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담양전씨(潭陽田氏),담양전씨시조,전득시(田得時),담양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5-10 15:45 수정일 : 2019-08-28 11:12

시조 본관의 유래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시조(始祖) 전득시(田得時)는 고려 때 누대(累代)에 걸쳐 담양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 온 고을 향리(鄕吏)의 아들로 태어나 1155(의종 9) 현량(賢良)으로 천거되고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낸후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득시(得時)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6(六世)까지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 희경(希慶)의 아들 3형제 대()에서 맏아들 녹생(祿生)은 야은공파(埜隱公派), 둘째 귀생(貴生)은 뇌은공파(耒隱公派), 셋째 조생(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갈리었다.


그 후 녹생(祿生)이 고려말의 명현(名賢)으로서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평리(問下評理) 등을 지내고 문신(文臣)이면서도 무예(武藝)에 뛰어나 문무전재(文武全材)란 칭을 받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고려 말에 삼사 좌윤(三司左尹)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한 그의 아우 귀생(貴生)과 참지정사를 역임한 조생(祖生)은 모두 문장(文章)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께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귀생(貴生)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祖生)은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서<두문동 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올랐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삼은전선생(三隱田全生)>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담양읍(全羅南道潭陽邑) 향교(鄕校) 앞에 <삼은전선생유허비(三隱田善生遺墟碑)>가 전해지고 있다.


담양 전씨(潭陽田氏)는 이들 3형제 후손에서 많은 인물(人物)이 배출되었는데 야은공파(埜隱公派) 녹생(祿生)의 후손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우()가 이율곡(李栗谷)송시열(宋時烈)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뇌은공파(耒隱公派)에서는 귀생(貴生)의 아들 한()이 중랑장(中郞將), 손자 묘()가 소윤(少尹)을 역임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가종(可種)이 군수(郡守), 가식(可植)이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으며 구주(九疇)는 중종(中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춘추관 지제교(春秋館知製敎)까지 지낸 후 문명(文名)을 날렸다.

경은공파(耕隱公派) 조생(祖生)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순()()()()가 뛰어났으며, 세조(世祖)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로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진 균()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한 여림(汝霖),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삼옥태수(三玉太守)란 칭송을 들은 벽(), 임진왜란 때 아들 득우(得雨)와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된 윤()등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담양전씨(潭陽田氏)는 남한(南韓)155,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양(潭陽)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995(고려 성종 14)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후에 담양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 1199(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공양왕 3)에는 율원현(栗原縣)을 병합하였다.

1395(태조 4)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399(정종 1)에 부로 승격하고, 1413(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나, 1728(영조 4)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1895(고종 32)에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914년에 창평군(昌平郡)이 폐지되자 담양군(潭陽君)에 병합되었다. 1943년에 담양면이 담양읍(潭陽邑)으로 승격되었다.


역대인물(歷代人物)-담양전씨조상인물

전자존(田子存) ()는 성부(誠夫), 시호(諡號)는 정안(靖安). 고려조(高麗朝)에 판전교시사(判典校)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전승윤(田勝允) ()는 경숙(敬淑). 1237(고종 24) 과거에 급제하여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고양군(高陽君)에 봉군되었다.

전공일(田公逸) 1248(고종 35)1308(충렬왕 34) 자(字)는 중청(中淸),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고려 때 간의대부(揀議大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고 흥양군(興陽君)에 봉군되었다.

전영(田 永) 1278(충렬왕 4)1352(공민왕 원년) 자(字)는 정길(貞吉), 시호(諡號)는 인열(仁烈). 1309년(충선왕 원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사복시사(判司僕시事)를 거쳐 첨의 중찬(僉議中贊)을 역임하였다.

전희경(田希慶) 1299(충렬왕 25)1350(충정왕 2) 자(字)는 선려(善餘). 1330(충숙왕 1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봉랑(朝奉郞)에 올라 첨의사인(僉議舍人)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지영주사(知榮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339년(충숙왕 8) 첨의부(僉議府)에서 사인(舍人)으로 일할 때 당시 뜻을 같이 하는 홍 빈(洪 彬)․이 우(李 祐) 등과 임금에게 상소하여 원(元)나라를 섬기는 일이 옳지 않음을 강력히 탄원한 바 있었다.

천성(天性)이 학문을 좋아하고 법도 있게 자제를 교육하여 슬하의 세 아들이 이로서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겸하여 해동(海東)의 명문으로 일세를 드날렸다.

<야근공파(埜隱公派)>

전녹생(田祿生) 1318(충숙왕 5)1375(우왕 1) 자(字)는 맹경(孟耕), 호(號)는 야은(埜隱). 시호(諡號)는 문명(文明), 충혜왕(忠惠王)때 문과(文科)에 급제, 제주 사록(濟州司錄)․전교시 교감(典校寺校勘)을 지냈으며, 원나라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급제했다.

1347(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으로서 백문보(白文寶)와 함께 기삼만(奇三萬 : 기황후의 족제)을 옥사(獄死)케 하여 원나라 사신으로부터 국문(鞫問)을 당했으며, 1357(공민왕 6) 기거 사인(起居舍人)으로서 간의(諫議) 이 색(李穡), 사간(司諫) 이보림(李寶林)정 추(鄭樞) 등과 함께 염철 별감(鹽鐵別監)의 폐단을 상소하고, 1361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거쳐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갔다.

같은해 홍건적의 난 때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13632등 공신에 좌상시(左常侍)가 되고, 이듬해 감찰대부(監察大夫)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에게 예물(禮物)을 바치고 돌아와서 계림윤(鷄林尹)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67년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고, 1371년 동지공거(同知貢擧)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37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 부사(開城府使)문하 평리(門下評理)등을 역임, 추충찬 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이 되었다.

1375(우왕 1) 간관(諫官) 이 첨(李 詹), 전백영(全伯英)등이 북원(北元)의 배척과 이인임(李仁任)의 주살(誅殺)을 청하였다가 투옥된 사건에 연루, 장류(杖流) 도중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장흥(長興)의 감호사(鑑湖祠)에 제향되었다.

전화(田 和) ()는 치중(致中). 조선 때 선무랑(宣武郞)으로 도승(都丞)을 지냈다.

전항(田 恒) 1347(충목왕 3)1395(태조 4) 자(字)는 윤겸(允謙). 조선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전옥(田 沃) 조선(朝鮮)에서 감무(監務)를 지냈다.

전저(田 沮) 조선조(朝鮮朝)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다.

전예(田 藝) ()는 춘백(春伯), ()는 죽당(竹堂), ()의 아들. 1399(정종 원년) 향공학생(鄕貢學生)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죽은 후 숭정대부(崇政大夫)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전실(田 實) ()는 신보(信甫).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전석(田 碩)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전윤(田 潤)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식(田 湜)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전대생(田大生) ()는 쇠숙(衰淑).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전자우(田自禹)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우춘(田遇春)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전팽령(田彭齡)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세균(田世畇) 평안병사(平安兵使) 대생(大生)의 아들. 조선 때 충좌위(忠左衛)에서 군관으로 활약, 공을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제주 판관(濟州判官)이 되었다.

전세광(田世光) ()는 덕후(德厚). 조선조(朝鮮朝)에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전윤(田 潤) 조선(朝鮮)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전운(田 沄) ()는 사연(士演).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기(田 琦) ()는 경성(景聖).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경망(田景氵罔) 순천 판관(順天判官) 윤량(允良)의 아들.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지내고 병절교위(秉節校尉)가 된 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전상경(田象耕)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언용(田彦龍) 시호(諡號)는 충경(忠景), 상호군(上護軍) 필규(畢奎)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임금을 잘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전봉상(田鳳祥) 진사(進士) ()의 아들.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로서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전귀찬(田貴贊) 조선(朝鮮)에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전재성(田在聖) ()는 순경(舜耕), ()는 청천옹(聽天翁). 조선조(朝鮮朝)에서 학자(學者)로 명성(名聲)이 드높았다.

전우(田 愚) 1841(헌종 7)1922 자(字)는 자명(子明), 호(號)는 간재(艮齋). 당시의 거유(巨儒)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로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 임헌회(任憲晦) 문하(門下)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아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廷淳)과 함께 그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노론(老論) 학자들의 학통을 이어, 이 이(李 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 특히 이 이의 학설을 옹호했으나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양설을 모두 배척, 절충적인 경향을 취했다.

1882(고종 19)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그후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장령(掌令)순흥 부사(順興府使)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만년에는 전라도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전경용(田慶龍) 조선(朝鮮)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전한(田 漢)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추증되었다.

<뇌은공파(耒隱公派)>

전귀생(田貴生) ()는 중경(仲耕), ()는 뇌은(耒隱),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고려 때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했다. 고려가 기울어가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 갔다.

전한(田 漢)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추증되었다.

전묘(田 畝) 1350(충정왕 2)1418(태종18) 자(字)는 여백(汝百), 중랑장(中郞將) 한(漢)의 아들.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평주소윤(平州少尹)을 지냈다. 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전가종(田可綜) ()는 계양(繼陽). 조선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역임하고 가의대부(嘉義大夫)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전가식(田可植) ()는 미재(美哉), ()는 성암(省菴). 조선조(朝鮮朝)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전구주(田九疇) 1431(세종 13)1493(성종 24) 자(字)는 석우(錫禹), 호(號)눈 퇴암(退庵), 참봉(參奉) 사발(士發)의 아들. 문명(文名)으로 명성을 떨친 학자로서 1456년(세조 원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직강(直講)․사성(司成)을 거쳐 1467년(세조 12)에 석성군수(石城郡守)로 외직에 나갔다가 1478년(성종 9) 에는 청풍 부사(淸風府使)가 되었다.

만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 참의(吏曹參議)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자를 짓고 독서와 문학으로 여생을 보냈다.

전윤평(田允平)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다.

전윤복(田允福)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 하였다.

전의손(田儀孫) 조선(朝鮮)에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전경손(田敬孫) 조선조(朝鮮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전숭조(田崇祖)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전좌명(田佐命) ()는 충언(忠彦), ()는 성암(性菴). 조선(朝鮮)에서 부승지(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전목(田 穆) ()는 영숙(潁叔), ()는 장계(章溪). 조선(朝鮮) 때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전자명(田自明) 조선(朝鮮)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전숙례(田淑禮)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윤필(田胤弼)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전윤무(田胤武) ()는 의연(毅然), ()는 가정(價亭). 조선에서 효행으로 천거되어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다. 선산(善山)의 무동서원(茂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전갱(⺼更) 장사랑(將仕郞) 응예(應藝)의 아들. 조선에서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서 공을 세우고 영국 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전창(田 菖) 조선(朝鮮)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전성남(田成男)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계남(田繼男) ()는 여술(汝述), ()는 만은(晩隱).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전욱(田 稶) ()는 영백(英伯). 조선(朝鮮)에서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전수기(田秀基) ()는 만서(萬瑞).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전하진(田廈鎭) ()는 국파(菊坡). 조선(朝鮮) 때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전성근(田性根) 조선조(朝鮮朝)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경은공파(耕隱公派)>

전조생(田祖生) ()는 계경(季耕), ()는 경은(耕隱), 시호(諡號)는 문원(文元). 1351(충정왕 3) 충정왕(忠定王)이 강화(江華)에서 공민왕(恭愍王)에게 손위(遜位)하자 박사신(朴思愼)신덕인(申德隣) 등과 충정왕을 호종(扈從)하고는 은거했다. 의령(宜寧)의 태암 서원 (泰巖書院), 영천(永川)의 소계사(蘇溪祠) 등에 제향되었다.

전순(田 順) ()는 공신(公信), ()는 양곡(陽谷). 성품이 관인후덕(寬仁厚德) 하였고 풍채가 영특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매번 조정에서 받는 봉급(俸給)을 가난한 친척들에게 보내어 주고 지면이 있는 극빈 자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권문세가(權門勢家)와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권세에 아부할 줄 몰랐으며 공사(公私)가 엄정(嚴正)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그도량은 바다같이 널고, 그 덕은 태산같이 높아 실로 군자의 태도가 완연하도다. 세상만민의 빈약함에서 구제하는 데는 좋은 업복(業福)이 되도다라고 하였다. 벼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과천군(果川君)에 봉군되었다.

전엄(田 渰) 1356(공민왕 5)1421(세종 3)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라 보령 현감(保寧縣監)을 역임하였다.

전회(田 澮) ()는 인택(仁澤).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였다.

전개(田 漑) ()는 시지(時之). 조선 때 별좌(別坐)를 지냈다.

전자수(田子壽) ()는 백인(伯仁). ()는 회정(晦亭)월호(月湖), 과천군(果川君) ()의 아들. 태어날 때부터 걸출(傑出)하였고 성품이 과묵하였으며 순수하여 학문 연마에 독실하였다. 좌사간(左司諫)으로 있을 때는 직책의 고하를 막론하고 비행(非行)을 여지없이 지적하고 탄핵(彈劾)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전봉우(田逢雨) ()는 윤보(允甫), 과천군(果川君) ()의 아들. 1382(우왕 8) 8월에 김장혁(金長赫)과 함께 강계(江界)에 와서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마을을 이루어 위천호(衛千戶)가 되고 후엔 만호가 되었다. 장남 득로(得露)와 강계를 다스렸고, 뒤엔 부사(府使)에 임명되어 한때는 중앙에 나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전윤확(田允穫) 조선(朝鮮)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전윤질(田允桎) 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전익(田 益) ()는 형언(亨彦).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보(田 普) ()는 광화(光華).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실(田 實) ()는 약허(若虛), ()는 귀재(龜齋).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충(田 忠) 1405(태종 5)1450(세종 32) 봉례(奉禮) 보원(甫原)의 아들.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 정순판사(正順判事)를 지냈다. 죽은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전균(田 畇) 1409(태종 9)1470(성종 1) 강화(江華) 출신. 내시부(內侍府)의 관직에 초임된 뒤 승진을 거듭하여 동첨내시부사(同僉內侍府事)를 거쳐 1452년(문종 2) 동지내시부사(同知內侍府事)가 되었다.

1453(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으로 강천군(江川君)에 봉해지고 1455년 세조의 왕위 계승에 협력,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8(세조 4)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승진, 1466년 하음군(河陰君)에 개봉되고 1468년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전부(田 富) ()는 경여(敬汝). 조선(朝鮮) 때 군기시정(軍器)을 지냈다.

전성우(田誠雨) ()는 시중(時中), ()는 하담(荷潭). 조선 때 전농시부위(典農寺副尉)를 지냈다.

전관(田 灌) 1493(성종 24)1553(명종 8) 자(字)는 관지(灌之), 참봉(參奉) 자수(自修)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만호(萬戶)를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으며, 사후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전여림(田汝霖) 1504(연산군 10)1553(명종 8) 자(字)는 사열(士說), 호(號)는 국헌(菊軒), 부사직(副司直) 옥(沃)의 아들. 1525년(중종 20) 중사마(中司馬)에 급제하고 1534년(중종 29)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가 되었다.

1536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병조 좌랑(兵曹左郞)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하고 1555(명종 10) 선산 군수(善山郡守)가 되어 3년간을 교화(敎化)하며 선정하여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으며 1558년 강화 부사(江華府使)가 되고 1564년에는 원주 목사(原州牧使)가 되어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다.

전봉(田 鳳) 1550(명종 5)1624(인조 2) 자(字)는 응상(應祥), 호(號)는 오재(梧齎), 통훈대부(通訓大夫) 여 즙(汝楫)의 아들. 1566년(명종 2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황해도 병마수군 절도사(黃海道兵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남양 고을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 때에 종형되는 찰방(察訪) 곤(鵾) 역시 남양에서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고원포(古院捕)까지 이른 적병을 계교로 유인 포위하여 화살과 돌로 섬멸하였다. 뒤에 도원수(都元帥) 권 율(權慄)의 휘하에서 종형, 아들 호(皞)와 함께 군량미를 운송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다시 1597년 왜군들이 재침해 왔을 때 북행하는 임금의 어가를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전수(田 秀) 조선(朝鮮)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다.

전탁(田 倬) ()는 대이(大而).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전서문(田瑞文) 조선(朝鮮)에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전송(田 松) ()는 예심(禮心). 조선(朝鮮) 때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냈다.

전대년(田大年)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전효선(田孝先) ()는 헌보(憲甫). 사온서 동정(司醞署同正) 운령(雲嶺)의 아들. 병절교위(秉節校尉)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후 조봉대부(朝奉大夫)통훈대부(通訓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전승회(田承澮) 조선(朝鮮) 때 부사직(副使直)을 지냈다.

전구복(田九福)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전학(田 鶴) 조선에서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전림(田 霖) 시호(諡號)는 위절(威節). 조선(朝鮮) 때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전훈(田 勳) ()는 원중(元仲), ()는 운암(雲菴).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전윤(田 潤) 1554(명종 9)1637(인조 15) 자(字)는 경윤(景潤), 호(號)는 야곡(埜谷), 직장(直長) 응진(應震)의 아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의 호위장(扈衛將)이 되어 임진강을 건넜다. 벼슬은 부총관(副摠管)에 이르고 호성원종(扈聖原從)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전자의(田自義)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전일경(田一頃) 조선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전담(田 聃)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전승주(田承)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역임하였다.

전승관(田承灌) 조선(朝鮮)에서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올랐다.

전승개(田承漑) ()는 개지(漑之), ()는 모재(茅齋). 조선조(朝鮮朝)에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다.

전유룡(田有龍) 1546(명종 원년)1615(광해군 7) 자(字)는 현경(現卿), 호(號)는 호봉(蒿峰), 참봉(參奉) 담(潭)의 아들. 어려서 외조부 도구(陶丘) 이제신(李濟臣)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 막하에서 싸웠고 초유사(招諭使)로 활약했다. 난이 끝난 후 그 공(功)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올랐다.

전백경(田百頃)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용양위 별시위(龍驤衛別侍衛)효력부위(效力副尉) 등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상(金天祥)장창수(張昌壽)주경안(朱景顔) 등과 같이 크게 활약하였다.

전호(田 皞) 1571(선조 4)1650(효종 원년) 자(字)는 호여(皞如), 호(號)는 서암(書岩), 병사(兵使) 봉(鳳)의 아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으로 부친과 함께 고원포(古院浦)에서 왜적을 섬멸 하는데 공(功)을 세웠고,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서 전적을 남겼다. 그후 권 율(權慄) 장군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 할거하여 적병과 접전할 때 치열한 전투속에서 적을 격살하고 대승하였다. 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전응방(田應邦) 적순부위(迪順副尉) ()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고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전유추(田有秋) 주부(主簿) 봉상(鳳祥)의 아들. 임진왜란 때 공을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 되었다.

전득우(田得雨) 1574(선조 7)1638(인조 16) 자(字)는 시재(時制), 호(號)는 송애(松厓), 부총관(副摠管) 윤(潤)의 아들. 1591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 파천(播遷)까지 호종(扈從)하는데 공을 세웠고 호남지방(湖南地方)을 순검(巡檢) 할 때 장수현(長水縣) 에 이르러 왜적을 크게 물리쳐 장수 현감(長水縣監)이 되었다. 이어 청하 현감(淸河縣監)․벽당 군수(璧漟郡守)․평해 군수(平海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전치(田 菑)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광흡(光洽)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96(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키자 홍주 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토벌작전에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이 되었다.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전시우(田時雨) ()는 이화(而化), ()는 북헌(北軒),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 대기(大起)의 아들. 1583(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를 거쳐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하여 장단성(長偳城)에 이르러 성()을 수비했다.

후에 1609(광해군 원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으로 국정이 날로 문란하여 지고 민심이 어지러워 지자 아우인 호우(好雨)와 함께 국운(國運)을 걱정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영산 현감(靈山縣監)을 제수받고 선정하였다.

전경란(田慶蘭) ()는 국형(國馨).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 慄) 장군의 진중에 들어가 호남(湖南) 지방 왜군과 접전 끝에 순국하였다.

전근(田 根) 진도 군수(診島郡守) 극려(克礪)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무성(陣武晟)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전벽(田 闢) 1584(선조 17)1657(효종 8) 자(字)는 자야(滋野), 호(號)는 서정(西亭), 봉훈랑(奉訓郞) 대록(大祿)의 아들. 1606년(선조 39)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성균관 정자(成均 館正字)가 되었으나 적신(賊臣) 김제세(金濟世)의 무고로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당했다.

1623(인조 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보령 현감(保寧縣監)이 되었다.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3천명 부하군사를 거느리고 인조(仁祖) 임금을 공주(公州)까지 호종(扈從)한 후 1626(인조 4) 전적(典籍)이 되고 곧 예조 좌랑(禮曹左郞)을 처쳐 1627(인조 5) 정묘 호란(丁卯胡亂) 때는 전향 종사관(轉餉從事官)으로 참전,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렀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전송(香束) 1620(광해군 12)1679(숙종 5) 자(字)는 자원(子遠), 호(號)는 형봉(衡峰), 탁영(擢英)의 아들. 1642년(인조 20)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냈으며 1677년(숙종 3)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역임했다.

전세록(田世祿)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사(府使) 기 협(奇協)의 별장(別將)으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항정하였다.

인산(鈏山)의 월봉(月峰)에서는 내침한 적에게 돌팔매질로 대항하여 물리쳤으며 적이 다시 공격해오자 수명의 장정을 이끌고 복병전으로 이를 급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려 통정대부(通政大夫)선천 판관(宣川判官)을 제수 받았다.

전기직(田起稷) 1645(인조 23)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649(인조 27)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판관(判官)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등을 지냈다.

전만최(田萬最) 1653(효종 4)1713(숙종 39) 자(字)는 여선(汝善), 도사(都事) 기직(起稷)의 아들. 1676년(숙종 2)에 무과(武科) 에 올랐고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금위영 파총(禁衛營把摠)․참상 선전관(參上宣傳官)․충청병마우후(忠淸兵馬虞候) 등을 지내고 1730년(영조 6) 홍주 진영장(洪州鎭營將)을 역임하였다.

전운상(田雲祥) 1694(숙종 20)1760(영조 36) 자(字)는 용백(龍伯), 호(號)는 자천(紫泉), 부호군(副護君) 시원(始元)의 아들. 1717년(숙종 4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전라좌수사(全羅 左水使) 때 해골선(海鶻船)을 제압했다. 경사좌병사(慶尙左兵使)로 있을 때는 독윤병차(獨輪兵車)를 창조했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남양 부사(南陽府使)․ 회령 부사(會寧府使) 등을 역임했다.

전시혁(田始赫) 1697(숙종 23)1742(영조 18) 자(字)는 대경(大卿), 만춘(萬春)의 아들. 1722년(경종 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판관(判官)․첨정(僉正) 등을 역임했다.

1728(영조 4) 선전관(宣傳官)으로 의금부 가도사(義禁府假都事)가 되어 어명을 받들고이인좌(李麟左)가 난을 일으켰을 때 나주(羅州)에 내려가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되고 감란록(勘亂錄)에 기록되었다.

전일상(田日祥) 1704(숙종 30)1753(영조 29) 자(字)는 희중(羲中), 호(號)는 석천(石泉). 1728년 나주 영장(羅州營將)이 되어 호남에서 일어난 세칭 팔장사(八壯士) 난을 평정하고 금군장(禁軍將)․우별장(友別將)을 역임한 후 창원 부사(昌原府使)․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를 거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노환을 핑계로 부임치 않았다.

전은상(田殷祥) 1704(숙종 30)1773(영조 49) 통덕랑(通德郞) 시대(始大)의 아들. 1726년(영조 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단천부사(端川府使)를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공주(公州)의 중군(中軍)이 되어 공주성(公州城)을 잘 축조하여 당시 충청 감사(忠淸監司)인 김시찬(金時粲)에게 포상을 받았다. 1753년 도감병방(都監兵房)이 되었고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창의(李昌誼)로부터 왕에게 주청되어 축성공사에 공을 세운 것을 알려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위장(五衛將)으로 승진시켰다. 1755년 금위기사장(禁衛騎士將)․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었다.

전천상(田天祥) 1705(숙종 31)1751(영조 27) 자(字)는 경문(景文), 호(號)는 죽암(竹菴). 1723년(경종 3)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726년(영조 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희천 군수(熙川郡守)․여주 목사(驪州牧使)․나주 진영장(羅州鎭營將)이 되었고 이어 서산 군수(瑞山郡守)로 가서 선정하였다.

전광훈(田光祥) 1722(경종 2)1776(영조 52) 자(字)는 양경(陽卿), 통어사(統御使) 운상(雲祥)의 아들. 1750년(영조 26) 사마시 (司馬試)를 거쳐 1753년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선전관 내금장(宣傳官內禁將) 등을 역임한 후 1758년 선천 방어사(宣川防禦使)를 지냈다. 1762년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 가 백성들이 흉년으로 굶주림을 보고 정성을 다해 진휼하고 도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왕()은 조서와 석마(錫馬)를 내려 상을 베풀었다. 1775년 함경병사(咸鏡兵使) 겸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부총관(副摠管)등을 제수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전재경(田在敬) 조선(朝鮮) 때 정헌대부에 올라 용양위 대호군(龍壤衛大護軍)을 역임하였다.

전귀성(田貴成) 1804(순조 4)1891(고종 28) 자(字)는 성일(成一), 호(號)는 가정(稼亭)․천석(泉石), 치덕(致德)의 아들. 숭정대부(崇政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학문이 깊어 인근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전시우(田時雨) 통덕랑(通德郞) 윤추(潤秋)의 아들. 1832(순조 3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전안택(田安澤) ()는 안택(安宅), 유추 (有鄒)의 아들. 조선 때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호조 참판(戶曹參判)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였다.

전익성(田益聖) ()는 치삼(致三), 재현(在賢)의 아들.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고 1888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