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5-12 17:14 수정일 : 2019-09-04 12:44
하동정씨시조 및 하동정씨본관의 유래
하동(河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최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다사군(多沙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하동(河東)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때 남해현(南海縣)을 병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 하다가 후에 분리하였고 1702년(숙종 28) 섬강(蟾江)을 관문(關門)으로 삼고 진주(晋州)의 악양(嶽陽) ․ 화개(花開) 등이 이에 속하였다.
1703년(숙종 29) 치소를 진답면 두곡(豆谷)에 설치하고 1704년(숙종 30) 부로 승격, 1730년(영조 6) 치소를 나동(螺洞)으로 옮겼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15년 곤양군(崑陽郡)의 서면(西面)과 금양면(金陽面)을 편입하였고 1939년 하동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연원(淵源)을 알 수 없는 여섯 계통(系統)분류(分類)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하동 정씨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다음 세 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첫째 계통(系統)은 삼한(三韓)의 말기(末期)에 하동(河東)으로 이거(移居)하여 고려 초(高麗初)에 호장(戶長)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 석숭(碩崇)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계통이다.
통칭하여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또는 밀직공파(密直公派)라 부르며 전체 하동정씨의 60%가 이파에 속한다.
둘째 계통은 고려 초에 하동지방(河東地方)의 민병(民兵)을 주관(主管)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高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 .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등을 지낸 정 응(鄭 膺)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정승공파(政丞公派)라 부르며 하동정씨의 30%가 이파이다.
셋째 계통은 고려 숙종(肅宗)과 명종조(明宗朝)에 걸쳐 다섯 왕조에 벼슬을 지냈고 정헌대부(正憲大夫) . 지예부사(知禮部事)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후 하동백(河東佰)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예부공파(禮部公派)라 부르며 전체 하동정씨의 10%가 이파에 속한다.
득성(得姓)의 연원(淵源)은 신라 유리왕(新羅 儒理王) 9년(서기 32년) 서라벌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육부촌(六部村)에 사성(賜姓)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근원을 두고있다.
육부 중 하나인 본피부(本彼部)에 정씨성(鄭氏姓)을 사성(賜姓)하였다 하였으니 당시의 본피부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족(部族)이 정씨성(鄭氏姓)을 하사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뚜렷한 시조를 찾을 수가 없다.
하동정씨(河東鄭氏)의 90%이상을 찾이하는 평장사공파와 정승공파 모두 고려개국초(高麗開國初)의 정도정(鄭道正)과 고려중엽(高麗中葉)의 정응(鄭 膺)을 시조로 하고 있어 신라(新羅) 당시의 인물에 연관 짖지 않고 있다.
시조 정손위(始祖 鄭遜位)파는 최근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을 옹립한 육부촌장(六部村長)중의 한분인 지백호(智佰虎) 감문왕(甘文王 추봉)의 후손임을 기록하고 시조 정손위가 지백호의 40대손(代孫)으로 세계(世系)하고 있으나 본관시조(本貫始祖)는 정손위 (鄭遜位)로 하여 대수를 세고 있다.
따라서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동관삼정(同貫三鄭)으로 삼시조(三始祖)를 각위(各位)하여 대삼파(大三派)로 분류되나 대종회(大宗會)를 비롯 모든 종중행사(宗中行事)는 대삼파(大三派)가 합동으로 하고 있다.
씨족사 개요(氏族史 槪要)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손위(遜位)의 아들 세유(世裕)가 고려 때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냈고, 세유(世裕)의 아들 숙첨(叔瞻)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안(晏)은 평장사(平章事) 숙첨(叔瞻)의 아들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 응(膺)과 그의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하천군(河川君) 계(綮)와 증손 금오상주국(金吾上柱國) 문하첨의찬성사(門下僉議贊成事) 승경(承慶)이 있고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은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가로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요 그 아우 난연(蘭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난연의 아둘 성(盛)은 금성군(錦城君)이요 성의 아들 경열공(景烈公) 지(地)는 문무겸전의 해도 원수(海島元帥)로 우리 나라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승경의 손 희(熙)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정몽주의 제자로 절개를 지켜 두분동 72현(杜門洞 72賢)으로 이름높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문무 양쪽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직제학 희(熙)의 아들 초(招)는 공판이판(工判吏判)과 예문관 집현전(藝文館集賢殿) 양관대제학 (兩館大提學)으로 문학,농사,아악,천문,과학 등의 학문이 뛰어나 세종성업(世宗盛業)의 큰 기둥이었고 문성공(文成公)인지(麟趾)는 태종이래 六조(六朝)를 섬기며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기까지 천문,역법,아악,문학에 뛰어나고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을 세우는 등 조선조의 대표적 학자요. 정치가였다.
희(熙)의 손 문절공(文節公) 수충(守忠)은 박통경사(博通經史)하고 조행(操行)으로 이름높고 좌찬성(左贊成)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고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여창(汝昌)은 당대 유종(儒宗)이요.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며 문묘배향(文廟配享)된 十八현(十八賢)의 한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장군 휘하의 선봉장(先鋒將) 충장공(忠壯公) 운(運)과 이괄난을 평정한 부원수(副元帥) 금남군(金南君) 충무공(忠武公) 충신(忠信)과 정묘(丁卯) 병자(丙子) 호란(胡亂)시 청군(淸軍) 수 천명을 죽이고 용골산성을 사수한 절제사(節制使) 양무공(襄武公) 봉수(鳳壽) 기수(麒壽) 형제는 명장(名將)으로 꼼히며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절사(節死)한 충민공(忠敏公) 열(悅) 충열공(忠烈公) 기린(麒麟) 충장공(忠壯公) 득열(得說) 참판공(參判公) 응린(膺麟) 판서공(判書公) 회(繪)가 이름 높고 병자호란 후 심하(深河)에서 절사(節死)한 양무공 일문(一門)의 기남(奇男) 순남(順男) 시창(始昌) 사검(思儉) 등 六충신정려(六忠臣旌閭)와 문헌공 자손의 九충신정려(九忠臣旌閭) 문절공 자손의 六충효열정려(六忠孝烈旌閭)가 있으며 지함(之咸) 지영(之英)등 四형제와 매부 정한산의 한날 동시 무과합격을 기념한 오고정(五鼓亭)이 있다. 경흠(慶欽)과 충엽(忠燁)은 당대의 서화가로 이름 날렸고 이름난 실학자(實學者)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상기(尙驥)와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한 항령(恒齡) 부자(父子)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남한에 187,1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五문(五文)
문충공(文忠公) 휘(諱) 지연(芝衍) 밀직공(國龍)의 장자
문경공(文景公) 휘(諱) 초(招) 묵은공(熙)의 차자
문성공(文成公) 휘(諱) 인지(麟趾) 하성 부원군(興仁)의 장자
문절공(文節公) 휘(諱) 수충(守忠) 하원군(提)의 자
문헌공(文獻公) 휘(諱) 여창(汝昌) 좌윤공(六乙)의 장자
九충(九忠)
경열공(景烈公) 휘(諱) 지(地) 금성군(盛)의 손자
양양공(良襄公) 휘(諱) 종(種) 경렬공(地)의 손자
충장공(忠壯公) 휘(諱) 운(運) 장령공(希周)의 5 세손
충민공(忠敏公) 휘(諱) 열(悅) 경렬공(地)의 8 세손
충장공(忠莊公) 휘(諱) 득열(得說) 문성공(麟趾)후
충렬공(忠烈公) 휘(諱) 기린(麒麟) 경렬공(地)의 7 세손
충무공(忠武公) 휘(諱) 충신(忠信) 경렬공(地)의 9 세손
양무공(襄武公) 휘(諱) 봉수(鳳壽) 한림공(霖)의 8 세손
충결공(忠潔公) 휘(諱) 택뢰(澤雷) 충장공(得說)의 아들
十三봉군(十三封君)
하천군(河川君) 휘(諱) 계(綮) 정승공(膺)의 손자
금성군(錦城君) 휘(諱) 성(盛) 좌윤공(蘭衍-난연)의 자
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휘(諱) 흥인(興仁) 문성공의 아버지
하원군(河原君) 휘(諱) 제(提) 묵은공의 3 자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휘(諱) 인지(麟趾) 문성공
하원군(河原君) 휘(諱) 수충(守忠) 하원군(提)의 자
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휘(諱) 현조(顯祖) 문성공의 차자
하남군(河南君) 휘(諱) 숭조(崇祖) 문성고의 3자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휘(諱) 세호(世虎) 문성공의 5자인 상조(尙祖)의 차자
금천군(錦川君) 휘(諱) 윤(倫) 경렬공 8 세손
금남군(錦南君) 휘(諱) 충신(忠信) 금천군(倫)의 자
금평군(錦平君) 휘(諱) 팽(팽) 금남군(忠信)의 자
청하군(淸河君) 휘(諱) 한기(漢璣) 내시(內侍)로 임난 호성 공신
四명장(四名將)
경렬공(경렬공) 휘(諱) 지(지) 금성군(盛-성)의 손자
충장공(충장공) 휘(諱) 운(운) 장령공(희주-희주)의 5 세손
충무공(충무공) 휘(諱) 충신(충신) 경렬공(지-지)의 9 세손
양무공(양무공) 휘(諱) 봉수(봉수) 한림공(림-림)의 8 세손
하동정씨조상인물
정도정(鄭道正) : 신라말 하동호장(河東戶長)으로 단련향병하여왕건(王建)을 도와 고려건국에 큰공이 있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정손위(鄭遜位) : 고려 숙종,예종,인종,의종,명종의 오조(五朝)에 벼슬하여 지예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정세유(鄭世裕) : 고려 의종조 문과급제 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다.
정응(鄭 膺) : 고려 고종조 문과 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丞)과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 천도 후 외교사절로 송(宋)과 원(元)에 三차례 사신(使臣)으로 파견되었다.
정숙첨(鄭叔瞻) : 세유의 아들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거란의 침범에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출전 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 우(崔 瑀)의 장인이며 뒷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정국룡(鄭國龍) : 문충공(文忠公) 지연의 아버지로 문과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다. 평장사 공파의 모든 자손이 후손이 된다.
정지연(鄭芝衍) : 국룡의 장자. 중국어에 능통. 여러 차례 원(元)에 사신 하였으며 외교의 공이 컸다. 글과 그림에 뛰어나고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盛事)와 판선부사(判選部事)를 지내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렸다.
정난연(鄭蘭衍) : 지연의 아우. 과거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중경좌윤(中京左尹)에 추증되었다.
정안(鄭 晏) : 숙첨의 아들로 고려 고종조 학자, 음양,산술,의약,음률 등 모든 분야에 밝고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임명되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大藏經)의 일부를 부담 간행하기도 하였다. 집권 권신(權臣) 최항(崔沆)이 생질이었는데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비방하다가 미움을사 죽임을 당하였다.
정익(鄭 翊) : 고려조(高麗朝)에 흥위위 대호군(興威衛大護軍)을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유(鄭 宥) : 고려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였다.
정을귀(鄭乙貴) : 고려조(高麗朝)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정견(鄭 堅) : 고려(高麗)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정계(鄭 綮) :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하천군(河川軍)에 봉해졌다.
정지상(鄭之祥) : 원나라에 자주 왕래하다가 원나라에 머물던 강릉대군(江陵大君) 기(期: 공민왕)를 시종, 1354년(공민왕 3) 감찰지평(감찰지평)에 등용되었다. 호부시랑(戶部侍郞),뒤에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정승경(鄭承慶) : 고려 때 금오상주국(金吾上柱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정희(鄭 熙) : 호(號)는 묵은(默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76년(우왕 2) 문과(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391년(공민왕 2)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포은선생과 함께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다 해도(海島)에 9년간 유배 후 벼슬을 사양하고 절개를 지켰다.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으로 꼽히며 개성의 두문서원(杜門書院) 광주 화담사, 경현사에 배향되었다.
정지(鄭 地) : 고려(高麗) 호는 퇴암(退菴) 시호는 경열(景烈)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 예의판서(禮儀判書) 전라도 순문사(巡問使)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하고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화포(火砲)를 실전에 활용 여러 차례 왜구와 왜적함선을 격파 대승하였다. 큰 공으로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 都指揮處置使)에 오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되었다. 광주 경열사(光州景烈祠)에 배향되고 우리나라 해군(海軍)의 아버지로 일컫는다.
정경(鄭 耕) : 고려(高麗) 경열공 지(地)의 아들 문과(文科)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위시 의주,안동,전주 등 7개도 관찰사를 지냄.
정혼(鄭 渾) 초명은 종(從), 지상(之祥)의 아들, 전리 좌랑(典理佐郞)으로 있다가 모친이 왜구(倭寇)에게 살해되자 복수책(復讐策)을 상소하고 출전(出戰)을 자칭하여 소모 별감(召募別監)이 되었다. 1389년(창왕 1) 박 위(朴 葳)를 따라 종군, 쓰시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고 조선이 건국되자 전리 좌랑(典理佐郞)이 되었다.
정희수(鄭希周) 고려(高麗) 때 장령(掌令)을지냈다.
정현(鄭 賢) 고려(高麗) 때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정현우(鄭賢佑) 고려(高麗)에서 전객령(典客令)을지냈다.
정복주(鄭福周) 조선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였다.
정초(鄭 招) ?~1434(세종 16) 자(字)는 열지(悅之),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집의(執義) 희(熙)의 아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그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를 거쳐 우사간(右司諫)이 되고 1419년(세종 1) 공조와 예조의 참의(參議), 우대언(右代言), 이듬해 좌대언(左代言), 1422년 예조 참판을 지낸 뒤 다음해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나갔다.
그뒤 형조 참판(刑曹參判)․이조 참판(吏曹參判)․좌군총제(左軍摠制)이조판서(吏曺判書)를 역임, 1430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서 왕명으로「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撰)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다음해 다시 왕명으로「회례문무악장 (會禮文武樂章)」을 찬진(撰進), 이어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필요한 이론적 자료를 여러 고전에서 수집했다. 1433년 이 천(李 蕆)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했으며「삼강행실도발(三綱行實圖跋)」을 편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역산(曆算)․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세종성업(世宗盛業)의 큰기둥이었다. 괴산(槐山) 문경사(文景祠) 광주화담사 배향
정제(鄭 提) 희(熙)의 셋째 아들.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 지경연사(知經筵事)하원군(河原 君)에 봉해졌다.
정인지(鄭麟趾) 1396(태조 5)~1478(성종 9) 자(字)는 백휴(伯睢), 호(號)는 학역재(學易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현감(石城縣監) 흥인(興仁)의 아들. 권 우(權 遇)의 문 인. 14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예빈시 주부(藝賓寺主簿)․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142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이해 좌필선(左弼善), 부제학(副提學)․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되었다.
대제학 정 초(鄭 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했으며, 1432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다가 1439년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 이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1442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 1443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설치되자 제조(提調)를 지내고 1445년 우참찬(右參贊)으로「치평요 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했다.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 공조판서․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1452년(문종 2)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전임, 1453년(단종 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계유정난(癸酉靖亂)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副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었으며, 1468년(세조 14) 남 이(南 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서정(庶政)을 총괄,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 천문(天文)․역법(曆法)․아악(雅樂)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金宗瑞)등과「고려사(高麗史)」를 찬수(撰修),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成三問)․신숙주 (申叔舟) 등과「훈민정음(訓民正音)」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 제(權 踶)․안 지(安 止) 등과「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정문언(鄭文彦) 조선조(朝鮮朝)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정수충(鄭守忠) 1401(태종 1)~1469(예종 1) 자(字)는 경부(敬夫),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제(提)의 아들. 경사(經史)에 박통하여 왕명으로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선발되어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 세종의 아들)에게 학문을가르쳤다.
1439년(세종 21)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었고, 145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부교리(副校理) 성균사예(成均司藝)를 거쳐, 1455년(세조 1)에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이 되었다.
이듬해 사성(司成)으로 역대병요(歷代兵要)르 편찬하고 훈련원제조(訓練院提調)로 많은 무장(武將)을 취거(取擧)하였다. 1457년 제학(提學)으로서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지냈다.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63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대구의 청백서원(淸白書院) 광주(光州)화담사 청주(淸州) 청절사(淸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운(鄭 耘)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정송(鄭 松) 조선조(朝鮮朝)에 의주(義州)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정화(鄭 和) : 수충(守忠)의 장자(長子) 사마시(司馬試) 합격하고 원주판관 보성군수를 지내고 보성향교에 유애비(遺愛碑)가 서있다.
정직(鄭 稷) : 수충의 차자로 상서원판관과풍덕군수를 지냈다.
정목(鄭 穆) : 수충의 四남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보은군수 등을 거쳐 광주유수(廣州留守)에 오르다.
정적(鄭 積) : 수충의 五男 문과(文科) 후 첨정(僉正)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부사(府使)를 역임.
정세(鄭 稅) : 수충의 八男. 사마생원시(司馬生員試) 합격 후 수의부위(修義副尉)로 팔공신회맹제(八功臣會盟祭)에 참가하고 성종18년 왕의 특별전교로 진위장군 충순위(忠順衛) 호군(護軍)에 오르다.
정림(鄭 霖) : 묵은 정희(鄭熙)의 종손(宗孫)으로 한림(翰林)으로 상소하다. 평북 철산(鐵山)으로 귀양 간바 그곳에 정착 뒷날 자손이 번창 창성하여 통칭 철산 정씨(鐵山鄭氏)로 불리우고 4서원(四書院) 6충려(六忠閭) 10효열정(孝烈旌)이 있어 숙종대왕이 관서대반(關西大班)이라함.
정숭조(鄭崇祖) 자(字)는 효숙(孝叔), 호(號)는 삼성재(三省齋), 시호(諡號)는 장정(莊靖), 영의정 인지(麟趾)의 아들.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듬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경기도 진휼사(京畿道賑恤使)가 되고, 1486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뒤 1489년 하남부원군(河南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경상좌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현조(鄭顯祖) 시호(諡號)는 편정(編玎), 영의정 인지(麟趾)의 아들, 세조(世祖)의 사위.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결혼하여 하성위(河城尉)에 봉해지고, 하성군(河城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온양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468년(세조 14)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올랐다.
정경조(鄭敬祖) 조선(朝鮮)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여창(鄭汝昌)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자(字)는 백욱(伯勗), 호(號)는 일두(一蠹),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侯) 육을(六乙)의 아들. 함양(咸陽)출신.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고, 한동안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 (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되었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경사 (經史)에 통달하고 역행실천(力行實踐)을 위한 독서를 주로 했다.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箸)」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 지금의 정 구(鄭 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광해군(光海君) 때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居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소종(鄭紹宗) 자(字)는 중적(仲籍), 조선 때 대교(待敎)를 지냈다.
정사종(鄭嗣宗) 자(字)는 맹적(孟籍),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세호(鄭世虎)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서계(西溪), 시호(諡號)(諡號)는 효간(孝簡). 조선조(朝鮮朝)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정희안(鄭希顔) 조선조(朝鮮朝)에도사(都事)를 지냈다.
정욱(鄭 彧)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지냈다.
정희적(鄭熙績)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정광적(鄭光績) 조선에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냈다.
정검(鄭 儉) 수충(守忠)의 5세손(世孫),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 헌(趙 憲 : 중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戰死)하였다. 그의부인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검(儉)의 누이 동생인 양탁연(楊卓然)의처(妻)와 함께 산속에 피신하였다가 왜병(倭兵)에 체포되어 포로가 되자, 정조(貞操)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니 조정(朝庭)에서는 남편 검(儉)의 충신정려(忠臣旌閭)와 함께 두 여인에게 열녀정려(烈女旌閭)를 세워 주었다.
정운(鄭 運) 1543(중종 38)~1592(선조 25) 자(字)는 창진(昌辰),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응정(應禎)의 아들, 영암(靈巖) 출신.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웅천 현감(熊川縣監)․제주 판관(濟州判 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녹도 만호(鹿島萬戶)로 좌수영(左水營) 앞바다 싸움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선봉(先鋒)이 되어 여러차례 해전에서 대전과를 올리고, 부산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에 추증되었으며 공의 위패는 해남 충절사, 순천 충무사, 광주 무광사, 영암 모산사에 제향되었고 전남장성의 상무대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정권(鄭 權) : 호는 죽은(竹隱) 진사(進士) 현감 익찬(翊贊) 단종(端宗) 절신(節臣)으로 세조가 부르나 끝까지 출사(出仕)치 않음. 묵은 정희후손
정응린(鄭膺麟) : 무과(武科) 현감 훈련원 부정(副正) 오위도 총부 도사(都事)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여주 고라산(古羅山) 전투에서 순절(殉節) 병조참판(兵曺叅判)의 증직과 충신정려(忠臣旌閭) 三자(三子) 괄(括) 四자 일(逸) 또한 함께 순절(殉節) 묵은 정희후손
정적(鄭 迪) : 참판공 응린의 아들 문과(文科) 한성부판관(判官) 아버지 참판공의 복수를 위한 활동과 군량미 조달 공로로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됨.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추증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가 세워졌으며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 또한 절사(節死)하여 열여정려(烈女旌閭)가 세워져 一가 충효열(一家忠孝烈)의 삼강문(三綱門)이 세워졌다.
정회(鄭 繪) : 조선 선조조 유학자. 임진왜란시 의병장 우산(牛山) 안방준과 의병을 일으켜 여러차례 승전 후 정유재란시 보성 정자강 전투에서 순절 증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 兵曹判書兼知經筵事)하고 군민이 순의비(殉義碑)를 세움.
정운룡(鄭雲龍) 자(字)는 경우(慶遇), 호(號)는 하곡(霞谷), 주부(主簿)집(輯)의 아들. 장성(長城) 출신. 기대승(奇大升)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 박 순(朴 淳)․고경명(高敬命) 등과 학문을 닦았으며 정 철(鄭 澈)과 교유(交遊)가 깊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다가 죽은 후 앞서 그가 정여립에게 보낸 절교문(絶交文)을 읽은 왕에 의해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1592년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을 지내고 고창 현감(高敞縣監)에 이르렀다. 승지(承旨)에 추증(追贈), 장성(長 城)의 모암서원(慕庵書院), 고창(高敞)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적(鄭 積) : 호는 효우제(孝友齊) 임진왜란시 형이 의병으로 왜군과 싸우다 죽고 중형(仲兄)은 왜군에 잡혀가자 형을 찾고저 일본으로 건너가 8년간이나 일본 각지를 찾다가 못찾고 돌아옴.당시 썼던 왜국일기(倭國日記)가 있어 당시 일본의 여러사정이 기록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됨. 선조께서 칭찬하고 효우제(孝友齊)라는 어사호(御賜號)를 나리고 전라감영을 시켜 음식물을 나림.
정길(鄭 佶) : 호는 난곡(蘭谷) 퇴계(退溪) 제자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의 수제자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동 전란 후 소실된 많은 책을 간행하고 후학을 가르침 보성 산양오현(山陽五?)의 으뜸으로 칭함. 오현사(五賢祠)에 배향되고 난곡집(蘭谷集)이 있음.문절공(文節公) 수충 후손 난곡집2권
정응두(鄭應斗) 조선조(朝鮮朝)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정입(鄭 雴) 광해(光海)조에 문과(文科) 호는 고암(顧菴)홍문관교리 부호군 군자감정(軍資監正) 정씨족보설과 삼정동관전(三鄭同貫傳)의 저서가 있다.
정기남(鄭奇男) 1592년(선조 25) 무과에 급제하고, 이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 그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거쳐 김해(金海)․부령(富寧)․창성(昌城)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1618년(광해군 10) 명(明)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이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출전할 때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좌위장(左衛將)으로 출전하여 선봉(先鋒)에 나서서 싸우다 포로로잡혀 끝까지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그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있다.
정간(鄭 諫) : 조선조 초 유학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비순위(備巡衛) 우령낭장(右領郎將)과 별제(別提)를 지냄.
정소(鄭 韶) : 조선조 유학자 세조조에 학덕이 높아 천거되어 흡곡 현령과 고산(高山) 석성(石城) 두 고을의 경시서령(京市署令)을 지내고 옥천에 정착하니 오늘이 예부공파 옥천 세거지의 시작이 되었다.
정여해(鄭汝諧) : 조선조 유학자 호는 돈제(豚薺) 진사(進士) 문헌공 정여창과 함께 점필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움. 삭주(朔州)교수와 사헌부 지평(持平)에 승진 무오사화 이후 은거 문집이 있고 하동 악양의 덕은사(德隱祠)에 배향
정기린(鄭麒麟) : 호 백자(白字) 경열공 후손 시호는 충열(忠烈) 무과합격. 오위좌부장(五衛左部將)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와 진주성싸움에서 분전 통정대부로 승차하고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나림
정문손(鄭文孫) : 조선조 유학자 호는 모효제(慕孝齊) 장령공 희주(希周)의 증손 진사(進士) 학덕과 효행(孝行)으로 이름 높다. 효자정려(孝子旌閭)와 문집이 있다.
정열(鄭 悅) : 호는 죽헌(竹軒) 경열공 후손 임진왜란시 의병장 공로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좌부장(左部將) 겸 호군(護軍)을 제수 되었으나 전사 시호를 충민(忠敏)으로 나림
정대민(鄭大民) : 문헌공의 후손 학덕으로 천거되어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 사헌부 감찰(監察) 운봉 곡성 장수 현감 임진왜란에 순절(殉節)
정수민(鄭秀民) : 조선조 유학자 문헌공 후 학행으로 천거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에 제수.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 문헌공의 유적을 모아 문헌공 실기 간행하고 평생을 문헌공의 학문과 저술을 수집 편찬. 화개도(花開圖)의 저작과 춘수당집이 있으며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고 도곡서원(道谷書院) 배향
정윤헌(鄭胤獻) : 문헌공 8 세손 학덕으로 천거 명릉 참봉. 선공감 봉사(奉事) 정희량(鄭希亮)의 역란에 창의(倡義)하여 선봉으로 큰공을 세움 의금부 도사(都事) 연풍현감에 승진. 이조참의(吏曹參議) 증직과 충신정려(忠臣旌閭) 당시 역란에 창의분전한 공의 일가 9명의 충신정려인 九충각(九忠閣)이 함향에 있다.
정사온(鄭思溫) 자(字)는 직이(直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무(允武)의 아들. 1586년(선조 19) 효행(孝行)으로 추천받아 참봉 (參奉)이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군량수송을 담당했다.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책례도감 낭청(冊禮都監郎廳)이 되고, 이어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부임했다가 63세로 병사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정희운(鄭熙運) 자(字)는 태오(泰吾), 호(號)는 동봉(東峰). 조선(朝鮮)때 의병(義兵)으로 활약을 하였다.
정봉수(鄭鳳壽) 1572(선조 5)~1645(인조 23) 자(字)는 상수(祥叟), 시호(諡號)는 양무(襄武). 1592년(선조 25) 무과(武科)에 급제, 이해 임진왜란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하여 부장(部將)이 되고,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감찰(監察)․영산 현감(靈山縣監)을 역임, 1605년 무안현 대장(務安縣大將)으로 흑산도(黑山島)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 6명을 참획(斬獲)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 흩어진 병사를 수습, 철산(鐵山)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후금(後金)의 병사 반수 이상을 살해하고 포로로 된 백성 수천 명을 구출, 그 공으로 철산 부사(鐵山府使)에 특진되고, 이어 용천 부사(龍川府使)로 방어사(防禦使)․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겸직, 적이 철수한 뒤 구성 부사(龜城府使)․개천 군수(价川郡守)․오위장(五衛將)․부총관(副摠管)을 거쳐, 163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고, 경상도․전라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163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부총관․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을 겸임했다. 철산의 충무사 (忠武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택뢰(鄭澤雷) 1587(선조 20)~? 자(字)는 휴길(休吉), 호(號)는 화강(花岡), 시호(諡號)는 충결(忠潔), 인지(麟趾)의 후손. 현감(縣監) 득열(得悅)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17년(광해군 9) 이이첨(李爾瞻)이 정조(鄭 造)․윤 인(尹訒)․이위경(李偉卿)을 사주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제기하자 그 부당함을 논하다 화를 입게 된 이원익(李元翼)을 극력 변호, 이이첨 일당을 죽일 것을 상소하여 모친 강(姜)씨와 함께 남해(南海)에 유배,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지평(持 平)에 추증(追贈), 부여(扶 餘)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기수(鄭麒壽) 자(字)는 영수(靈叟),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봉수(鳳壽)의 동생. 무예에 뛰어나고 경사(經史)에도 정통했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형과 함께 용골성(龍骨城)에 들어가 반장(叛將) 장사준(張士俊)을 죽이고 적의 진격을 저지, 그 공으로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에 이어 사도시 판관(司䆃寺判官)이 되고, 앞서 영유 현령(永柔縣令)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순찰사(巡察使) 홍명구(洪命耈)의 협수장(協守將)이 되어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활약, 뒤에 문화 현령(文化縣令)․강서 현령(江西縣令)을 지내고 84세로 죽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철산(鐵山)의 충무사(忠武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시창(鄭始昌) 조선(朝鮮) 무과합격 판관(判官)을 역임. 양무공 정봉수와 청군을 수차 격파하고 전사. 병조참의를 증직하고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있다.
정경운(鄭景雲) 자(字)는 소성(昭聖), 호군(護軍) 학수(鶴壽)의 아들.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중부(仲父) 봉수(鳳 壽), 계부(季父) 인수(麟壽)와 함께 의거(義擧), 용골성(龍骨城)에 들어가 활약하고 그 공으로 선공감 주부(繕工監主簿)가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는 두 동생을 이끌고 웅골성(熊骨城)에서 적의 침공을 격퇴하여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승진했다. 양차 호란에 함께 참전한 두 동생 경문․경방과 함께 삼영(三英)이란 칭호를 받았다.
정경문(鄭景雯) 자(字)는 시성(時聖), 호군(護軍)학수(鶴壽)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형경운(景雲)을 따라 출전, 용골성(龍骨城)에서 공을 세워 형과 함께 선공감 주부(宣工監主簿)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는 웅골성(熊骨城)을 지킨 공으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청천강(淸川江) 이북 19주(州)에 있는 성묘(聖廟)의 위판(位版)을 썼다.
정복길(鄭復吉) 조선조(朝鮮朝)에 장령(掌令)을 지냈다.
정홍서(鄭弘緖) 자(字)는 극승(克承), 호(號)는 송탄(松灘). 조선(朝鮮)때 성균관 학정(學正)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 남계서원 별묘(別廟) 배향
정세보(鄭世輔) 조선(朝鮮) 때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였다.
정경흠(鄭慶欽) 1620(광해군 12)~1678(숙종 4) 자(字)는 선숙(善叔), 호(號)는 육오당(六吾堂), 인지(麟趾)의 후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50년(효종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학문에 전심, 특히 예론(禮論)에 밝았다. 그림에 뛰어나 인물․난 초․포도․매화․대(竹)을 잘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황여도(皇輿圖)」,「동여도(東輿圖)」를 편찬했다.
정충엽(鄭忠燁) 자(字)는 일장(日章)․아동(亞東), 호(號)는 이호(梨 湖)․이곡(梨谷), 벼슬은 내침의(內針醫)를지냈다.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그림은 정 선(鄭 歚)의 화법(畵法)을 따라 산수화(山水畵)에 능했고 강세황(姜世晃)과 친분이 두터웠다.
정유점(鄭惟漸) 1655(효종 6)~? 자(字)는 사홍(士鴻), 호(號)는 곡구(谷口), 경흠(慶欽)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 1693년(숙종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1697년(숙종 2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고장령(掌令)․문학(文學)․필선(弼善)․보덕(輔德)․사간(司諫) 등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그림에도 능하여 포도․인물(人物)을 잘 그렸다.
정유승(鄭惟升) 호(號)는 취은(醉隱), 경흠(慶欽)의 아들. 벼슬은 현감 (縣監)을 지내고, 그림을 잘 그려 1713년(숙종 39)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숙종의 초상화를 그렸다. 포도와인물(人物)을 잘 그렸다.
정빈(鄭 贇) 조선조(朝鮮朝)에 전적(典籍)을 지냈다.
정동리(鄭東里)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역임하였다.
정시숙(鄭時淑)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지냈다.
정동윤(鄭東潤) 조선(朝鮮)에서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정종주(鄭宗周)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오도(鄭吾道) : 조선 숙종조 성리학자. 자(字)일관(一貫) 호(號) 약포(藥圃) 우암 송시열의 제자. 부호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다.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고 장희빈을 내치고 서정세신에 관한 만언소(萬言疏)로 유명. 이조판서(吏曹判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증직하고 광주 지산사(芝山祠) 화담사(花潭祠)에 배향 약포집(藥圃集) 五권과 출생지 광주 오치동에 기념 공원이 세워졌다.
정덕명(鄭德鳴) 자(字)는 윤보(潤甫), 지형(之亨)의 아들. 1719년(숙종 45)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위원 군수(渭原郡 守)로 부임, 군비(軍備)의 확충에 공을 쌓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어영청 파총(御營廳把摠)으로 전공을 세워 충청도 우후(忠淸道虞候)가 되었다.
뒤에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1755년(영조 31) 황해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올랐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정덕재(鄭德載) 자(字)는 중즙(仲楫). 1725년(영조 1)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오위장(五衛將)․길천 목사(吉川牧使) 및 방어사(防禦使)를 거쳐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좌영장(左榮將) 등을 역임하였다.
정후교(鄭後僑) 1675(숙종 1)~1755(영조 31) 자(字)는 혜경(惠卿), 호(號)는 국당(菊塘), 부호군(副護軍) 태건(泰建)의 아들. 정주(定州) 출신. 고서(古書)에 통하고 특히 시(詩)에 뛰어나 당시의 문인(文人) 신정하(申靖夏)와 서로 수창(酬唱)했고, 김삼연(金三淵)으로부터 당시(唐詩)의 절묘(絶妙)를 재현시켰다는 격찬을받았다.
1714년(숙종 40) 여러 유생들과 상소하여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봉안한 정주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리게 했고, 1719년 황 선(黃 璿)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갈 때 동행하여 시명(詩名)을 일본에 까지 떨쳤으며, 1727년(영조 3)에 황 선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 使)로 부임하자 그 막좌(幕佐)가 되었다. 1729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진했으나 연로하여 사퇴했다.
정상기(鄭尙驥) 1678(숙종 4)~1752(영조 28) 자(字)는 여일(汝逸), 호(號)는 농포자(農圃子), 영의정 인지(麟趾)의 후손. 이 익(李 瀷)의 문인. 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踏査),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하여「팔도도(八道圖)」를 제작, 역대 국경의 변천의 역사 지리학적인 검토를 기도했고,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 강계(北間島彊界), 궁실(宮室) 등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기술했다.
특히 산천의 기사(記事)는 자연지리학적 관점에서 논술하여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 안목을 보여 주었으며 토지개혁에서 부터 병사(兵事)․산업(産業)․재정(財 政)․의약(醫藥)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도에서 연구했다. 실학파 가운데 이익을 종조(宗祖)로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병약하여 과거를 단념, 집에서 학문연구에 일생을 보냈으며, 만년에 아들 항령(恒齡)이 왕을배종한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정징세(鄭徵世)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동혁(鄭東赫) 조선(朝鮮)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언필(鄭彦弼)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항령(鄭恒齡) 1700(숙종 26) ~ ? 자(字)는 현로(玄老). 1743년(영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747년에 검열(檢閱)․지평(持平)을 역임, 1756년 정언(正 言), 이듬해 장령(掌令)으로 어제(御製)「상훈연성(常訓衍成)」을 필사하여 상으로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1762년 장연 부사(長淵府使)로 재직중 해서 암행어사(暗行御史) 신익빈(申益彬)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가 곧 기용되어 이듬해 사간(司諫), 1767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실학자(實學者)로서 특히 지리학 (地理學)을 깊이 연구했고 백리척(百里尺) 지도인「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 1757년 영조가 이 지도를 보고 그 면밀․상세함에 감탄하고 홍문과(弘文館)에 그 1부를 모사(模寫)하게 했다.
정충언(鄭忠彦)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기환(鄭基煥) 조선에서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정홍덕(鄭弘德) : 초명 수덕(粹德) 영조(英祖)조에 문과(文科) 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합격 글씨에 뛰어나고 교리(校理) 사과(司果) 보은 군수(郡守)를 지냄. 아들 취성(冣成)취행(冣行)의 동방급제로 부자 4문과(四文科)로 유명.문절공(文節公)수충 후손
정취성(鄭冣成) : 홍덕의 장자 정조(正祖)조 문과(文科) 정언(正言)을 거쳐 승지(承旨)를 지냄
정취행(鄭冣行) : 홍덕의 차자 정조(正祖)조 문과(文科) 글씨로 이름 높고 양사정언(兩司正言)과 지평(持平)을 지냄.
정전(鄭 篆) 조선(朝鮮) 문과급제 장령(掌令)을 지내고 철산 족보를 편찬함.
정협(鄭 悏): 호는 지족당(知足堂) 숙종(肅宗)조 진사(進士) 시문(詩文)에 뛰어나 이름 높다. 평양 서윤(庶尹) 남원부사 원주목사 등 여덟 고을 목사(牧使) 문집 10권. 1635년 하동정씨 정승공파 첫 족보편찬.
정호필(鄭濩弼) : 호는 매와(梅窩)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조행이 높아 통덕랑(通德郞)에 오르고 유고집 매와집(梅窩集)이 있다.
정명동(鄭鳴東) : 호는 소은(小隱) 정조(正祖) 경신(庚申)에 특명으로 첨중추(僉中樞) 도총부 오위장(都摠府五衛將)에 제수되고 말 한필을 하사 귀향 케함.
정윤길(鄭潤吉) : 호는 송월당(松月堂) 정조(正祖)조 사마진사(司馬進士) 어정책교정(御定冊校正)을 맏고 정조의 특명으로 시부(詩賦)를 지어 올려 어고부(御考賦)로 전함. 학행(學行)이 뛰어난 효자(孝子)로 효자정려(孝子旌閭) 사헌부 지평(持平)에 증직되고 송월당집(松月堂集) 二권과 농서(農書)의 저서가 있다.
정덕필(鄭德弼) : 호는 취은(醉隱) 생원(生員)시에 합격 관학(館學)에 유학 때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상을 받음. 영조(英祖)조에 문과(文科) 예조정랑(禮曹正郞) 이조좌랑(吏曹佐郞) 정언(正言)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치는 동안 매서운 상소로 직신(直臣)으로 이름나다.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광주에 어필각(御筆閣)이 있다.
정재요(鄭在堯) : 호는 은월(隱月) 헌종(憲宗)조. 문장가,설금록(雪金錄)과 시(詩) 300여수가 수록된 은월집(隱月集)이있고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에 증직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나렸으며 부인 밀성박씨(密城朴氏)는 숙부인(淑夫人)에 특증(特贈)하고 열여정려(烈女旌閭)를 나라에서 세웠다.
정현도(鄭顯道) : 영조(英祖)조에 문과(文科) 사헌부 감찰(監察)과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냄. 철산인
정경한(鄭敬翰) : 정조(正祖)조에 문과(文科) 현감 도사(都事)를 지냄. 철산인
정현박(鄭顯璞) : 순조(純祖)조에 문과(文科) 3주 도호부사(三州都護府使)와 호조참의(戶曺?議). 철산인
정의명(鄭義命) : 순조(純祖)조에 문과(文科) 평안도사(平安道事)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철산인
정리해(鄭利海) : 순조(純祖)조에 문과(文科) 홍문관 전적(典籍)과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지냄. 철산인
정의각(鄭義恪) : 순조(純祖)조 문과(文科) 현감을 거쳐 장령(掌令)에 오르다. 철산인
정하경(鄭厦慶) : 순조(純祖)조에 문과(文科) 찰방(察訪) 현감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에 오르다. 철산인
정항진(鄭恒鎭) : 고종(高宗)조 문과(文科) 정언(正言) 부사(府使) 철산인
정익주(鄭益周) : 고종(高宗)조 문과(文科) 교리(校理) 지평(持平) 철산인
정내홍(鄭來鴻) 언용(彦勇)의 손자. 1811년 (순조 11) 홍경래(洪景來)가난을 일으키자 적정(敵情) 탐지를 자원, 집의(執義)를 자칭하고 적에게 거짓 항복하여 철산(鐵山)․선천(宣川) 등지를 탐지했다. 후에 행영장(行營將)이 되어 허 항(許 沆)의 선봉으로 용천(龍川)을 탈환, 이어 정주(定州)에서 공을 세웠으며, 허 항이 전사하자 대신군사를 지휘, 그 공으로 우후(虞侯)가 되고, 뒤에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의주(義州)의 학봉사(鶴峰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사검(鄭思儉) 자(字)는 직제(直制). 조선 때 의병(義兵)활동을 하였다. 충신정려(충신정려)와 함께 병조참의(병조참의) 중직
정의림(鄭義林) 호(號)는 일신재(日新齋). 조선 때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으며, 저서(著書)로는「일신재집(日新齋集)」을 남겼다.
정은채(鄭殷采) 한말(韓末)에 의금부 도사 (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정상현(鄭相鉉) 1873년(고종 10) 무과에 급제한 후 1902년(광무 6)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순만(鄭淳萬) 1902년(고종 39)에 덕신학교(德新學校)를 설립하였고, 소련해참위신한(蘇聯海參威新韓)의 독립 지사(志士)와 결속하여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적극 노력했으며 한때는 신한보 반대파(新韓報反對派)로 안창호(安昌浩)와 의견이 대립(對立)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