우계(愚溪) 숙종46년 경자(172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공은 성품(性品)이 순효(純孝)하여 힘써 행하였고 공검(恭儉)하였다. 문장 덕행이 일세에 뛰어나 사림(士林)의 경앙(景仰)을 받았다. 유문집(有文集)하니 우계집(愚溪集)이다. 조부(祖父) 주암공 종모당 우계 삼공을 추모하는 삼모재(三慕齋=愚溪精舍)를 후손들이 창건하였다.
최남절(崔南節) : 字 신경(愼卿) 공은 나이 겨우 9세에 모상(母喪)에 일야(日夜) 시빈(侍嬪)에 애훼 유례 (踰禮)하니 조부께서 그 슬퍼 몸이 상함을 염려하고 무이책지(撫而嘖之)하나 종불개지(終不改志)하고 일여단 괄(一如袒括)하였다. 어른이 되어서는 기우(氣宇)가 헌활(軒豁)하고 성행(性行)이 인자(仁慈)하여 견기자(見飢者) 여식(與食)하고 견한자(見寒者) 여의(與衣)하니 향당(鄕堂)이 칭예(稱譽)하였다.
최천린(최천린) : 字 자서(子瑞) 가선대부
최수현(최수현) : 字 현칙(玄則) 한성좌윤겸 오위도총부도총간 증 가선대부
최두성(崔斗成) : 字 유칠(有七) 가선대부 공조참판 오위도총부도총관
최언묵(崔彦黙) : 字 중항(仲沆) 등문과(登文科) 가선대부 행 호조참판겸 사헌부대사헌에 이르다.
최덕흥(崔德興) : 字 경천(敬天) 통정
최성규(崔聖奎) : 字 치명(致明) 증 호조참펀겸 동지의금부사
최홍현(崔洪賢) : 字 백첨(伯瞻) 무과 선전관 전라우수영우후 충익위장(忠翊衛將)
최경(崔 璟) : 字 사휘(士徽) 號 모재(慕齋) 공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자상(仔詳)하였다. 재종숙 (再從叔) 농수공(農叟公)에게 수학하여 문사(文詞)와 필한(筆翰)을 다 갖추었다. 향시(鄕試)에는 여러번 합격했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哀惜)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내외간(內外艱) 상(喪)을 맞아 장제(葬制)는 예(禮)를 다하였다. 드디어 군서(郡西) 천상리(川上里)에 재실(齋室)을 짙고 은거(隱居)하며 고인(古人)을 사모(思慕)하고 도서(圖書)로서 자오(自娛)하며 힘써 후학(後學)을 창진(獎進)함을 자임(自任)하여 성력(誠力)을 다하여 선세(先世)를 고구(考究)하여 선조와 세계(世系)를 밝혀 행록(行錄)을 저술 (著述)하니 가보(家潽)의 시작(始作)이 되어 후손들에게 남겨주니 임란(壬亂)후 우리 흥해 종문의 종보(宗潽)가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최홍진(崔弘晋) : 증 가선대부
최한서(崔漢瑞) : 문장 학업을 잘 이어 부조(父祖)의 정훈(庭訓)을 잘 닦으니(紹述) 향시에 합격하여 당세의 유종(儒宗)이 되어 부자(父子)가 문장(文章)에 뛰어나 세상에서 추중함을 얻었다.
최붕서(崔鵬瑞) : 字 원징(遠徵) 숙종39년 계사(1713)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하니 20세였다. 영조49년 계사(1773)에 회방연(回榜宴)을 베풀고 천작(天爵) 가의대부 부호군을 내렸다.
최근천(崔近天) : 호 국은(菊隱) 공은 배움이 우수하였으며(學優) 공부가 정묘(精妙)로 왔으며(工精) 성리학에 연구가 깊었으며(㤾究性理) 창진후학(獎進後學)하니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었다.
최경호(崔敬昊) : 가선대부 천린(天麟)의 아들 字 송노(宋老) 첨주중추부사
최인구(崔仁耈) : 字 순경(舜卿)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임란이후 흥해종문 시조공향사(始祖公享祀) 의례(儀礼) 등 종사(宗事)에 공헌한바 많았으며 위선(爲先)에 공헌한 바 컸었다.
최계항(崔桂恒) : 자 월노(月老) 호 해양(海陽) 공은 날때부터 특이한 재주를 가졌었고 자라서는 효우(孝友)에 익독(益篤)하였으면 문장(文章)이 세상의 모범이었다. 더욱 선조(先祖)의 추모(追慕)가 절실(切實)하여 항상 시조공 묘소(墓所) 실전(失傳)을 한(恨)하더니 철종14년 계해(癸亥1863)년에 흥해에 가서 사산형국(四山形局) 및 보첩(譜牒) 소재(所載)를 살펴 묘소(墓所)를 회복(回復)하고 그곳 사람들의 치여(菑畬)를 금하고 전토(田土)를 매치(買置)하여 일천(一薦)의 예(禮)를 영세(永世)토록 향사(享祀)케 하였다. 공의 나이 79세에 갑오보(甲午譜) 를 주관(主管)해서 편보(編譜)했으니 공의 두 번째 큰 업적(業績)이다.
최익환(崔益煥) : 字 치순(致順) 어모장군
최석륜(崔錫倫) : 字 윤오(允五) 효행(孝行)으로 증 동몽교관 우증(又贈) 이조참의
최석인(崔錫仁) : 자 윤경(允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
최광명(崔光明) : 증 호조참의
최봉조(崔鳳祚) : 수101세 수질(壽秩)숭정대부동지중추사
최광한(崔光漢) : 수질 가선대부
최창헌(崔昌憲) : 증 한성부윤 오위도총부부총관
최세태(崔世泰) : 자 낙차(洛此) 서화가(書畵家)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壇名世)
최세연(崔世演) : 字 자언(子彦) 유학도(儒學徒) 양친(養親)에 감지(甘旨) 봉선(奉先) 성효(誠孝) 만년(晩年)에 수축수포대(修築水瀑臺)하니 대(臺)는 곧 선조평촌공과 한훤(寒暄) 일두(日蠹) 양선생 강마(講磨)하시던 곳이라 오래되어 허물어져(頹圮)나무를 심고 돌을 쌓(築石)으며 이어 수포대(水瀑臺)라 부르고 간직한 시집(詩集序)가 있어왔다.
최치연(崔致演) : 字 군격(君格) 공은 선훈가업(先訓家業)을 잘 지켜나가니 모두 산두(山斗)와 같이 바라왔다 (望重)
최도연(崔道演) : 字 자관(子貫) 봉선(封先)과 사친(事親)에 성효(誠孝)를 겸하였다. 수질(壽秩)
최덕신(崔德臣) : 자 여경(汝景) 공은 천자(天資)가 순효(純孝)하였다. 나이 겨우 10세에 아버지가 발저(髮疽)가 낮을 때 옹혈(雍血)을 빨아내어 마침내 완소되었고 그 효성은 까마귀를 안아도 까마귀가 놀라지 않았으 며 물고기를 잡으려 천렵(川獵)에도 물고기가 스스로 이르니 그 효양(孝養)다함을 향인(鄕人)이 아름답게 여겨 여러 차례 영읍(營邑)에 정장(情狀)을 올렸으나 포숭(褒崇)을 받지 못하고 호역(戶役)을 감면해주었다.
최태적(崔泰迪) : 통훈 군자감정
최유수(崔有秀) : 字 경숙(敬叔) 수질 통정
최병일(崔秉溢) : 字 성원(成源) 종사랑 행조기전참봉
최진옥(崔震玉) : 字 경춘(景春) 시종관참봉(侍從管參奉) 고종조
최상하(崔相夏) : 字 윤직(允稷) 자헌(資憲) 행 병조판서 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동지성균관사 승(陞) 첨추(僉樞) 충장위장(忠壯衛將) 상호군(순조조) 조관(朝官)으로 80에 이르다. 수82
최종하(崔琮夏) : 字 문옥(文玉) 무과 행사헌부감찰
최도원(崔道源) : 字 덕삼(德三) 무과 부사과(副司果) 사헌부감찰 벽동군수(碧潼郡守) 첨추(첨樞)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최호원(崔浩源) : 字 양여(養汝) 부사과(고종조)
최두원(崔斗源) : 字 칠여(七汝) 효력부위 수문장(守門將)
최응학(崔應학) : 증 호조참판(철종조)
최원일(崔元一) : 어버이 섬김이 지효(至孝)하여 백리길 부미(負米)하여 감지(甘旨)를 공양(供養)하였다. 하루는 역질(疫疾)로 인해 혼수상태로 누워있는데 문득 한기(寒氣)가 촉면(觸面)에 나타나는 순간 친지(親知)가 보니 호랑이가 곁에 있음에 기운을 얻어 돌아오니 집안 사람들이 성효의 소치라고 일컬었다.(正廟乙丑生, 事親至 孝百里貧米以供甘旨一日因疫極甚偃臥傍昏睡忍有寒氣觸 面覺而親知有虎在側而以水掃之遂勵氣歸家人稱誠孝所致 載大同文獻孝行篇)대동문헌효행편에 실려있다.
최영억(崔永億) : 號 우창(宇昌) 공은 지기(志氣)가 괴위(魁偉)하였고 모현(慕賢)하는데 독실(篤實)하였다. 생애 중에 두 번이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옥산(玉山) 서원의 통문을 받아 왕래했으며 철종13년 임술(1862)에 흥해지방 사림(士林)과 더불어 학림사(鶴林祠)를 창건하였다.
최택규(崔宅奎) : 동몽교관 증 가선, 호조참판 도총부 부총관
최기영(崔岐永) : 행 동지중추부사 용양위오위장(고종조) 字 경언(景彦) 號 죽우당(竹友堂) 문장(文章)에 숙취(夙就)하였고 조행(操行)이 모범(模範)이었다.
최경수(崔景琇) : 字 황언(皇彦) 號 죽헌(竹軒) 수질 가선
최동혁(崔凍赫) : 字 영백(英伯) 공은 가업(家業)을 잘 이었으며 몸가짐을 잘하고 일족(一族)에 돈목(敦睦)하였 다. 만년(晩年)에 동산제각(東山祭閣=東山齋)을 세웠으며 선세(先世)를 사모(寓慕)하고 후예(後裔)를 권학(勸學)하니 사람들이 최씨동산(崔氏東山)이라 일컬었다.
최동극(崔潼極) : 세연(世演)의 계자(系子) 字 건백(建白) 공은 부성(賦性)이 순후(純厚)하였고 효친(孝親) 목족 (睦族)하였다. 선세(先世) 유촉(遺躅)을 이어 수포대(水瀑臺)를 개수(改修)하였다.
최동적(崔凍勣) : 字 계백(繼伯) 號 오도암(吾道菴) 공은 사친(事親)에 지효(至孝)하여 여모(廬慕) 3년에 일찍이 과업(科業)를 폐하고 늦게까지(晩年) 성리(性理)를 추구하고 오도암(吾道菴)을 읽어 후학(後學)을 창진(獎進)하였다. 유문집(有文集)하다.
최도익(崔道益) : 字 화준(和俊) 통훈, 공조참의
최재익(崔在翼) : 字 순익(順益) 號 이산(二山) 1916년 병진에 고조(高祖孝) 사정공(思亭公) 문집을 발간하였고 1934년 갑술에 사량(思良) 선정(先亭)을 중건하였다.
최희삼(崔羲三) : 자 순화(順和) 철종10년 기미(1859)에 무과 행 평창군수 품계 가선
최재순(崔再淳) : 字 유숙(裕淑) 공은 기상(氣像)이 괴위(魁偉)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위선(爲先)에 정성을 다하였고 대곡(大谷) 선산(先山)에 식송(植松) 수갈(竪碣)하였고 학림사(鶴林祠)를 중수하였다.
최도홍(崔道洪) : 字 윤약(胤若) 공은 천품(賦性)이 유순(柔順)하고 사친(事親)에 지효(至孝)하였다. 그 어머니 상(喪)에 오른쪽 손가락을 끊어 수 시간을 소생케 했으며 또 한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서는 왼쪽손가락을 끊어 수 시간을 연장했으나 돌아가심에 슬픔이 지나쳐(哀毁踰禮) 식음(食飮)을 끊어 겨우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향인이 다 탄석(歎惜)하였다.
최도언(崔道彦) : 字 화약(和若) 호 만회당(晩晦堂) 공은 탁연(卓然)한 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문중자질 (門中子姪)들과 사람들에게 가르치되 검덕(儉德)으로 가르쳤다. 젊어서부터 효도육행(孝道六行)을 겸비하였다. ※ 六行(여섯 가지의 선행 곧 仁, 義, 禮, 智, 信, 樂 或 孝, 友 睦, 淵, 任, 恤) 상시 한(恨)됨이 죽포공(竹圃公)의 임단참여 부산전몰(東萊戰歿) 전적이 민몰(泯歿)됨에 사방 제가(諸家) 유고(遺稿)를 찾아 초고(抄稿) 그 권을 얻어 영구(永久)히 자손에게 전하고자 권위(秉筆)를 갖은 경산현령 진성(眞城) 이휘재(李彙載) 찬(撰) 묘지(墓誌)와 성재(性齋) 헌전(許傳)께는 그 초록(抄錄) 발문(跋文)을 구하였다.
최영(崔 泳) : 字 사윤(士潤) 공은 천성이 성효(誠孝)하였고 마땅하게 다스려 돈목(敦睦)하였으며 일찍이 문 행(文行)으로 일으켰던 가운데 향시(鄕試)에 올랐으나 만년에는 개연(慨然)히 선조(先祖) 회당공의 일기 및 행 장을 충의공(忠毅公) 권응수(權應銖) 문집을 상세하게 구명(究明)하여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었다.
최수근(崔壽根) : 字 오원(五元) 가선, 오위도총부도총관 경희궁위장(慶熙宮衛將)(정조조)
최기신(崔基臣) : 字 선유(善惟) 공은 일제 강점기(日帝强占基)에 효열부(孝烈婦) 정려각(旌閭閣)이 도로(道路) 개통(開通)에 따라 철거(撤去)된 이래 20유년 개연분기(慨然奮起)하여 선도향중(善導鄕中) 및 친척유지가 스스로 와서 협찬(協贊)하여 재건(再建)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