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5-16 10:36 수정일 : 2019-09-09 14:29
풍양조씨시조 및 풍양조씨유래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始祖)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豊陽縣) 사람인 조맹(趙孟)이다. 그는 본래 초명이 바위(巖)였는데 만년(晩年)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功)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상주국삼광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三匡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 받았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세거지명(世居地命)인 풍양(豊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시조 이하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일세조를 각기 다르게 하는 두 계통(系統)으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洲)의 옛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그후 포주(抱州 : 抱川)에 이속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다시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6세까지 실전(失傳)한 전직공파(殿直公派)는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몇 대까지 실전(失傳)했는지 상고(詳考)할 수 없는 평장사파(平章事派)는 조신혁(趙臣赫)을, 상장군파(上將軍派) 조보(趙寶)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파(派)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대동보(大同譜)에서도 구분(區分)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전직공파(殿直公派)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 사충) 회양공파(淮陽公派 : 신) 금주공파(錦州公派 : 임) 등 3파(三派)로 나누어지고, 평장공파(平章公派)는 상장군공(上將軍派)를 합쳐 크게 5파(四派)로 분파(分派)되었다.
회양공파(淮陽公派)의 후손에서 다시 한산군파(漢山君派)와 사옹정공파(司饔正公派)로 크게 갈리는데 이들 두 파가 조선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후손도 가장 번창해서 현존(現存)하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과반수를 차지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운흘(云仡)이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 등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특히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에 와서 크게 세도를 떨쳐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으며, 그 세력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쌍벽을 이루었다.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익정(益貞)은 공조 좌랑(工曹左郞) 안평(安平)의 손자로 벼슬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공조(工曹)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지진(之鎭)의 아들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중종 때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지낸 종경(宗敬)과 명종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안국(安國)은 훈련대장(訓鍊大將) 경(儆)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경(儆)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추풍령(秋風嶺) 싸움에서 패하고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켜 1599(선조 32)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올라 선무삼등공신(宣武三等功臣)으로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명문(名門) 풍양조씨를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일으키는데 주춧돌이 된 인물들을 파별(派別)로 보면, 청교파(靑橋派 : 회양공파의 후손)에서 상우(相遇)․문명(文命)․현명(顯命)․재호(載浩) 등의 정승(政丞)과 원명(遠命) 시준(時俊) 정진(鼎鎭) 홍진(弘鎭) 상진(尙鎭) 병필(秉弼) 병창(秉昌) 등의 판서급(判書級)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평장공파(平章公派)에서는 조선 중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익(翼)이 효종(孝宗) 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복양(復陽)은 현종(顯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복약(復陽)의 아들 지겸(持謙)은 숙종(肅宗)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만원(萬元)과 함께 헌종(憲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한산군파(漢山君派 : 회양공파의 후손)는 도정(都正)을 지낸 도보(道輔)의 아들 상경(尙絅)․상강(尙綱)․상기(尙紀) 3형제와 8명의 손자(孫子)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영조(英祖)와 정조조(正祖朝)에 걸쳐 확고한 세도의 기반을 닦았다.
상경(尙絅)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엄(曮)은 영조(英祖) 때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감자를 가지고 들어와 우리 나라에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성품이 강직하여 세칭「조고집」으로 불리웠던 그는 정조(正祖) 때 공조(工曹) 및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에 이르렀으나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탄핵으로 김해(金海)로 유배(流配)당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영조(英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흥진(興鎭)이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판서(判書) 용화(容和)는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당대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다.
이렇게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날린 풍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한말(韓末)의 격동기에 나라와 가문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다.
그 중에 항일투쟁에 앞장선 정구(鼎九)․완구(琬九)․동석(東奭) 등이 이름났는데, 정구(鼎九)는 고종(高宗) 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와 기로소 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을 지내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재직중 한일합방이 되자 합방 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자결하려다 실패하자 금강산(金剛山)에 입산(入山)하여 중이 되기도 했으며, 그의 종제인 완구(琬九)는 군수(郡守)에 재임중 합방을 당하자 간도(間島)로 가서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간부로 활약했고, 동석(東奭)은 경북 상주(慶北尙州)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순절했다.
현대에 와서 풍양 조씨 종인(宗人)들은 「풍육회(豊育會)」를 설립하여 장학금을 지급하고,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선조(先祖)의 묘소 및 유적지 정화사업과 종보 및 족보(族譜)발간 등 다양한 사업목표를 설정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모든 종친(宗親)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양 조씨(豊穰趙氏)는 남한(南韓)에 총 25,894가구, 109,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남한에 총 124,262명이 살고 있는ㄴ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풍양조씨조상
조온순(趙溫珣) 고려조(高麗朝)에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다.
조정(趙 晶) 고려조에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을 역임하였다.
조숙령(趙淑鴒) 고려(高麗) 때 사헌부 산랑(司憲府散郞)을 지냈다.
조계령(趙季鴒) 고려에서 상서형부 낭중(尙書形部郎中)을 역임하였다.
조성옥(趙性玉) 고려(高麗) 때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다.
조염휘(趙炎暉) 고려(高麗)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右副代言) 겸 좌상시(左常侍)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조찬(趙 瓚) 고려(高麗)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
조선(趙 瑄) 고려조(高麗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조운흘(趙云仡)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호(號)는 석간(石磵), 평장사(平章事) 맹(孟)의 후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門人). 1357년(공민왕 6) 문과(文科)에 급제. 안동 서기(安東書記)가 되고, 각문 사인(閣門舍人)을 거쳐 1361년(공민왕 10)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1363년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 직강(國子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全羅)․서해(西海)․양광(楊廣) 삼도 안렴사(三道按廉使)를 지내고, 1374년(공민왕 23)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기슭에 은거, 출입할 때에는 소를 타고 다니면서「기우도(騎牛 圖)」․「찬석간가(贊石磵歌)」 등 작품을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기용,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1380년 광주(廣州) 고원 강촌(古垣江村)에 은퇴, 자은사(慈恩寺)의 중 종림(宗林)과 친교를 맺으며 사평원(沙平院)․판교원(板橋院)을 중건하여 스스로 원주(院主)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전리 판서(典吏判書)에 기용되고, 이해 창왕(昌王) 즉위 후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로 나가 왜구(倭寇)를 토벌 했으며,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390년(공양왕 1)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로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듬해 신병으로 사직,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광주에서 여생을 마치었다.
조운개(趙云价) 고려(高麗)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운식(趙云式) 고려조(高麗朝)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 하였다.
조사충(趙思忠) 고려(高麗) 때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천우위 중령호군(天牛衛中領護軍)을 역임하였다.
조신(趙 愼) 초명(初名)은 사염(思廉)․고려(高麗)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회양도호부사(淮陽道護府使)를 역임하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임(趙 袵) 초명(初名)은 덕인(德麟)․고려(高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조안평(趙安平) 조선조(朝鮮朝)에 승의랑(承議郞)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조개평(趙開平) 조선조(朝鮮朝)에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다.
조길통(趙吉通) 조선(朝鮮)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조계팽(趙季砰)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조하(趙 夏) 조선조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조추(趙 秋)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조겸지(趙謙之)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지내고,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종부시판관(宗簿寺判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온지(趙溫之) 조선(朝鮮) 때 용진 현령(龍津縣令)을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한산군(漢山君)에 봉(封)해졌다.
조후지(趙厚之)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조유(趙 瑜)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조신충(趙信忠) 조선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부정(副正)을 지냈다.
조서경(趙瑞卿)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무과(武科)에 합격, 장기현감(長鬐縣監)을 거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조서정(趙瑞廷) 자(字)는 자부(子符)․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였다.
조익장(趙益長) 조선(朝鮮) 때 지평 현감(砥平縣監)을 지냈다.
조익정(趙益貞) 1436(세종 18)~1498(연산군 4) 자(字)는 이원(而元), 시호(諡號)는 공숙(恭肅),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평(安平)의 손자. 1453년(단종 1) 진사(進士)가 되고, 1465년(세조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 남 이(南 怡)의 옥(獄)을 다스리는 데 공을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 撰官)으로「세조 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어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지고, 1491년(성종 22) 대사헌(大司憲)․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역임했다. 1495년(연산군 1)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공조와 이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1497년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조익조(趙益祚) 자(字)는 여경(餘慶).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를 역임하였다.
조현범(趙賢範) ?~1538(중종 33) 장사랑(將仕郞) 지진(之鎭)의 아들. 1501년(연산군 7) 무과(武科)에 급제, 1506년(중종 1) 의주 판관(義州判官), 1512년 평안도 우후(平安道虞侯)를 지내고, 1520년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거쳐 1528년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들에게 패한 죄로 파직당했다.
1535년 용서되어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고, 1537년(중종 3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김안로(金安老)의 부탁으로 금․은․화피(樺皮) 등을 가지고 와서 밀무역(密貿易)을 했다는 혐의로 파직당했다.
조익희(趙益禧)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익상(趙益祥) 자(字)는 서옹(瑞翁).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었다.
조익우(趙益祐) 자(字)는 서흥(徐興). 조선(朝鮮)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조침(趙 琛) 조선(朝鮮)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조이(趙 耳) 자(字)는 이백(頣伯). 조선(朝鮮)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형조 정랑(刑措正郞)에 이르렀다.
조세문(趙世文)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조세헌(趙世獻) 조선조(朝鮮朝)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조세현(趙世賢) 조선(朝鮮) 때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빙고별좌(氷庫別座)를 지냈다.
조세훈(趙世勛) 1506(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이 있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풍양군(豊穰君)에 봉(封)하여 졌다.
조세철(趙世哲) 자(字)는 국언(國彦).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세적(趙世勣) 자(字)는 국노(國老). 조선(朝鮮) 때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지냈다.
조선(趙 璇) 자(字)는 기부(璣夫).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조승호(趙承瑚) 자(字)는 세보(世寶).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지냈다.
조윤녕(趙允寧) 자(字)는 영지(寧之). 조선(朝鮮)에서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지냈다.
조종경(趙宗敬) 1495(연산 1)~1535(중종 30) 자(字)는 효백(孝伯), 호(號)는 독암(獨庵), 팽(彭)의 아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주서(注書)를 거쳐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수찬(修撰)을 역임하고, 1524년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천되었으나 김안로(金安魯)의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1526년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이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전임, 이어 장령(掌令)․사간(司諫)․전한(典翰)을 지낸 후 1531년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있을 때 심정(沈 貞)의 일당이라는 김안로의 탄핵으로 파직, 과천(果川)에 내려가 학문을 연마했다. 1537년 김안로가사사(賜死)되자 신원(伸寃)되었다.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종돈(趙宗敦) 자(字)는 숙후(叔厚). 조선조(朝鮮朝)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역임하였다.
조기(趙 磯) 자(字)는 자고(自固).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굉(趙 紘) 자(字)는 강중(剛中).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詞直)을 지냈다.
조희(趙 禧) 자(字)는 경지(慶之). 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조휘(趙 徽) 자(字)는 자미(子美), 호(號)는 송파(松坡). 조선(朝鮮)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조정추(趙廷樞) 자(字)는 응두(應斗). 조선(朝鮮)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사예(司藝)를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풍원군(豊原君)에 봉(封)해졌다.
조정기(趙廷機) 자(字)는 형선(衡善).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에 올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고, 부제학(副題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수익(趙守翼) 자(字)는 시보(時輔), 호(號)는 운애(雲厓).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정랑(吏曹正郞)․홍문관 교리(弘文舘校理)를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풍령군(豊寧君)에 봉(封)해졌다.
조수준(趙守準) 자(字)는 국균(國均).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조약묵(趙若黙) 조선(朝鮮) 때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을 역임하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되었다.
조근(趙 瑾) 자(字)는 여진(汝珍).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안국(趙安國) 1501(연산군 7)~1573(선조 6) 자(字)는 국경(國卿), 수군절도사 현범(賢範)의 아들. 1524년(중종 19) 무과(武科)에 급제,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여러 차례 시사대회(試射大會)에 우승한 명궁수(名弓手)로서 상으로 표리(表裏)와 말을 하사(下賜)받았다.
1535년에 특히 문신으로 발탁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1548년(명종 3) 광주목사(光州牧使)․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역임, 1551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했다는 탄핵으로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좌천되었다.
1553년 관내의 도적을 일소한 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고 이어 전라좌도 병마절도사(全羅左道兵馬節度使)에 전임,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에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를 겸직하여 전라우도 병마절도사 남치근(南致勤)과 함께 나주(羅州) 일대에 쳐들어온 왜구(倭寇)를 추격할 때 방심하여 많은 손해를 입게 되자, 남치근이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이를 과장하여 보고 한 탓으로 파직된 뒤 녹도(鹿島)에 장류(杖流)되었다.
1557년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재등용하여 1561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에 승진, 1567년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를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오위장(五衛將)․부총관(副摠官) 등을 역임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즙(趙 濈) 자(字)는 득화(得化), 호(號)는 화천(花川).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정(趙 靖) 자(字)는 안중(安仲), 호(號)는 금간(黔澗). 조선(朝鮮)때 봉상시정(奉尙寺正)을 지냈다.
조국빈(趙國賓) 자(字)는 경관(景觀), 호(號)는 설죽(雪竹). 1606년(선조 39) 문과에 급제하고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을 배척하다가 거제도(巨濟島)에 유배(流配),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풀려나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조현소(趙見素) 자(字)는 자장(子章), 호(號)는 성강(星江),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박(璞)의 아들. 1639년(인조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59년(효종 10) 예조의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금구 현령(金溝縣令)을 지냈다.
조응록(趙應祿) 1538(중종 33)~1623(인조 1) 자(字)는 경수(景綬), 호(號)는 죽계(竹溪). 1573년(선조 6) 진사(進士)가 되고, 15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세자(世子)를 호종(扈從), 난이 끝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位階)에 올랐으며, 1599년 풍덕 군수(豊德郡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 옥사(癸丑獄事) 때 삭직(削職)당했다가 앞서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 때의 공훈을 없앨 때 관작(官爵)을 추탈(追奪)당했다.
조경(趙 儆) 1541(중종 36)~1609(광해군 1) 자(字)는 사척(士惕), 시호(詩號)는 장의(莊毅),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안국(安國)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優待)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황간(黃澗)․추풍(秋風)에서 싸웠으나 패배, 그후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상처를 입었다.
이해 겨울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 율(權 栗)을 응원, 이듬해 권 율과 함께 행주(幸州) 싸움에서 대승.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 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이 되고, 이해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설치로 우영장(右營將)을 겸임, 1596년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었다. 1599년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이 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조희보(趙希輔) 1553(명종 8)~1622(광해군 14) 자(字)는 백익(伯益), 감찰(監察) 기(璣)의 아들.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봉교(奉敎)를 거쳐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 1599년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이 되었다. 1601년 지평(持平)․집의(執義)․사간(司諫)․사예(司藝)를 역임, 다음해 북도 진휼어사(北道賑恤御使)로 나가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사성(司成)이 되었다.
1603년 사도시정(司導寺正)․지제교(知製敎)가 되었고, 앞서 임진 왜란으로 3개처의 사고(史庫)에 보관된 실록(實錄)이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全州史庫)에만 보존되어 있으므로 이를 다시 간행하고자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할 때,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실록의 재간행 사업에 참여했다.
1612년(광해군 4) 성주 목사(星州牧師)가 되었으나 이때 관내에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자행하는 토호(土豪)를 엄벌했다가 파직당했다. 1615년 분승지(分承旨)로 등용되고, 1617년 사과(司果)를 지낸 뒤 대북파(大北派)의 전횡(專橫)이 심해지자 사직하 고 원주(原州)에 은거했다.
조광현(趙光玹) 자(字)는 계진(季珍), 호(號)는 금탄(琴灘), 참봉(參奉) 사필(士弼)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85년 이 이(李 珥)․성 혼(成 渾) 등이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화를 입자 유생(儒生)을 이끌고 신원(伸寃)을 상소, 후에 제릉 참봉(齊陵參奉)․금성 현령(金城縣令)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從兄) 광윤(光玧)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고,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이 되고, 1601년(선조 34)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올랐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조수륜(趙守倫) 1555(명종 10)~1612(광해군 4) 자(字)는 경지(景至), 호(號)는 풍옥헌(風玉軒)․만귀(晩歸), 응교(應敎) 정기(廷機)의 아들, 화가 속(涑)의 아버지. 성 혼(成 渾)의 문인. 1597년(선조 3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대흥 현감(大興縣監)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평택 현감(平澤縣監) 을 지내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옥사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좌승지(左承旨)․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익(趙 翊) 1556(명종 11)~1613(광해군 5) 자(字)는 비중(棐中), 호(號)는 가휴(可畦), 정(靖)의 동생. 정 구(鄭逑)의 문인. 1582년(선조 15) 생원(生員)이 되고, 1588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병조좌랑(兵曹佐郞)․광주 목사(光州牧使)․장령(掌令)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호남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상주(尙州)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방직(趙邦直) 1574(선조 7)~? 자(字)는 숙청(叔淸), 호(號)는 수죽(修竹), 장령(掌令) 응록(應祿)의 아들. 이해수(李海壽)․성 혼(成 渾)의 문인.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사간(司諫)․집의(執義)를 지내고, 1633년(인조 11)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 집(金 集)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격문(檄文)을 돌렸으나 병으로 의병활동에 가담하지 못했다.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났다.
조박(趙 璞) 1577(선조 10)~? 자(字)는 숙온(叔薀), 호(號)는 석곡(石谷), 희윤(希尹)의 아들. 1603년(선조 36) 생원(生員)이 되고, 160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615년(광해군 7) 배천 현감(白川縣監)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1617년 무장 현감(茂長縣監)을 지낸 후 이듬해 평안도 도사 (平安道都事)가 되었다. 이해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가 1625년(인조 3)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시를 잘 지어 문명이 높았다.
조익(趙 翼) 1579(선조 12)~1655(효종 6) 자(字)는 비경(飛卿), 호(號)는 포저(浦渚),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영중(瑩中)의 아들. 장현광(張顯光)․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음보(蔭補)로 정포 만호(井浦萬戶)가 되고, 1598년(선조 31) 서로양선 압운관(西路粮船押運官)으로 미곡 23만석을 무사히 운반,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검열(檢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611년 수찬(修撰)에 재직중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언적(李彦迪)․이 황(李 滉)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웅천 현감(熊川縣監)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기용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듬해 사인(舍人)․응교(應敎)․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625년(인조 3) 부호군(副護軍)․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서 도망한 죄로 1639년 처벌당했다가 뒤에 등용되어 1643년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이조와 예조의 판서(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48년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이듬해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인조(仁祖)의 행장찬집청 찬집관(行狀纂輯廳纂輯官)을 겸한 뒤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해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묘종사 (文廟從祀)를 상소했다가 허락하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음률(音律)․병법(兵法)․복서(卜筮)에도 능했고, 특히 김 육(金 堉)이 제창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적극 주장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여수(趙汝秀) 자(字)는 신보(愼甫), 호(號)는 만오당(晩悟堂). 1627년(인조 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651년(효종 2)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三司)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그림에도 능(能)하여 묵매도(墨梅圖)․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를 남겼다.
조흡(趙 潝) ?~1661(현종 2) 자(字)는 흡여(潝如), 호(號)는 서창(曙窓), 시호(諡號)는 경목(景穆), 교리(校理) 수익(守翼)의 아들. 광해군(光海君)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 1623년 김 유(金 瑬)․이 귀(李 貴) 등이 반정(反正)을 꾀함을 알고 이에 호응하여 이천(伊川)에 가서 방어사(防禦使) 이중로(李重老)와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이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47년에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재직중 주야로 폭음(暴飮)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시방(李時昉)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1651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탐학하다는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내고, 풍 안군(豊安君)에 봉해졌다.
조형(趙 珩) 1606(선조 39)~1679(숙종 5) 자(字)는 군헌(君獻), 호(號)는 취병(翠屛),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승지(承旨). 희보(希輔)의 아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32년 인조(仁祖)의 부친 정원군(定遠君) 부(琈)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는 데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1643년 부교리(副校里)․응교(應敎).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고, 1646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집의(執義)로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여「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홍청도 관찰사(洪淸道觀察使)를 거쳐 1655년(효종6)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통신사(通信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병조 참판(兵曹參判)․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1658년 형조와 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663년 대사헌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전임,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 8)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74년(현종 15)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으로서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다 양주(楊州)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복양(趙復陽) 1609(광해군 1)~1671(현종 12) 자(字)는 중초(仲初), 호(號)는 송곡(松谷),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좌의정 익(翼)의 아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8년(인조 1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40년(인조 18)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1649년(인조 27) 부교리(副校理)로 붕당(朋黨)의 폐를 통탄,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1657년(효종 8) 시강관(侍講官)으로 궁중음악(宮中音樂)의 타락을 지적, 고악(古樂)을 본받아 이를 시정할 것을 촉구하고「악장옥책교문(樂章玉冊敎文)」을 찬(撰)했다. 1660년(현 종 1) 이조 참의(吏曹參議)로서 곡식으로 관작(官爵)을 팔아 구황(救荒)을 하라고 상소했다.
이어 예조 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부제학(副提學)을 거쳐 1667년(현종 8)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이 되고 이듬해 예조 판서로 대제학을 겸했으나 1669년 전에 출제되었던 시제(詩題)를 다시 과거(科擧)의 시제 로 출제한 실수로 대제학(大提學)의 직책만 파직되었다.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지운(趙之耘) 1637(인조 15)~? 자(字)는 운지(耘之), 호(號)는 매창(梅窓)․매곡(梅谷)․매은(梅隱), 속(涑)의 아들. 벼슬은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그림은 흑매(黑梅)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능참봉(陵參奉)으로 있을 때 우의정(右議政) 허 목(許 穆)의 청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이 사실을 안 노론(老論)들이 힐난하자 이 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상우(趙相愚) 1640(인조 18)~1718(숙종 44) 자(字)는 자직(子直), 호(號)는 동강(東岡), 시호(諡號)는 효헌(孝憲), 예조 판서(禮曹判書) 형(珩)의 아들. 이경석(李景奭)․송준길(松浚吉)의 문인. 1657년(효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천거로 세자익 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연천 현감(漣川縣監) 등을 지내고, 1675 년(숙종 1) 스승 송준길이 삭직(削職)당하자 홍득우(洪得禹)와 함께 이를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남평(南平)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호조 좌랑(戶曹佐郞)․태인 현감(泰仁縣監)을 지내고 1683년(숙종 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지평(持平)을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개성유수(開城留守)․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역임, 1711년(숙종 37)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세제(稅制)의 폐단을 시정했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남평(南平)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석명(趙錫命) 자(字)는 백승(伯承), 호(號)는 묵소(墨沼). 1707년(숙종 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성보(趙聖輔) 자(字)는 사준(士俊).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조익명(趙翼命) 자(字)는 사필(士弼).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상경(趙尙慶) 자(字)는 자여(子餘), 호(號)는 하곡(霞谷). 조선(朝鮮)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조대수(趙大壽) 자(字)는 덕이(德而), 호(號)는 지와(止窩). 조선조(朝鮮朝)에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조인수(趙仁壽) 자(字)는 백정(伯靜), 호(號)는 백분당(白賁堂). 조선(朝鮮)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조상건(趙尙健) 자(字)는 자이(子以). 조선(朝鮮)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조최수(趙最壽) 자(字)는 계량(季良), 호(號)는 죽천(竹泉). 조선에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조상명(趙尙命) 자(字)는 사휴(士休).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경명(趙景命) 1674(현종 15)~1726(영조 2) 자(字)는 군석(君錫), 호(號)는 귀락정(歸樂亭),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 1702년(숙종 28) 진사(進士)가 되고, 현감(縣監)을 지낸 후 1722년(경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기용되고, 1725년(영조 1)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조원명(趙遠命) 1675(숙종 1)~1749(영조 25) 자(字)는 치경(致卿),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직장(直長) 기수(祺壽)의 아들. 1702년(숙종 2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고, 지평(持平)․수찬(修撰)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 이듬해 사인(舍人)․집의(執義)․사간(司諫)을 지내는 동안 소론(少論)의 온건파에 속했다. 1724년(경종 4) 노론(老論)이 재집권하자 부응교(副應敎)에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에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발탁(拔擢)되었다.
이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이듬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이어 공조 참의(工曹參議)로서 양역법(良役法)의 개정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에 힘썼다.
그뒤 대사헌(大司憲)․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뒤 1723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선정을 베풀고 조와 예조의 참판(參判)에 이어 평안도 관찰사로 이도 확립(吏道確立)과 재정의 충실을 기했다. 1740년 공조참판(工曹參判), 1744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조준명(趙駿命) 1677(숙종 3)~1732(영조 8) 자(字)는 신여(愼汝), 첨정(僉正) 태수(泰壽)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영소전 참봉(永昭殿參奉)이 되고,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侍直)․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지낸 뒤, 함양 군수(咸陽郡守)․청풍 부사(淸風府使)․능주 목사(綾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1728년(영조 4)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피폐된 청주(淸州)의 민심을 안정시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전서(篆書)․주서(籒書)․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했다.
조상경(趙尙絅) 1681(숙종 7)~1746(영조 22) 자(字)는 자장(子章), 호(號)는 학당(鶴塘), 시호(諡號)는 경헌(景獻), 도정(都正) 도보(都輔)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1708년(숙종 3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說書)․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을 지냈다.
1720년(숙종 46) 헌납(獻納)을 거쳐 사간(司諫)․승지(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안주(安州)에 유배, 이어 아산(牙山)에 이배(移配)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송 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노론(老論) 4대신의 관작이 추탈(追奪)되고 정 호(鄭 澔)․민진원(閔鎭遠) 등이 탄핵당하자 이를 항의하다 또 파직, 1729년 기용되어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73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병조․이조․공조의 판서(判書)에 이어 우참찬(右參贊)․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예조 판 서(禮曹判書)․판동령부사(判敦寧府事)․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조문명(趙文命) 1680(숙종 6)~1732(영조 8) 자(字)는 숙장(叔章), 호(號)는 학암(鶴巖),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1705년(숙종 31) 생원(生員)이 되고 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21년(경종 1)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25 년(영조 1) 지평(持平)이 되고 동학 겸 교수(東學兼敎授)․세자시강원 겸 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727년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이해 실록도청 당상(實錄都廳堂上)으로「경종실록(景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어 도승지(都承旨)․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어영대장(御影大將),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으며, 이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에 봉해졌다.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훈련대장(訓練大將)․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 1730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여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고, 1731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썼다. 영조의 묘 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성복(趙聖復) 1681(숙종 7)~1723(경종 3) 자(字)는 사극(士克), 호(號)는 퇴수재(退修齋),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감역(監役) 시채(始采)의 아들. 1702년(숙종 2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거쳐 장령(掌令)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집의(執義)로서 왕세자(王世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상소, 노론(老論)의 지지를 얻어 그 결정을 보았으나, 이듬해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정의(旌義)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723년 다시 잡혀 올라와 음독 자살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의 삼학사(三學 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조(英祖) 즉위 후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1752(영조 28) 자(字)는 치회(稚晦), 호(號)는 귀록(歸鹿)․녹옹(鹿翁),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 1713년(숙종 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용강 현령(龍岡縣令)․지평(持平)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풍원군에 봉해졌다.
이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 이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1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 하여, 이듬해 쓰시마도(對馬島)의 화재로 조정에서 위문미(慰問米)를 보내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
1733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기용되고, 총융사(摠戎使)․공조 판서(工曹判書) 등을 거쳐 1736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전임하여 이듬해 형정(刑政)의 불공 평함을 상소하고 다시 파직당했다.
1738년 이조 판서로 복직, 그후 좌참찬(左參贊)․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공조(工曹)․호조(戶曹)․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1740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1742년 양역 사정청(良役査正廳)을 복설(復設)케 하고, 이듬해 문안사(問安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6년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전임했다가 다시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1749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이어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1751년 좌의정(左議政)에 전임, 이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주장으로 호전법(戶錢法)의 실시가 논의되자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으로서 그 구체적 절목(節目)을 결정하여 양역(良役)의 합리적 개혁을 보게 했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죽었다.
노론(老論)에 속했으나 탕평책(蕩平策)을 지지, 영조(英祖)의 정책 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조 1수가「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한다.
조귀명(趙龜命) 자(字)는 석여(錫汝)․보여(寶汝), 호(號)는 동계(東谿), 형(珩)의 증손, 첨정(僉正) 태수(泰壽)의 아들. 1711년(숙종 37) 생원(生員)이 되고, 1722년(경종 2)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그후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공조 좌랑(工曹佐郞)․태인현감(泰仁縣監)․개령 현감(開寧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후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들러가 시직(侍直)․익위(翊衛)를 잠시 지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조돈(趙 暾) 자(字)는 광서(光瑞), 호(號)는 죽석(竹石), 시호(諡號)는 숙헌(肅憲).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재준(趙載俊) 자(字)는 도경(道卿).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조환(趙 瑍) 자(字)는 군서(君瑞), 호(號)는 각미(覺迷),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1769년(영조 4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승지(承旨)에 이르렀으며 그후 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만원(趙萬元) 자(字)는 태시(泰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조선에서 판서(判書)를 지냈다.
조홍진(趙弘鎭) 자(字)는 관보(寬甫), 호(號)는 창암(牕巖). 조선조(朝鮮朝)에 판서(判書)를 지냈다.
조한위(趙漢緯) 자(字)는 공서(公西), 호(號)는 만운(晩雲). 조선(朝鮮)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조진택(趙鎭宅) 자(字)는 인숙(仁叔). 조선조(朝鮮朝)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정(趙 晸) 자(字)는 인서(寅瑞), 호(號)는 내호(來湖). 조선(朝鮮)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조유수(趙裕壽) 자(字)는 의중(毅仲), 호(號)는 후계(後溪). 1688년(숙종 14) 유생(儒生)으로서 박세채(朴世采)의 원통함을 상소하였다. 1694년(숙종 14) 천거로 희릉 참봉(禧陵參奉)을 거쳐 옥천 군수(沃川郡守)․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지냈으며, 1732년(영조 8)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였다.
조재민(趙載敏) 자(字)는 언신(言愼).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재한(趙載翰) 자(字)는 익여(翼如).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조진용(趙鎭容)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성진(趙城鎭) 조선조(朝鮮朝)에서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조천경(趙天經) 1695(숙종 21)~1776(영조 52) 자(字)는 군일(君一), 호(號)는 이안당(易安堂), 자신(自愼)의 아들. 이만부(李晩敷)의 문인. 1720년(숙종 4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28년(영조 4) 별시문과(別試文科)를 보러 가던 도중,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와 의병소(義兵所)의 서기(書記)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특인 오위도총부호군(五衛都摠府護軍)으로 발탁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았다.
조재호(趙載浩) 1702(숙종 28)~1762(영조 38) 자(字)는 경대(景大), 호(號)는 손재(損齋), 좌의정(左議政) 문명(文命)의 아들, 효순 왕후(孝純王后)의 오빠. 학문(學問)이 뛰어나 1739년(영조 15)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등용되어 서연(書筵)에 참석했다.
1744년(영조 20)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로 특진(特進)된 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내고, 175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우빈객(右賓客)을 겸하였다. 이때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여 소론(少論)의 미움을 받았으며 1754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듬해「천의소감(闡義昭鑑)」편찬의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1759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계비(繼妃) 책립(冊立)을 반대 하여 임천(林川)에 부처(付處), 이듬해 풀려나와 춘천(春川)에 은거했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구하려고 상경했으나 실패, 오히려 홍봉한(洪鳳漢) 등의 무고로 종성(鍾城)에 안치(安置), 사사(賜死)당했다. 1775년(영조 51) 신원(伸寃)되었다.
조엄(趙 曮) 1719(숙종 45)~1777(정조 1) 자(字)는 명서(明瑞), 호(號)는 영호(永湖),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판서(判書) 상경(尙絅)의 아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사서(司書)․수찬(修撰)․지평(持平)을 역임, 1757년 교리(校理)․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758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 1760년 창원 마산창(昌原馬山倉)․진주 가산창(晋州駕山倉)․밀양 삼랑창(密陽三浪倉) 등 3개 조창(漕倉)의 증설을 건의, 이제까지 백성들의 부담으로 된 세곡 수송(稅穀輸送)의 폐해를 시정함으로써 민폐(民弊)를 덜고 공물(貢物)의 수납을 공정케 하여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했다.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1763년(영조 39)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갈 때 쓰시마도(對馬島)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여 이듬해 귀국할 때 그 재배 저장법(栽培貯藏法)까지 익히고 귀국, 동래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케 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했다.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이조 판서(吏曹判書)․제학(提學) 등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무고를 받아 파직, 그후 혐의가 풀려 다시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를 지냈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 일파의 무고로 또다시 위원(渭原)에 유배, 처형을 기다리던 중 그의 아들 진관(鎭寬)의 직소(直訴)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金海)에 이배(移配), 배소(配所)에서 병사했다.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재정의 충실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조경(趙 璥) 1727(영조 3)~1787(정조 11) 자(字)는 경서(景書), 호(號)는 하서(荷棲), 시호(諡號)는 충정(忠定), 목사(牧使) 상기(尙紀)의 아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후 정조(正祖) 초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그후 좌승지(左承旨)․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실록청 당상관(實錄廳堂上官)․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민폐를 없애고 군무(軍務)를 충실케 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 라 지경연사(知經筵事)․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도총관(都摠管)을 겸했다.
1786년(정조 10) 우의정(右議政)으로 동지 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 이듬해 처벌되지 않은 은언군(恩彦君) 인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누차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용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에 세워졌다.
조정진(趙鼎鎭) 1732(영조 8)~1793(정조 17) 자(字)는 사수(士受), 교리(校理) 재덕(載德)의 아들. 1753년(영조 29) 생원(生員)이 되고, 1761년 명릉 참봉(明陵參奉)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후 1777년(정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영조실록(英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780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내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영진(趙英鎭) 1737(영조 13)~? 자(字)는 사린(士藺), 재선(載選)의 아들.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교리(校理)․수찬(修撰)을 거쳐 1772년에 삼강 암행어사(三江暗行御史 : 함경도 삼수), 이듬해 승지(承旨), 1777년(정조 1) 대사간(大司 諫), 이어 동래 부사(東萊府使) 등을 역임했다.
조진관(趙鎭寬) 1739(영조 15)~1808(순조 8) 자(字)는 유숙(裕叔), 호(號)는 가정(柯汀), 시호(諡號)는 효문(孝文), 이조 판서(吏曹判書) 엄(曮)의 아들. 1762년(영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71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775년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이 되어 구현시(求賢試)에 장 원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으며, 제학(提學)․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냈다.
1776년(영조 52) 아버지가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배척하다가 무고를 받아 투옥되자, 신문고(申聞鼓)를 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아 칼로 몸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한뒤, 이듬해 관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군량(軍糧)을 향리(鄕吏)가 사 취한 사건이 드러나자 책임자로서 파직되었다.
홍국영의 실각 후 1788년(정조 12)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대사간(大司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 1796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도승지(都承旨)․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800년(정조 24)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뒤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호조․병조․형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상진(趙商鎭) 1740(영조 16)~1820(순조 20) 자(字)는 이진(爾珍), 호(號)는 유창(榴窓), 시호(諡號)는 익정(翼貞), 재우(載遇)의 아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간(司諫)․부응교(副應敎)를 거쳐 1780년(정조 4)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이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1782년 대사성(大司成)이 된 뒤 도승지(都承旨), 공조와 형조 및 예조의 판서(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1799년(정조 23)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1802년(순조 2)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뒤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조흥진(趙興鎭) 1748(영조 24)~1817(순조 14) 자(字)는 수보(秀甫), 시호(諡號)는 숙종(肅靖), 충헌(忠獻)으로 개시(改諡), 증참판(贈參判) 재임(載任)의 아들.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정자(正字)를 지내고, 1780년(정조 4) 가주서(假注書)가 되어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선발 되었다.
교리(校理)를 거쳐 1782년 부제학(副提學)․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역임, 1786년 동부승지(同副承旨)․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나갔다가 1801년(순조 1) 곡산 부사(谷山府使)가 되고, 1810년 대사간(大司諫)에 승진,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 尹)에 전임하였다.
이듬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의주를 사수하고, 이어 관군을 집결시켜 용천(龍川)․철산(鐵山) 등 7읍을 수복하는데 크게 활약했으나 논공행상(論功行賞) 때 관비(官費)를 남용(濫用)하였다는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탄핵으로 공이 적게 평가되자 사직하고 은퇴 했다. 후에 대간(臺諫)의 건의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승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부총관(副摠管)을 역임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득영(趙得永) 1762(영조 38)~1824(순조 24) 자(字)는 덕여(德汝), 호(號)는 일곡(日谷),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판서 환(瑍)의 손자, 서윤(庶尹) 진명(鎭明)의 아들. 1789년(정조 13)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 이해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고, 1795년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수찬(修撰)․겸문학(兼文 學)을 지낸 뒤 1801년(순조 1) 예조․이조의 참의(參議)가 되었다.
1806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우의정(右議政) 김달순(金達淳)을탄핵하여 유배시키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80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암행어사(暗行御史) 서능보(徐能輔)의 탄핵으로 관하에 족징(族徵)의 폐해가 극심하다는 죄로 파직, 유배되었으나, 모친이 탄원하여 암행어사의 탄핵이 사감(私憾)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풀려 나왔다.
1810년 형조 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812년 박종경(朴宗慶)이 척신(戚臣)으로 국정을 문란케 한다고 상소했다가 다시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에 유배, 1818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고,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모친상으로 은퇴, 1822년 우참찬(右參贊)․제학(提學)을 겸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에 재임,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종영(趙鍾永) 1771(영조 47)~1829(순조 29) 자(字)는 원경(元卿), 호(號)는 북해(北海),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경상도 관찰사 진택(鎭宅)의 아들. 1792년(정조 16)에 진사(進士)가 되고, 17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교리(副校理)․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810년(순조 10)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부임, 이듬해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민병(民兵)을 규합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워 1813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올랐다.
이어 한성부 좌우윤(漢城府左右尹), 공조․형조․호조의 참판(參 判),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 1821년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829년 이조 판서에 전임했고, 우참찬(右參贊)에 올라 병사했다.
조만영(趙萬永) 1776년(영조 52)~1846(헌종 12) 자(字)는 윤경(胤卿), 호(號)는 석애(石崖),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이조 판서 진관(鎭寬)의 아들. 1813년(순조 13) 능원랑(陵園郞)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된 뒤, 지평(持平)․정언(正言)․겸문학(兼文學) 등을 역임하고, 1816년 전라도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
1819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지고 이후 그 일파인 풍양 조씨가 정계에 등장, 그 중추적 인물로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세도(勢道)를 다투게 되었다.
이듬해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1821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어 이조․호조․예조․형조의 판서(判書)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 요직을 역임, 184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영의 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되었다.
조기영(趙冀永) 1781(정조 5)~? 자는 수경(壽卿), 판서(判書) 돈(暾)의 손자, 목사(牧使) 진선(鎭宣)의 아들. 1814년(순조 14) 참봉(參奉)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 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1827년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치적(治積)을 쌓아 1833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837년(헌종 3)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낸 뒤 1840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3년 대사헌(大司憲), 이듬해 예조와 병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846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하고 이어 형조 판서․대사헌․이조 판서를 지내고, 1849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철종이 즉위하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1852년(철종 3) 원접사(遠接使)로 청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했다.
조인영(趙寅永) 1782(정조 6)~1850(철종 1)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판서진관(鎭寬)의 아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이듬해 응교(應敎)가 되고, 1822년 대사헌(大司憲)에 특진, 1826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829년 세손부(世孫傅), 이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우부빈객(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이때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면서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이에 대결,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해 그의 형 조만영(趙萬永)이 어영대장(御影大將)으로 발탁(拔 擢)되면서 왕의 측근이 되고 조씨 일가의 세도가 강화되자 호조와 이조의 판서(判書)를 지내면서 조정에 조씨 세도의 독무대를 이루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고,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여 계속 천주교도를 박해했고, 죽을 때까지 4차례에 걸쳐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했다.
1816년(순조 16)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의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유연정(劉燕庭)에게 우리나라 금석화 자료를 주어 연구하게 했고, 귀국한 후에도 계속 김정희(金正喜)가 발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拓本)과「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등을 보내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헌종 13)「국조보감(國朝寶鑑)」의 찬술에 참여했다. 헌종(憲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조학년(趙鶴年) 1786(정조 10)~? 자는 화중(和仲),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판서(判書) 만원(萬元)의 아들. 수원(水原) 출신. 1828년(순조 28)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수찬(修撰)․응교(應敎)를 지내고, 1835년(헌종 1) 부사과(副司果)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9년 이조 참의(吏曹參 議), 이듬해 대사성(大司成), 이어 부제학(副提學)․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844년 예조․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
1848년에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고, 1849년(헌종 15) 우참찬(右參贊)으로 지실록청사가 되어「헌종실록(憲宗實錄) 」의 편찬에 참여, 이듬해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조병현(趙秉鉉) 1791(정조 15)~1849(헌종 15)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우당(羽堂).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교리(郊理)를 역임하고, 1826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냈다.
이후 조병귀(趙秉龜)와 함께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로서 183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듬해 세자시강원 겸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을 겸임, 공충도(公充道)와 경상도의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직,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여 신부 샤스땅과 모방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등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켰다.
1841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전임,「동문휘고(同文彙考)」의 교정당상(校定堂上)을 겸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844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이해 좌참찬 (左參贊)에 올랐다가 과거(科擧)의 부정사건에 연루,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좌천, 그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1847년 왕의 총애를 기화로 부정을 행하고 조종을 문란케 한다는 안동 김씨파의 대사헌(大司憲) 이목연(李穆淵)의 탄핵을 받고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1849년(헌종 15) 앞서의 일로 다시 탄핵을 받아 전남 지도(智島)에 위리 안치된 후사사(賜死)당했다.
조용화(趙容和) 1793(정조 17)~? 자(字)는 성교(聖交), 호(號)는 청소(晴沼), 시호(詩號)는 문헌(文憲), 교리(校理) 운익(雲翊)의 아들. 1813년(순조 1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832년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 184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1844년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이 능하고 고금의 서적을 탐독, 경사제가(經史諸家)의 전주(箋 註)를 간명하게 잘 썼으며, 거유(巨儒)로 일컬어졌다.
조희일(趙熙一) 자(字)는 순웅(舜雄).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조병귀(趙秉龜) 1801(순조 1)~1845(헌종 11) 자(字)는 경보(敬寶), 호(號)는 유하(游荷), 시호(詩號)는 문숙(文肅),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만영(萬永)의 아들,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오빠. 1822년(순조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首)가 되고, 182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병과(丙科)로 급제, 1829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사과(副司果)․겸문학(兼文學)․책저도감 교감(冊儲都監敎官)을 지내고, 1832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 (大司成)에 승진, 1836년(헌종 2) 이조 참의(吏曹參議)․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다. 1840년 부제학(副提學)․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이 되고, 1842년에 금위대장(禁衛大將)․총융사(摠茙使)․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 이듬해 행호군(行護軍)이 되었으며 이동안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권력다툼을 했다. 1844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익종(翼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조병헌(趙秉憲) 1803(순조 3)~? 자(字)는 윤문(允文), 호(號)는 금주(錦洲), 이조 판서(吏曹判書) 종영(鍾永)의 아들. 1827년(순조 27)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32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 수찬(修撰)․응교(應敎)를 역임, 1837년(헌종 3) 대사성(大司成)에 승진했다. 1841년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올랐다.
조병준(趙秉駿) 1814(순조 14)~? 자(字)는 경범(景範), 시호(諡號)는 효종(孝貞), 원영(原永)의 아들. 1841년(헌종 7) 생원(生員)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48년에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이 되었다. 1850년(철종 1)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듬해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1852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갔다.
1854년 다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이듬해 공조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대호군(大護軍)․우참찬(右參贊)을 역임,1856년 세번째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이듬해 판의금부사(判義禁府 事)에 이르렀다.
조병기(趙秉夔) 1821(순조 21)~ 1858(철종 9) 자(字)는 경증(景曾), 호(號)는 소석(小石), 시호(諡號)는 효헌(孝獻), 영의정 인영(寅永)의 아들. 1844년(헌종 10) 황감제시(黃柑製試)에 합격,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849년(헌종 15)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다음해 부호군(副護軍), 1854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다음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어 도총관(都摠管)․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857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빈전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을 겸직하다 빈전도감의 막사에 화재가 일어나 한때 파직당했다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총융사(摠茙使)를 겸했다.
조철증(趙喆增) 1827(순조 27)~1868(고종 5) 자(字)는 치양(稚壤), 능하(能夏)의 아들. 한양 출신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정언(正言)등을 역임했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후 폐롱 신부의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가지고 청나라에 가서 최인서(崔仁(瑞)․지자익(池子益)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리델 신부 일행을 피신시켜 상해(上海)로 탈출케 했으며, 장치선(張致善)을 앞세우고 막후에서 조정의 탄압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868년 체포된 장치선 등의 자백으로 월해초구죄(越海招寇罪)로 체포령이 내리자 단양(丹陽)에서 자결했다.
조준영(趙準永) 1833(순조 33)~1886(고종 23) 초명(初名)은 만화(晩和), 자(字)는 경취(景翠), 호(號)는 송간(松磵), 운섭(雲涉)의 아들. 운철(雲澈)에게 입양.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참판(參判)을 지내고, 1881년 (고종 18)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 귀국 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가 되었다.
이듬해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청나라 군대가 입성(入城)하자 영접관(迎接官)이 되었고, 1883년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를 지냈으며, 1884년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사대당(事大黨) 내각이 조직될 때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이듬해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1886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전임했다.
조병필(造秉弼) 1835(헌종 1)~ 1908(융희 2) 자(字)는 성필(聖必), 호(號)는 간산(幹山), 시호는 문정(文埥), 귀영(龜永)의 아들. 1871년(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6년(건양 1)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서 진주(晋州)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을 진압, 그후 3사(司)의 벼슬을 거쳐 판서(判 書)를 지내고 내부 대신(內部大臣)에 올랐다. 1900년(광무 4) 조인영(趙寅永)이 보완(補完) 편술한「풍양조씨세보(豊穰趙氏世譜)」를 보충, 간행했다.
조동윤(趙東潤)) 자(字)는 우생(雨生), 호는 혜석(惠石).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及第), 검열(檢閱)․설서(設書)․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司諫) 등을 거쳐 1890년 동부승지(同副承 旨)에 올랐다. 그후 부제학(副提學)․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거쳐관제개혁(官制改革) 후 군무국장(軍務局長)․무관학교장(武官學校長)․시종무장관(侍從武長官)등을 역임하고 1908년 동궁무관장(東宮武官長)이 되었다. 서화에 뛰어났다.
조강하(趙康夏) 1841(헌종 7)~? 자(字)는 경평(景平), 호(號)는 물재(勿齋), 병석의 아들,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하(寧夏)의 동생.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기․전라․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고, 1886년(고종 23)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1889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로 전임,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조성하(調成夏) 1845(헌종 11)~1884(고종 18) 자(字)는 순소(舜韶), 호(號)는 소하(小荷),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병조 판서(兵曹判書) 병준(秉駿)의 아들.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대교(待敎)를 거쳐 대사성(大司 成)․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1874년(고종 11)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고, 그후 지경연사(知經筵事)․예조 판서(禮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친정 조카로, 민씨(閔氏) 일파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배척에 힘썼다.
조영하(趙寧夏) 1845(헌종 11)~1884(고종 21) 자(字)는 기삼(箕三), 호(號)는 혜인(惠人),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병석(秉錫)의 아들, 총융사(摠戎使) 병기(秉夔)에게 입양.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가 되고 다시 섭정(攝政)하던 조대비(趙大 妃)의 총애를 받아 1865년(고종2) 대사성(大司成)에 특진했다.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873년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재직중 민승호(閔升鎬) 등 민씨일족과 결탁하여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을 탄핵한 최익현(崔益 鉉)과 함께 대원군 세력의 추방에 앞장섰다.
이해 고종의 친정(親定)이 선포되면서 대원군이 실각하자 이듬해 금위대장(禁衛大將)에 발탁(拔擢)되고 이어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 판서, 이듬해 예조 판서, 188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상호군(上護軍)으로 통리기무아문 당상(堂上)이 되고 이듬해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사대교린 당상(事大交隣堂上)․전선어학사당상(典選語學司堂上)․병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점차 사대당(事大黨)의 중진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를 접견하였고, 이해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미(韓美)․한영(韓英)․한독(韓獨) 수호조규(修好條規)를 각각 체결했다.
이해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좌천되었다가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임오군란(壬午軍亂) 주동자의 색출과 대원군의 납치를 실현하게 하여 마침내 민씨 세력의 재집권을 가져오게 했다.
이해 다시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가서 기계․무기 등을 수입하여 관세(關稅)․외교(外交)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초빙, 입국케 했다. 그후 판리통리아문사(辦理統理衙門事務)․독판통상사무(督辦通商事務)․도통사(都統使)를 역임, 1883년(고종 20) 예조 판서에 재임되고, 이듬해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살해당했다.
조동면(趙東冕) 자(字)는 성류(聖瑬),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성하(成夏)의 아들. 1883년(고종 20) 교관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개화당(開化黨) 내각이 수립되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889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1893년 관제개혁 때 강화 유수(江華 留守)로 나갔다가 이듬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조정구(趙鼎九) 1862(철종 13)~1926 초명(初名)은 석구(晳九), 자(字)는 미경(米卿), 호(號)는 월파거사(月坡居士), 판서봉하(鳳夏)의 손자, 동석(東奭)의 아들,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제학(提學)․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직제학(直提學)․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기로소비서장(耆老所秘書長)을 지낸 후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재직중에 한일합방이 되자 합방 조서(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고,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男爵)을 거절했다.
그후 양주군 사릉리(楊洲君思陵里)에 은거하다가 금강산 반야암(般若庵)에 들어가자 결을 기도했으나 1919년 고종(高宗)이 별세하자 상경,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7년 동안 유랑하며 지내다가 둘째 아들 남익(南益)이 죽은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조동윤(趙東潤) 1871(고종 8)~1923 자(字)는 우생(雨生), 호(號)는 혜석(惠石), 판서 영하(寧夏)의 아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1887년(고종 24)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설서(設書)․응교(應敎)․집의(集義)․사간(司諫) 등을 역임, 189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그후 형조와 공조의 참의(參議), 부제학(副提學)․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내고, 1897년(광무 1) 육군참장(陸軍參將), 1899년 군무국장(軍務局長)을 거쳐 1903년 육군법원장․무관학교장․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을 역임, 1908년(융희 2) 동궁무관장(東宮武官長)이 되었다.서화(書畵)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조기원(趙基遠) 자(字)는 경진(景進), 호(號)는 초은(樵隱).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조형원(趙亨遠) 자(字)는 경회(景會).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조석우(趙錫愚) 자(字)는 경안(景顔), 호(號)는 존성재(存省齋). 조선(朝鮮)에서 지평을 지냈다.
조석룡(趙錫龍) 자(字)는 경운(景雲), 호(號)는 만낙제(晩樂齋). 조선 때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조석철(趙錫喆)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정와(靜窩). 조선조에 덕망(德望)이 높은 학자(學者)로 이름을 떨쳤다.
조석목(趙錫穆) 자(字)는 원중, 호(號)는 정사(精舍). 조선조에 승지를 역임하였다.
조석호(趙錫虎) 자(字)는 정측(正則), 호(號)는 삼성재(三省齋).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조목수(趙沐洙) 자(字)는 사위(士威), 호(號)는 구당(舊堂). 조선(朝鮮)에서 학자였다.
조의(趙 疑) 자(字)는 탁여(卓汝). 조선조에 전적(典籍)을 지냈다.
조덕(趙 㯖) 자(字)는 희대(希大), 호(號)는 치재(致齋).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조동석(趙東奭) 자(字)는 국필(國弼), 호는 국은(菊隱). 1874년(고종 11)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1896년(건양 1) 상주(尙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日本)에 항거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조준구(趙駿九) 자(字)는 여관(驪寬). 1805년(순조 5) 서사(筮仕)로 감역(監役)을 거쳐 1830년(순조 30)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으며, 1842년(헌종 8)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만년에는 전원(田遠)으로 돌아가 의압소(義壓所)를 설립하였다.
조용구(趙龍九) 자(字)는 경희(景羲). 조선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조남식(趙南軾) 자(字)는 계의(季擬), 호(號)는 간운(澗雲). 1886년(고종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응교(應敎)․참의(參議) 등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