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5-04 21:16 수정일 : 2018-08-01 15:52
瑢源先系 및 瑢源世系(전주이씨시조)
전주이씨는 우리나라 대성 중에서 근대시기에 크게 성장한 성씨 집단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왕실이 전주이씨를 근본으로 하는 부계중심의 왕실을 유지 500여 년간을 지속하면서 종친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역대 왕들은 많은 왕자군을 생산하여 왕통만이 아니라 왕실의 배경으로 전주이씨의 친족들의 세를 확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왕실의 성립을 기점으로 하여 그 선대의 역사를 소개하고 역대 왕들의 행적을 간략하게 보고, 이어 역대 왕들의 왕자군들의 형세를 살펴보도록 한다. 그것은 왕자군들이 바로 전주이씨의 파시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우리들은 대개 파시조를 중심으로 친족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어, 친족 모임의 연원을 따지게 되는 것에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유념할 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이씨 친족의 계보를 기술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들이 있고 각 성씨들과 혼인하여 전주이씨의 친족세를 확장하였다. 혼인하여 온 성씨를 왕대별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주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이고 『선원계보』 등을 참고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30년사』와 『전주이씨대관』을 참조하여 기술하였다.
Ⅰ. 선원선계(璿源先系)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하여 조선왕조의 시조의 계보를 추적하는 마당에서 전주이씨는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수용하고 있다.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주이씨는 시조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하는 것이다.
선원세계는 추존왕 4대와 태조고황제부터 순종황제까지 20세를 합쳐 24세의 역대왕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대왕의 5왕자로부터 장조의 3왕자군까지 도합 125개의 파계가 있었으나 무사(無嗣)의 군파가 있어 현재는 105여 파로 분리되고, 2004년 9월 현재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한 파종회는 89개파다.
따라서 전주이씨를 개관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역사를 시작으로 하여 태조가 추존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마지막 황제이신 순종황제까지의 선원세계를 우선 조명하고, 이어 선원파계(선원속계)의 대강을 소개함으로써 현재 전주이씨의 파계를 종관할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태조실록」 총서에는 선원선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라고 하여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4대조를 추존하여 8촌 범위의 친족을 왕실로 격상시키고, 여기서부터 파조를 형성 전주이씨의 부계 성씨를 보존하여 자자손손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태조대의 역사부터 다시 조명하면서 전주이씨의 전파의 계보도를 보도록 하겠다.
“태조는 선조 사대(四代)의 존호(尊號)를 사후(死後)에 올렸다. 고조고(高祖考)는 목왕(穆王)이라 하고, 비(?) 이씨(李氏)는 효비(孝妃)라 하였으며, 증조고(曾祖考)는 익왕(翼王)이라 하고, 비 박씨(朴氏)는 정비(貞妃)라 하였으며, 조고(祖考)는 도왕(度王)이라 하고, 비 박씨(朴氏)는 경비(敬?)라 하였으며, 황고(皇考)는 환왕(桓王)이라 하고, 비 최씨(崔氏)는 의비(懿妃)라 하였다.” 라고 「태조실록」 총서에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7월 왕위에 오르자 개국을 도운 태조의 아들과 조카을 봉군하고 있다. 봉군을 받은 왕자들은 바로 파시조가 되어 친족의 독립 친족을 만들고 왕실에 협력하는 단위의 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실록을 보면,
“왕자(王子)를 군(君)으로 봉(封)하였다.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라 하고, 이방과(李芳果)는 영안군(永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고, 방의(芳毅)는 익안군(益安君)이라 하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懷安君)이라 하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이라 하고, 서자(庶子)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고, 부마(駙馬) 이제(李濟)는 흥안군(興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삼고,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아들 이양우(李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라 하였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7일)
라는 봉군(封君)과 함께 인사를 통하여 왕실의 호위로 한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어 태조는 시조(始祖)가 기반으로 한 전주(全州)를 승격시켜 완산부(完山府)로 삼고, 유구(柳?)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7일)고 「태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를 더 조명하면, 지금의 전북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比斯我?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 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940년(태조 23)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993년(성종 12)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개칭하였다가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순의군(順義軍)이라 부르고 강남도(江南道)에 예속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개칭되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어 오늘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첫 이름이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또 부의 북쪽 10리에 있으면서 마이산(馬耳山)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따라서 전주이씨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대체로 전주이씨라 부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이 전주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이 전주는 전주이씨와 절대적인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경단(肇慶壇)
'조경(肇慶)' 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전주이씨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시조 한(翰)의 묘역(墓域)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왕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조선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중략)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이 비문은 조선의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썼다. 이로 보면 시조의 묘가 이곳에 있었고 태조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정조대왕도 산소 보존을 위하여 사방경계를 정 하는 등,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그러나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전까지 450 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Ⅱ. 선원세계(璿源世系)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태종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사대(四代)의 능실(陵室)에 제사를 지내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고, 이내 능호(陵號)를 올리니, 황고(皇考)는 정릉(定陵), 황비(皇?)는 화릉(和陵), 황조(皇祖)는 의릉(義陵), 황조비(皇祖?)는 순릉(純陵), 황증조(皇曾祖)는 지릉(智陵), 황증조비(皇曾祖?)는 숙릉(淑陵), 황고조(皇高祖)는 덕릉(德陵), 황고조비(皇高祖?)는 안릉(安陵)이라 하였다.(「태조실록」 권1 1년 8월 8일) 이는 새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의식으로 태조의 웃 4대조를 추존하여 왕으로 받드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선원파계의 연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목조(穆祖)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요, 고려 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와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이고, 차례는 넷째다.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의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목조는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 전주향교 뒤에 있는 은행나무터가 바로 그것이다.
목조왕은 또 어렸을 때에 발리산 아래에서 폭풍을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자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목조왕은 거기에 모인 여러 아이들에게 이르기를?호랑이는 단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모두가 자기 옷을 벗어 던져 봐서 옷을 받아 무는 아이만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러면 네가 먼저 던져 봐라.? 하였다. 목조대왕은 그 말대로 제일 먼저 옷을 벗어 던지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물었다. 이 때 여러 아이들은 목조대왕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굴에서 나오자 호랑이는 달아나고 동시에 바위 벼랑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래서 여러 아이들은 화를 입게 되었으나 목조대왕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오늘날 전주 발리산 남쪽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정자 한벽당(寒碧堂 : 梧木臺 동쪽 1㎞)에서 400m 쯤 떨어진 지점에 굴러 내린 바윗돌이 강물 가운데서 완연히 보인다. 이 돌을 호운석(虎隕石)이라 한다.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이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려는 목조왕은 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괴산(槐山)?제천(堤川)?정선(旌善) 등의 직선 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이 때 장군공과 목조왕에 따르기를 원하는 혈족과 외족은 170여 호나 되었다. 대이동한 일족은 삼척군(현 삼척시) 내의 삼화사(三和寺 : 정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을 지나면 있으며, 삼척시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쪽 25리에 북평이 있고, 북쪽 30리에 묵호가, 서남쪽 10리에 頭陀山城이 있다)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대이동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231년(고려 고종 18)에 제1차 몽고병의 침입이 있었고, 같은 해에 목조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장군공 묘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목조왕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지 수년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냐 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군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일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릉과 삼척 사이는 해륙 교통이 편리한 가까운 지리인지라, 목조왕은 장차 묵은 혐의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족을 이끌고 이미 마련해 둔 선단 15척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손쉽게 동북면의 덕원부(德源府) 용주리(湧珠里 : 赤田社)로 이주하니, 때는 1236년(고려 고종 23)이었다. 이 때 전주에서 장군공과 목조왕을 따라 삼척군으로 이동해 온 혈족과 외족 170여 호도 역시 목조를 따라 이주해 왔는데, 이 사실은 또 한편으로 일족의 선단이 묵호만(墨湖灣)에서 모두 영흥만(永興灣)으로 대이동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목조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왕래하며 활기리 노동(蘆洞)의 선고묘(先考墓)와 동산리의 선비묘를 성묘함과 동시에 과거에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삼화사에 참례하였는데, 풍부한 학식을 가진 목조는 삼화사에 저 유명한 <금은수사경(金銀手寫經)>을 남겨 놓은 것이다.
목조는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해 온 지 19년만에 다시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였다. 오동(斡東) 발음을 <위적사(偉蹟史)>의 번역에선 ‘와뚱’이라 하고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선 ‘알동’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2장에 “穆祖移居斡東之地”라 기록돼 있다.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이 곳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이 있다. 경흥(慶興)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 도착하니 때는 목조대왕의 춘추 51세 1254년(고려 고종 41) 쯤 이었다.
태조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2) 익조(翼祖)
18세 목조의 제4남으로 이름은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고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인데, 본관은 등주(登州)요,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에 있고 표석이 있다.
익조는 8남 1녀를 두었으니, 사자(嗣子)인 도조왕은 차례로 넷째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태조고황제의 증조부인 익조대왕은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익조왕의 부인은 손부인(孫夫人)으로서 함께 적도(赤島)까지 도피하는 등 초년 고생을 함께 하였다. 후에 익조왕은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에 장가들어 도조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익조왕은 8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도조왕은 차례가 넷째이니 위로 형이 셋이요, 아래로 아우가 넷인 셈이다. 그래서 손부인이 낳은 두 아들이 함녕대군과 함창대군이고 나머지 다섯 아들과 딸이 정숙왕후 소생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8남 1녀를 전부 정숙왕후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3) 도조(度祖)
19세 익조의 제4남으로 이름은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고 후에 태종이 공의성탁(恭毅聖度)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두었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배위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이니 본적은 문주(文州)요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고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에 있다. 표석이 있다.
사자(嗣子) 환조(桓祖)왕은 차례가 둘째요,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경순왕후 박씨는 완창대군과 환조왕만 낳고 박씨가 승하한 뒤 조씨(趙氏)에게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첫 아들이 완자불화(完者不花)요, 다음 아들이 나해(那海)라고 하였다. 그러니 5형제 중 아들 하나는 누가 또 낳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5남 3녀를 모두 경순왕후 박씨가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환조(桓祖)
20세 도조왕의 제2남으로 이름은 자춘(子春)인데 자도 역시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고 태종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1360년 8월에 장례했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배위는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이니 본적은 영흥(永興)이요,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를 받고 조선조에서 판문하(判門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을 추증받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화릉(和陵)으로 환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사자는 태조고황제이고, 장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환조왕은 따로 두 배위를 두었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환조왕이 함경도로 떠난 그해 1360년(고려 공민왕 9) 신축년 4월에 갑자기 병환으로 승하하였다. 환조왕의 보령이 46세였다.
(다음은 조선왕조의 태조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까지 역대 왕의 왕비의 성씨와 왕자 공주의 내력을 약술하여 전주이씨 대성이 번성하게 된 줄기를 기술할 것이다.)
1. 태조(太祖)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정의 광덕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은, 이름은 단(旦)이며, 자는 군진(君晉)이다. 초휘는 성계(成桂)이고, 자는 중결(仲潔)이며, 호는 송헌(松軒)이다. 환조(桓祖)의 맏아들로 의비(懿妃)가 지원(至元) 원년 을해 고려 충숙왕 후 4년 10월 11일 기미에 영흥(永興) 흑석리(黑石里)의 사저에서 낳았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고, 홍무(洪武) 25년 임신 7월 16일에 송경(松京)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8세 갑술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춘추 60세 무인 홍무 31년 9월에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었다. 영락(永樂) 6년 무자 태종 8년 5월 24일 임신에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상왕위에 있은 지 10년이요, 수는 74세였다.
화상(畵像)이 두 벌이 있어 전주 경기전(全州慶基殿)에 한 벌 있고, 영흥 선원전(永興璿源殿)에 한 벌 있다. 숙종 14년 무진에 그린 또 한 벌이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다. 능은 건원릉(健元陵) 양주 남쪽 검암삼(儉巖山)에 있다. 무자년(1408) 9월 9일에 장사지냈다.
비(妃) 승인 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안변(安邊)이니, 밀직사 부사 증 영문하 부사(密直司副使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이다. 지원 3년 정축 충숙왕 후 6년에 났다.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하였고,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恭讓王) 3년 9월 23일에 승하하였으니 나이 55세였다. 능은 제릉(齊陵). 풍덕(?德) 북쪽 속촌(粟村)에 있다.
계비(繼妃) 순원 현경 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은 곡산(谷山)이니, 판삼사사 증 상산부원군(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딸이다.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홍무 병자년(1396) 태조 5년 8월 13일에 이어소(移御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정릉(貞陵) 양주(楊州) 남쪽 사하리(沙河里)에 있다. 정축년(1397) 정월에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쪽에 장사지냈다가, 태종(太宗) 9년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여기로 옮겼다. 8남 5녀를 두었다.
제1남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충주지씨(忠州池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태조 잠저(潛邸)시에 죽었으며, 시호를 정의(靖懿)라 추봉(追封)하였다. 제2남은 정종대왕이다. 제3남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개국정사공신 대광보국 증 마한공(開國定社功臣 大匡輔國 贈 馬韓公)이며,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철원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지간성군사 증 찬성사(知杆城郡事贈贊成事) 인두(仁?)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풍덕(?德)에 있으며, 정종묘정(定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제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 증 찬성사(判書贈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다. 밀양황씨(密陽黃氏)에게 재취(再娶)하였으니,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다. 김포금씨(金浦琴氏)에게 세 번째로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인배(仁排)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전주(全州)에 있다. 경진란(庚辰亂) 때 토산(兎山)에 안치(安置)되어 죽었다. 뒤에 시호를 양희(良僖)라고 추증하였다. 제5남은 태종대왕이다. 제6남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 이상은 신의 왕후가 낳았다. 고려 문과 성균 박사(高麗文科成均博士)였으며, 일찍 죽었다. 대군(大君)을 추증하였다.
제7남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처음에 군을 봉하였고, 추성공(楸城公)을 추증하였으며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장혜(章惠)이고, 초시(初諡)는 공순(恭順)이다. 개성왕씨(開城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세종이 광평대군(廣平大君)에게 봉사(奉祀)를 명하였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숙종 경신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제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이상은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낳았다. 처음에 세자(世子)로 봉하였다가 무인정사(戊寅定社) 때에 죽었다. 오원공(五原公)을 증하였고 뒤에 대군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유심씨(富有沈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대제학 효생(孝生)의 딸이다. 묘는 광주에 있다. 숙종(肅宗) 경신에 대군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제1녀 경신공주(慶愼公主). 정사 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경숙공(景肅公) 이애(李?)의 아내이다. 이애의 초명(初名)은 저(佇)이다. 1남을 두었다. 이애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아버지는 영상(領相) 거이(居易)이다. 제2녀 경선공주(慶善公主). 이상은 신의왕후가 낳았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의 아내이다. 1녀를 두었다. 심종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덕부(德符)이다.
제3녀 경순공주(慶順公主). 신덕왕후가 낳았다.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 아내이다. 이제의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며 계자(繼子)가 있다. 이제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 인립(仁立)이다. 1녀 의령옹주(宜寧翁主). 계천위(啓川尉) 이등(李?)의 아내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이등의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고,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事水監事) 문정공(文靖公) 이개(李開)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아내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홍해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언수(彦修)이다.
2. 정종(定宗)
정종 공정 의문 장무 온인 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은, 휘는 경(?)이며, 자는 광원(光遠)이고, 처음 휘는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 17년 공민왕 6년 7월 초하룻날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낳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상(將相)까지 이르렀고, 태조가 즉위한 다음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하였다. 무인년 홍무 31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고, 경진년 건문(建文) 2년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그 해 12월에 인문공예(仁文恭睿) 어첩(御牒)에 기록한 휘호에 겹친 글자가 있고 시호 가운데 온인(溫仁) 밑에 공용(恭勇) 두 자가 있으나, 공(恭) 자가 겹쳐 나오므로 어첩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2년이고, 기해년 세종 원년 영락17년 9월 26일 무진에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上王位)에 있은 지 19년이며, 수(壽)는 63세였다.
숙종(肅宗) 7년 신유에 추후해서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고 의문장무라고 시호를 더 올렸으며, 능은 후릉(厚陵)이다. 풍덕(豊德) 동편 흥교동(興敎洞)에 있다. 경자년(1420) 정월 초사흗날에 장사지냈는데, 표석(表石)이 있다.
비(妃) 순덕 온명 장의 정안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김씨(金氏)는, 본관은 경주이니,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증 문화좌시중(贈門下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을미년 지정 15년 정월 9일에 나서 무인년(1386)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德妃)로 올려서 봉하였다. 경진년(1400)에 존호를 순덕이라고 올리고, 임진년 태종 12년, 영락(永樂) 10년 6월 25일 무인에 인덕궁에서 승하하였는데, 수가 58세고 자녀는 없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추후하여 휘호를 온명장의(溫明莊懿)라 올렸다. 능은 후릉(厚陵). 대왕의 능과 같은 산에 있는데, 임진년(1412) 8월 8일에 장사지냈다.
아들 열 다섯과 딸 여덟을 두었다.
1남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지씨(池氏)가 낳았고,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철원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금천 감무(衿川監務) 치숭(致崇)의 딸이다. 5남 3녀를 두었다. 2남 순평군(順平君) 군생(群生). 기씨(奇氏)가 낳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순창설씨(淳昌薛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3남 금평군(錦平君) 의생(義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금평군을 추증하였다. 남양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직 홍숙(洪宿)의 딸이다. 4남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參議) 종성(宗誠)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안강김씨(安康金氏)를 재취하였으니,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5남 종의군(從義君) 귀생(貴生). 문씨(文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종의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양구유씨(楊口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正)으로 찬성(贊成)을 추증한 수빈(守濱)의 딸이다. 해풍장씨(海豊張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장균(張均)의 딸이다. 6남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 이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의령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상호군(上護軍) 남심(南深)의 딸이다. 7남 수도군(守道君) 덕생(德生). 윤씨(尹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수도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여산송씨(礪山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계성(繼性)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8남 임언군(林堰君) 녹생(祿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언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고령박씨(高靈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少尹) 박부(朴溥)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9남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석보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원주김씨(原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중추부사 대민공(戴敏公) 연지(連枝)의 딸이다. 3남 5녀를 두었다. 10남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장수 이씨(長水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양후공(良厚公) 종무(從茂)의 딸이다. 4남 5녀를 두었다. 11남 임성군(任城君) 호생(好生). 지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성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평창이씨(平昌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수(郡守) 계동(繼童)의 딸이다. 12남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용인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부사(府使) 수강(守綱)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전주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사직(司直) 최수(崔洙)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3남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장천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화순최씨(和順崔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사(郡事) 자해(自海)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14남 정석군(貞石君) 융생(隆生). 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정석군(貞石君)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충주권씨(忠州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직장(直長) 권돈(權敦)의 딸이다. 15남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 기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이(昭夷)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2남 4녀를 두었다.
1녀 함양옹주(咸陽翁主). 지씨가 낳았다. 남편은 지돈녕부사 박갱(朴?)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박갱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득중(得中)이다. 2녀 숙신옹주(淑愼翁主). 기씨가 낳았다. 남편은 판돈령부사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民)인데,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세민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김겸(金謙)이다. 3녀 덕천옹주(德川翁主). 남편은 행부사(行府使) 변상복(邊尙服)인데, 3남 2녀를 두었다. 상복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總制) 변이(邊?)이다. 4녀 고성옹주(高城翁主). 남편은 지중추부사 김한(金澣)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그 집 족보(族譜)에는 안성위(安城尉) 호평공(胡平公)이라 하였고, 본관은 안산(案山)이며, 아버지는 연성군(連城君)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이다. 5녀 상원옹주(祥原翁主). 남편은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효산의 본관은 평양이고, 아버지는 의방(義方)이다. 6녀 전산옹주(全山翁主). 남편은 행사직 이희종(李希宗)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희종의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7녀 인천옹주(仁川翁主). 남편은 행부사(行府使) 이관식(李寬植)인데, 5남 3녀를 두었다. 관식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성간(成幹)이다. 8녀 함안옹주(咸安翁主). 남편은 부지돈녕부사 월림군(月林君) 소정공(昭靖公) 이항신(李恒信)인데, 1남을 두었다. 항신의 본관은 경주이다.
3. 태종(太宗)
태종 공정 성덕 신공 문무 예철 성렬 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은, 휘는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이며,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至正) 27년 정미 공민왕 16년 5월 16일 신묘에 함흥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낳았다. 홍무(洪武) 임술년에 고려에서 진사를 하고, 다음해인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한 뒤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고, 경진년 건문 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술년 영락(永樂) 16년 8월에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11월에 성덕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왕위에 있은 지 18년이고, 임인년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에 천달방(泉達坊) 새 대궐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에 있은 지 4년이고, 수는 56세였다. 숙종 9년 계해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이라고 시호를 더 올렸고, 능은 헌릉(獻陵) 광주(廣州)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다. 임인년(1422) 9월 6일에 장사지냈는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비(妃) 창덕 소열 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민씨(閔氏)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문하좌정승 여흥부원군 문도공(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지정(至正) 25년 을사 공민왕 14년 7월 11일에 송경 철동(鐵洞) 사저에서 나고, 홍무(洪武) 임신년 태조 원년 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으며, 경진년 정빈(貞嬪)으로 책봉되었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비(靜妃)로 책봉되었다. 경자년 세종 2년 7월 10일 병자에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경궁별전(別殿)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56세였다. 갑진년 세종 6년에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고 존호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헌릉(獻陵)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9월 17일에 장사지냈다.
아들 열 둘과 딸 열 일곱을 두었다. 제1남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다. 처음에 세자로 봉했다가 태종 18년에 폐(廢)하고 대군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강정공(剛靖公)이다. 광주김씨(光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광산군(光山君)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한노(漢魯)의 딸이 3남 4녀를 두었다. 제2남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처음 이름은 이호(李祜)이고, 시호는 정효공(靖孝公)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정도공(貞度公)정역(鄭易)의 딸인데, 6남 1녀를 두었다. 제4남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種). 대광보국 변한공(大匡輔國卞韓公)으로 시호는 소경공(昭頃公)이다. 창녕 성씨(昌寧成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원사(判院事)로 좌의정을 추증한 희정공(僖靖公) 성억(成抑)의 딸이다.
제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남편은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인데, 딸 하나를 두었다. 백강의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도공 거이(居易)이다.제2녀 경정공주(慶貞公主). 남편은 평양부원군 강안공(康安公) 조대림(趙大臨)인데, 1남 4녀를 두었다. 대림의 본관은 평양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충공 조준(趙浚)이다.제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남편은 길창군(吉昌君) 제간공(齊簡公) 권규(權?)인데, 2남을 두었다. 권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다. 제4녀 정선공주(貞善公主). 남편은 의산군(宜山君)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인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남 경녕군(敬寧君). 이비(李?) 효빈(孝嬪) 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제간공(齊簡公)이다. 청풍 김씨(淸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증 좌찬성 김관(金灌)의 딸이다. 4남을 두었다. 2남 함녕군(?寧君) 이인(李?). 신빈(信嬪) 신씨(辛氏)가 낳았고, 처음에 공녕(恭寧)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함녕으로 고쳤다.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전주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3남 온녕군(溫寧君) 이정(李?).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혜공(良惠公)이다. 순천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정(副正) 증 찬성 문목공(文穆公) 안명(安命)의 딸이다. 4남 근녕군(謹寧君) 이농(李?).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의공(僖懿公)이다. 하양허씨(河陽許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관찰사 증 찬성 지혜(之惠)의 딸이다. 2남 7녀를 두었다. 5남 혜령군(惠寧君) 이지(李祉). 안씨(安氏)가 낳았고, 시호는 양회공(襄懷公)이다. 무송윤씨(茂松尹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찬성 윤변(尹?)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다. 6남 희령군(熙寧君) 이타(李?). 숙의(淑儀)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정공(夷靖公)이다. 순창신씨(淳昌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첨지 증 찬성 숙생(淑生)의 딸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재취하였으니, 군수(郡守) 사렴(士廉)의 딸이다. 3남을 두었다. 7남 후령군(厚寧君) 이한.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도공(僖悼公)이다. 평산신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영(令) 증 찬성 경종(敬宗)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8남 익녕군(益寧君) 이치. 선빈(善嬪) 안(安)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강공(昭剛公)이다. 운봉박씨(雲峯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절제사(節制使) 증 찬성 종지(從智)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1녀 정혜옹주(貞惠翁主).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낳았다. 남편은 정난공신(靖難功臣)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성렬공(成烈公) 박종우(朴從愚)이다. 종우의 본관은 운봉(雲峯)이고, 아버지는 찬성 충숙공(忠肅公) 박신(朴信)이다. 2녀 정신옹주(貞信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계동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판서(判書) 윤향(尹向)이다. 3녀 정정옹주(貞靜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한원군(漢原君) 소회공(昭懷公) 조선(趙璿)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조선의 본관은 양주(楊洲)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이다. 4녀 숙정옹주(淑貞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고, 남편은 행 판서(行判書)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인데, 2남 4녀를 두었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아버지는 판서 정진(鄭鎭)이다. 5녀 소선옹주(昭善翁主). 남편은 유천위(柔川尉) 변효순(邊孝順)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효순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감찰(監察) 상주(尙周)이다. 6녀 숙혜옹주(淑惠翁主). 소빈(昭嬪) 노씨(盧氏)가 낳았다. 남편은 성원위(星原尉) 장절공(章節公) 이정녕(李正寧)이고, 3남 1녀를 두었다. 정녕의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아버지는 좌윤(左尹) 사후(師厚)이다. 7녀 숙녕옹주(淑寧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성군(坡城君) 윤우일(尹愚一)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우일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사간(司諫) 수미(須彌)이다. 8녀 소숙옹주(昭淑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해평군(海平君) 평도공(平悼公) 윤연명(尹延命)인데, 4남 2녀를 두었다. 연명의 본관은 해평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연성(連誠)이다. 9녀 숙경옹주(淑慶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공신(佐翼功臣) 파평군(坡平君) 제도공(齊度公) 윤암(尹巖)인데, 6남 1녀를 두었다. 윤암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생원(生員) 태산(太山)이다. 10녀 경신옹주(敬愼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전성위(全城尉) 양효공(良孝公) 이완(李梡)이며, 6남 1녀를 두었다. 이완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공전(恭全)이다. 11녀 숙안옹주(淑安翁主).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회천위(懷川尉) 양도공(良悼公) 황유(黃裕)인데, 3남을 두었다. 황유의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자후(子厚)이다.
12녀 숙근옹주(淑謹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공신(佐翼功臣) 화천군(花川君) 양효공(襄孝公) 권공(權恭)인데, 1남을 두었다. 권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아버지는 도절제사(都節制使) 권복(權復)이다. 13녀 숙순옹주(淑順翁主). 이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원위(坡原尉) 윤평(尹評)인데, 2남 1녀를 두었다. 윤평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참의(參議) 윤창(尹敞)이다.
4. 세종(世宗)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휘는 도(?)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가 홍무 30년 정축, 태조 6년 4월 10일 임진에 한양(漢陽) 잠저에서 낳았다. 무자년(1408)에 처음으로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임진년(1412)에 대군(大君)으로 승진되었고, 무술년(1418)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그 해 8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경태(景泰) 원년 경오 2월 17일 임진에 별궁(別宮)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32년이고, 수는 54세였다. 능은 영릉(英陵). 처음에는 광주(廣州) 헌릉(獻陵)의 서편 산뫼에 장사했다가, 예종(睿宗) 원년 기축 3월 6일에 여주(驪州) 서북편 성산(城山)으로 옮겼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승소(李承召)가 묘지(墓誌)를 지었고, 윤회(尹淮)가 행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정인지가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능을 옮길 때 묻어두고 쓰지 않았다.
왕비(王妃) 선인 제성 소헌 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본관은 청송(靑松)이니 영의정(領議政)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다. 홍무 28년 을해 9월에 양주(楊州)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영락(永樂) 무자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여 처음에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해졌다가, 정유년(1417)에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지고, 무술년에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 얼마 안 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임자 선덕(宣德) 7년에 왕비가 되었다. 정통(正統) 병인 11년 세종 28년 3월 24일 신묘에 별궁 세조(世祖)의 잠저에서 승하하니, 수가 52세였다. 문종(文宗) 2년에 선인 제성(宣仁齊聖)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능은 영릉 세종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애초에는 헌릉(獻陵) 서편 산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에 이장하였다.
18남 4녀를 두었다. 제1남은 문종이다. 제2남은 세조이다. 제3남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시호는 장소(章昭)다. 연일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서(判書) 증 좌의정(贈左議政) 연(淵)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며, 계유년(1453)에 화를 입었고, 뒤에 신원(伸寃)되었다.제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구(?).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의령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충간공(忠簡公) 지(智)의 딸이다. 전주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봉례(奉禮) 증 우의정(贈右議政) 승령(承寧)의 딸이다. 5남 2녀를 두었다. 제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평산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중추부사 증 좌의정 자수(自守)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제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전주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찬성 증 좌의정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의 딸이다. 1남을 두었다. 정축년(1457)에 화를 입었고, 그 뒤에 신원되었다. 제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임(琳).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처음의 시호는 정덕(靖德)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사(府使) 증 좌의정 이용(利用)의 딸이다. 제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이다. 여산송씨(礪山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제1녀 정소공주(貞昭公主). 일찍 죽었다. 제2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아내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맹담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망지(望之)이다. 1남 화의군(和義君) 영(瓔). 영빈(令嬪) 강씨(姜氏)가 낳았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좌찬성(贈左贊成) 공효공(恭孝公) 중손(仲孫)의 딸이다.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2남 계양군(桂陽君) 증(?). 신빈(愼嬪) 김씨가 낳았다. 좌익 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딸이다. 3남 3녀를 두었다. 3남 의창군(義昌君) 공(?).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강도(剛悼)이다. 연안김씨(延安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도관찰사 증 찬성 수(脩)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다. 4남 한남군(漢南君) 어. 혜빈(惠嬪) 양씨(楊氏)가 낳았다. 정축년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시호는 정도(貞悼)이다.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랑(正郞) 증 지돈녕부사 격(格)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5남 밀성군(密城君) 침(琛).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익대 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고,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윤 증 찬성 승서(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6남 수춘군(壽春君) 현(玹). 혜빈 양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영일정씨(迎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윤 증 좌찬성 위양공(威襄公) 자제(自濟)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7남 익현군(翼峴君) 곤(?). 신빈 김씨가 낳았다. 좌익공신(佐翼功臣)이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평양조씨(平壤趙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 증 찬성 철산(鐵山)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8남 영풍군(永豊君) 전(?). 혜빈 양씨가 낳았다. 정축년에 화를 입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순천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팽년(彭年)의 딸이다. 1녀를 두었다. 9남 영해군(寧海君) 당(?). 신빈 김씨가 낳았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한성윤 증 찬성 윤동(允童)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10남 담양군(潭陽君) 거. 신빈 김씨가 낳았다. 일찍 죽었으니 시호는 이양(夷襄)이다.
1녀 정현옹주(貞顯翁主). 상침 송씨(尙寢宋氏)가 낳았다. 좌익공신 좌찬성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충경공(忠景公) 윤사로(尹師路)의 아내이다. 2남을 두었다. 사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참의 은(垠)이다. 2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의 아내이다. 1남 1녀를 두었다. 안의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선(璿)이다.
5. 문종(文宗)
문종 공순 흠명 인숙 광문 성효대왕(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의 이름은 형이요, 자는 휘지(輝之)이니, 세종(世宗)의 첫째 아들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가 영락(永樂) 갑오년 태종 14년 10월 3일 계유에 한양 사저에서 낳았다. 신축년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을축년에 왕명을 받들어 대리 청정을 행하였다. 경태(景泰) 원년 2월에 별궁(永膺大君의 사저)에서 왕위에 오르고 임신년 5월 14일 병오에 경복궁(景福宮) 천추전(千秋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있은 지 2년이요, 수는 39세였다. 능은 현릉(顯陵)이다. 양주의 건원릉(健元陵) 동쪽 골짜기에 있다. 임신년 9월 초하룻날에 장사지냈다. 표석(表石)이 있다.
왕비는 인효 순혜 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권씨(權氏)로서 본관은 안동이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증 영의정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딸이다. 영락 무술년 3월 12일 임신에 홍주 합덕현(洪州合德縣)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선덕(宣德) 신해년에 뽑혀 동궁으로 들어와서 처음에는 승휘(承徽)로 책봉되었다가 곧이어 양원(良媛)으로 승봉되었다. 처음에 휘빈(徽嬪) 김씨가 폐해지고 정통(正統) 정사에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또 폐해지고, 드디어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신유년 세종 23년 7월 24일 무오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24세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봉되었다. 단종(端宗) 2년 갑술에 인효 순혜(仁孝順惠)라는 존호를 올렸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현릉(顯陵)이다. 문종대왕의 능 왼쪽 언덕에 있는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신유년 9월에 안산(安山) 소릉(昭陵)에 장사지냈는데, 세조(世祖) 3년 정축에 소릉의 능호를 폐하였다. 중종(中宗) 8년 계유 4월 21일에 이곳에 다시 장사를 지내고, 능호(陵號)를 회복시켰다.
아들이 한 명이고, 딸이 두 명이다. 왕위를 이어받은 이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이다. 딸 한 명은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남편은 헌민공(獻愍公) 증 영의정정종(鄭悰)인데, 본관은 해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참판 충경(忠敬)이다. 딸 한 명은 경숙옹주(敬淑翁主)이다. 사칙(司則) 양씨(楊氏)가 낳았다. 남편은 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인데 본관은 진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휘(徽)이다.
6. 단종(端宗)
단종 공의 온문 순정 안장 경순 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은 이름은 홍위(弘暐)이니 문종의 큰아들이다. 현덕왕후가 정통(正統) 6년 신유(辛酉) 세종 23년 7월 23일 정사에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왕을 낳았다. 무진년 세종 30년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冊封)되고, 경태(景泰) 원년 경오(庚午) 7월에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었으며, 임신년 5월에 왕위에 올랐다. 을해년 윤 6월 11일 을묘에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전하고 물러나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 10월 24일에 영월(寧越)에서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는 3년이요, 상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며, 나이는 17세였다. 숙종(肅宗) 7년 신유에 대군으로 추봉(追封)되고 24년 무인에 왕위에 추복되었으며, 정조 6년 임인에 대왕에 대한 보감(寶鑑) 한 권을 엮어서 올렸다. 능은 장릉(莊陵)이다. 영월 북쪽 동을지(冬乙旨)에 있고 표석(表石)이 섰다.
왕비 의덕 단양 제경 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 송씨는, 본관은 여산(礪山)이오 판돈령부사 여양군 증 영돈령부사 여양부원군(判敦寧府事礪良君贈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 현수(玹壽)의 딸이다. 정통 5년 경신에 탄생하여 갑술년 정월 22일 갑술에 왕비에 책봉되고, 을해년 7월에 높여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되었다가 정축년(1517) 6월에 강봉되어서 부인(夫人)으로 되었으며, 정덕(正德) 16년 신사(1521) 중종 16년 6월 4일 갑신에 죽으니, 수(壽)는 82세이다. 숙종 무인년(1698)에 왕비위에 추복되었다. 능은 사릉(思陵)이다. 양주(楊州) 남쪽 군장리(群場里)에 있고 표석(表石)이 있다.
7. 세조(世祖)
세조 혜장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은 휘는 유이며, 자는 수지(粹之)이요,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소생으로 영락(永樂) 15년 정유 태종 17년 9월 29일 병자에 본궁(本宮)에서 탄생하였다. 선덕(宣德) 3년 무신 세종 10년 에 처음 진평대군(晉平大君)으로 봉해지고, 뒤에 함평(咸平)으로 고쳐지고 또 진양(晉陽)으로 고쳐지고, 다시 또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되었다. 경태(景泰) 6년 을해 윤 6월 11일에 수선(受禪 : 임금이 죽기 전에 왕위를 물려받는 것)하고, 성화(成化) 4년 무자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하고, 8일 갑자에 수강궁(壽康宮 : 지금의 창경궁(昌慶宮))의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13년. 수가 52세였으며, 세실(世室)로 정해졌으며 그 연월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진[?容] 두 벌이 있었는데,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고, 한 벌은 인조(仁祖) 정축년에 봉안하였고, 또 한 벌은 영종(英宗) 정묘년에 거듭 모사하였다. 능은 광릉(光陵) 양주(楊州) 동편 주엽산(注葉山) 직동(直洞)에 무자년 11월 28일에 장사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왕비 자성 흠인 경덕 선열 명순 원숙 휘신 혜의 신헌 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증 영의정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貞靖公) 반(?)의 딸이다. 영락 무술 11월 11일에 홍주(洪州) 군아(郡衙)에서 탄생하여 선덕 무신년에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졌다가 경태 을해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성화 계묘년 성종 14년 3월 30일 임술에 온양 행궁에서 승하하니 춘추가 66세였다. 광릉에 장사하였다. 대왕의 능에서 동편 언덕이며, 계묘 6월 12일에 장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다. 제1녀 의숙공주(懿淑公主).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편정공(偏玎公) 정현조(鄭顯祖)의 아내였다. 현조는 성화 무자년에 문과에 올랐었다. 1남 덕원군(德源君) 서(曙).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익대공신(翊戴功臣)이요, 시호는 소간(昭簡)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찬성(贈贊成) 종직(從直)의 딸이요, 함안윤씨(咸安尹氏)에게 재취하였으니 함안군(咸安君) 말손(末孫)의 딸이요, 청주양씨(淸州楊氏)에게 삼취하였으니 참지(參知) 일원(逸源)의 딸이다. 2남 창원군(昌原君) 성(晟). 근빈 박씨가 낳았다. 교하노씨(交河盧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 증 찬성(正贈贊成) 호신(好愼)의 딸이요, 광주정씨(光州鄭氏)에게 후취하였으니 증 찬성 익(益)의 딸이다.
8. 예종(睿宗)
예종 양도 흠문 성무 의인 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은 이름은 황(晃)이며, 자는 명조(明照)요, 처음의 자는 평보(平甫)이며,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경태 원년(景泰元年) 경오 세종 32년 1월 1일 정축에 사저에서 낳았다. 처음에 해양대군(海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가 천순(天順) 정축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성화(成化) 병술년에 입학했으며, 무자년 9월에 왕위를 잇고 기축년 11월 28일 무신에 경복궁 자미당(紫薇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왕위에 있은 지 1년이요, 수(壽) 20세였다. 능은 창릉(昌陵) 고양(高陽) 경릉(敬陵) 북쪽 산이다. 경인년 2월 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왕비는 휘인 소덕 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 한씨(韓氏)이니,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上黨府院君忠成公) 명회(明澮)의 딸이다. 정통(正統) 10년 을축 세종 27년 1월 16일 경인에 탄생하였고, 천순 경진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거행하였다. 신사년 세조 7년 12월 5일 신미에 사제(私第)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수는 17세였다. 성종 3년에 추존하여 왕후로 삼고 존호를 올렸으며, 아들 하나를 낳았다. 능은 공릉(恭陵). 파주(坡州) 남쪽 보시동(普施洞)에 있다. 임오년 2월 25일에 장사지냈다.
계비(繼妃)는 인혜 소휘 제숙 안순왕후(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 한씨(韓氏)이니,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우의정 청천부원군 양혜공(淸川府院君 襄惠公) 백륜(伯倫)의 딸이고, 3월 12일에 탄생하였다. 동궁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소훈(昭訓)에 책봉되었다가 성화 무자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홍치(弘治) 무오년 연산군 4년 12월 23일 갑인에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창릉. 예종대왕 능의 왼쪽 산에 있는데, 을미년 2월 14일에 장사지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제1남은 인성대군(仁城大君) 분(糞)이다. 장순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뒤에 대군의 칭호와 효소공(孝昭公)이란 시호를 주었다. 제2남은 제안대군(齊安大君) 견(?)이다. 안순왕후가 낳았다.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상주김씨(尙州金氏)에게 장가갔으니, 증 좌의정 수말(守末)의 딸이다. 안순왕후의 뜻을 받들어 내쫓고, 다시 순천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갔으니 평양군(平陽君) 증 영의정 소양공(昭襄公) 중선(仲善)의 딸이다. 그 후에 왕후의 명으로 김씨와 다시 만나 살았으며 자식은 없다. 딸은 현숙공주(顯肅公主)이다. 안순왕후가 낳았다. 그 남편은 풍천위(?天尉) 임광재(任光載)이니, 본관은 풍천(?天)이고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9. 성종(成宗)
성종 강정 인문 헌무 흠성 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은 이름은 혈(?)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 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에 있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왕비는 휘의 신숙 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인데,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 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에 있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지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계비(繼妃)는 자순 화혜 소의 흠숙 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니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 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월 28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에 장사지냈다.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제1녀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1남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2남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의 딸이다. 3남 안양군(安陽君) 행.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4남 완원군(完原君) 수.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의 딸이다. 5남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6남 봉안군(鳳安君) 봉.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7남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8남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9남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10남 경명군(景明君) 침(?).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11남 전성군(全城君) 변(?).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12남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13남 영산군(寧山君) 전(?).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14남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15남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조씨(平壤趙氏)이고 중의위(中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1녀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2녀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3녀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4녀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5녀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6녀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7녀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8녀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9녀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이다. 10녀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11녀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10. 연산군(燕山君)
연산군은 이름은 융이며, 성종(成宗)의 원자요, 폐비 윤씨(尹氏)가 낳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나서 홍치(弘治) 을묘년에 왕위에 오르고, 정덕(正德) 병인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2년 만에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되어 교동(喬桐)으로 내쫓겼다.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가 31세였다. 묘는 양주(楊洲) 해등촌(海等村)에 있다.
폐비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영의정 승선(承善)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의 딸이다. 연산이 폐위되자 위호를 낮추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 되고 정청궁(貞淸宮)에 나가 있다가 중종(中宗) 때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망우리(忘憂里) 폐비 윤씨 묘의 국내(局內)에 있다. 제사 받드는 것은 외손 구엄(具?)에게 전해졌는데, 구엄은 또 외손 이안눌(李安訥)에게 전해 주었다.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1남 폐위된 세자 황. 정사년에 낳다. 폐주(廢主) 9년 계해에 사자를 보내어 세자로 책봉하였다. 연산군이 이미 폐위되니 세자도 폐위되어 정선(旌善)으로 귀양갔다. 2남 인(仁). 처음에 창녕대군(昌寧大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딸 하나는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갔다. 처음에 능양위(綾陽尉)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성(誠). 처음에 양평군(陽平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돈수(敦壽).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11. 중종(中宗)
중종 공희 휘문 소무 흠인 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은 휘는 역(?)이며, 자는 낙천(樂天)으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홍치(弘治)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년 3월 5일 기사일에 낳았다. 처음에는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封)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1506) 9월 무인일에 즉위하여 가정(嘉靖) 23년 갑진년(1544) 11월 14일에 인종(仁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며, 15일 경술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이요, 수는 57세이다. 능은 정릉(靖陵) 광주(廣州) 선릉(宣陵) 동편에 있다. 을사년 2월에 처음 고양(高陽) 희릉(禧陵)에 모셨다가 명종(明宗) 17년 임술 9월 4일에 이장하였으며, 표석이 있다. 명종 때 홍춘경(洪春卿)이 지은 묘지에 정릉으로 이장한 자세한 사적이 적혀 있다.
비(妃) 공소 순렬 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좌의정 증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 수근(守勤)의 딸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년(1487) 성종 18년 1월 14일에 태어났고, 기미년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부부인(府夫人). 군호(君號)는 자세치 않다. 정덕(正德) 병인년 (1506) 9월 2일에 중전이 되고, 9월 9일에 사제(私第)로 쫓겨났으며 가정 정사년(1557) 명종 12년 12월 7일 병술에 승하하였다. 본가(本家)의 기록에는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실록(實錄)에는 7일로 기일(忌日)을 삼고 있으므로 지금 그에 따르고 있다. 수는 71세이다. 영조(英祖) 15년 기미년(1739)에 복위(復位)되어 종묘에서 제사지낸다. 능은 온릉(溫陵), 양주(楊州) 서쪽산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이다.
계비(繼妃) 선소 의숙 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정헌공(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靖憲公) 여필(汝弼)의 딸이다. 홍치 4년 신해년(1491) 성종 22년 7월 6일 경진에 호현방(好賢坊) 집에서 태어났다. 정덕 병인년(1506)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정묘년에 마침내 왕비로 책봉(冊封)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 10년 3월 2일 기미에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니, 수는 2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희릉(禧陵) 고양(高陽) 남쪽 원당리(元堂里) 이다. 처음에는 을해년 윤 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바른편 산에 모셨다. 김안로(金安老)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중종 32년 정유에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계비(繼妃) 성렬 인명 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 정평공(領敦寧府事坡山府院君靖平公) 지임(之任)의 딸이다. 홍치 14년 신유년(1501) 연산 7년 10월 22일 정묘에 태어나 정덕 정축년(1517)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太平館)에서 가례를 행하였다. 가정 44년 을축(1565) 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아들 아홉과 딸 열 하나를 두었다. 제1녀 효혜공주(孝惠公主). 장경왕후가 낳았다. 남편은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로,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아버지는 안로(安老)이다. 제2녀 의혜공주(懿惠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남편은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첨지 승권(承權)이다. 제3녀 효순공주(孝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남편은 능원군(綾原君) 구사안(具思顔)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현감 순(淳)이다. 제4녀 경현공주(敬顯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남편은 영천위(靈川尉) 신의(申?)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아버지는 목사 수경(秀涇)이다. 제5녀 인순공주(仁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1남 복성군(福城君) 미(嵋).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현감 증 찬성(贈贊成) 인범(仁範)의 딸이다.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신성군(信城君)이 봉사(奉祀)한다. 2남 해안군(海安君) 희. 숙의 홍씨(淑儀洪氏)가 낳았다. 부인은 진주류씨(晉州柳氏)로, 진산군(晉山君) 증 찬성 홍(泓)의 딸이며, 후처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참봉 증 찬성 홍유(弘猷)의 딸이다. 3남 금원군(錦原君) 영(?).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부인은 해주정씨(海州鄭氏)로, 도사 증 찬성 승휴(承休)의 딸이다. 4남 영양군(永陽君) 거(?).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부인은 순흥안씨(順興安氏)로, 판관 증 찬성 세형(世亨)의 딸이다. 5남 덕양군(德陽君) 기(岐). 숙의 이씨(淑儀李氏)가 낳았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판서 증 찬성 찬(纘)의 딸이다. 6남 봉성군(鳳城君) 완(?).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正) 증 영상(贈領相) 유인(惟仁)의 딸이다.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로, 판중추부사 증 영의정 세호(世虎)의 딸이다.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남편은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아버지는 참의 헌윤(憲胤)이다.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경빈 박씨가 낳았다. 남편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로,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서주(?疇)이다. 3녀 정순옹주(貞順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남편은 여성위(礪城尉) 문단공(文端公) 송인(宋寅)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아버지는 첨지 지한(之翰)이다. 4녀 효정옹주(孝靜翁主). 숙원 이씨가 낳았다. 남편은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으로,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아버지는 부사 침(琛)이다. 5녀 숙정옹주(淑靜翁主). 숙원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부정(副正) 신경(信璟)이다. 6녀 정신옹주(靜愼翁主).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천위(淸川尉) 한경우(韓景祐)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慈)이다.
12. 인종(仁宗)
인종은, 영정 헌문 의무 장숙 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니, 휘는 호이며, 자는 천윤(天胤)이요, 중종의 원자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정덕(正德) 10년 을해년(1515) 중종 10년 2월 25일 계축에 경복궁에서 낳았고, 경진년에 왕세자로 책봉했으며, 가정(嘉靖) 임오년(1522)에 관례를 행하여 입학하고, 갑진년(1544) 11월에 왕위에 올랐다가 을사년 7월 1일 신유에 경복궁 청련루(淸?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겨우 8개월이고 수(壽)는 31세였다. 능은 효릉(孝陵), 고양(高陽)의 희릉(禧陵) 서쪽산에 있고 을사년 10월 15일에 장사지내고 표석(表石)이 있다. 이언적이 행장을 지었고, 신광한(申光漢)일 묘지(墓誌)를 지었다.
비(妃)는 효순 공의 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 박씨(朴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요, 첨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용(墉)의 딸이다. 정덕(正德) 9년 갑술(1514) 10월 1일 경인에 태어나서 갑신년에 세자빈으로 책봉하여 가례(嘉禮)를 행하고, 갑진년에 왕비를 봉했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宣祖) 10년 11월 29일 신사에 승하하니 수는 64세요, 능은 효릉(孝陵),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이다. 무인년 2월 15일에 장사지냈다.
13. 명종(明宗)
명종 공헌 헌의 소문 광숙 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의 이름은 환(?), 자는 대양(對陽)이니,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갑오년 중종 29년 5월 22일 무자에 낳았다. 처음에 경원대군(慶原大君)으로 봉해졌는데, 을사년 7월 인종의 유명을 따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정묘년 6월 28일 신해에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22년이요 나이는 34세였다. 능은 강릉(康陵) 양주(楊州)의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정묘년 9월 22일 장사하였고 능에는 표석이 있다.
왕비 선렬 의성 인순왕후(宣烈懿聖仁順王后) 심(沈)씨의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돈녕부사 청릉부원군 증 영의정 익효공(敦寧府事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 강(鋼)의 딸이다. 중종 27년 임진에 탄생하여 을사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을해년 선조 8년 1월 2일 임인에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44세였으며, 능은 강릉(康陵) 을해년 4월 28일에 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부(?).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소생으로 명종 6년 신해에 탄생하여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부인은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인데 참판으로 좌의정의 증직을 받은 옥(玉)의 딸이다.
14. 선조(宣祖)
선조 소경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현문 의무 성예 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은, 휘가 연(?)인데, 처음 휘는 균(鈞)이었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비(?)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는,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이다. 가정 31년(1552) 임자 명종 7년 11월 11일 기축에 인달방(仁達坊) 사제(私第) 덕흥대원군의 집에서 나서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을 봉하였고, 융경(隆慶) 정묘년에 명종의 유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만력(萬曆) 경인년에 존호를 정륜 입극 성덕 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 올렸고, 갑진년에 지성 대의 격천 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만력 36년 무신 2월 1일 무오에 황화방(皇華坊) 별궁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요, 향년 57세였다. 대왕의 능 목릉(穆陵)은 양주 건원릉 둘째 산 언덕에 있다. 무신년 6월 초에 건원릉 서쪽 산등에 장사하였다가, 인조 8년 경오 11월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표석이 있다. 이정귀(李廷龜)가 행장(行狀)을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비(妃) 장성 휘열 정헌 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懿仁王后) 박씨는,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영돈부사 반성부원군 증 영의정(領敦寧府事潘城府院君贈領議政) 응순(應順)의 딸로서, 가정 을묘년 명종 10년 4월 15일 기묘(己卯)에 나서, 융경 기사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지냈다. 만력 경인년에 장성(章聖)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경자년 선조 33년 6월 27일 무술에 황화방 별궁에서 승하하였으니, 향년 46세였다.
선조 갑진년에 휘열(徽烈)이라는 존호를 추증하였고, 광해(光海) 경술년에 정헌(貞憲)이라는 존호를 또 추증하였다. 아들은 없었으며, 능은 목릉대왕의 능 왼편 언덕에 있다. 경자 12월 22일에 장사지냈으며, 처음에는 유릉(裕陵)이라고 하였었다.
계비(繼妃) 소성 정의 명렬 광숙 장정 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 김씨는, 본관은 연안(延安)이요,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증 영의정 의민공(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贈領議政懿愍公) 제남(悌男)의 딸로서 만력 갑신년 선조 17년 11월 4일 병술에 반송방(盤松坊) 사제에서 나서 임인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에서 가례를 지냈다. 숭정 임신년 인조 10년 6월 28일 갑오에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였으니, 수는 49세였다. 능은 목릉(穆陵), 대왕의 능 왼편 언덕에 있다. 임신 10월 6일에 장사지내고 처음에는 혜릉(惠陵)이라고 하였으며, 장유(張惟)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아들 열 넷과 딸 열 하나를 두었다. 제1남 영창대군(永昌大君) 의. 장가를 들지 못하고 죽었다. 제1녀 정명공주(貞明公主). 계묘년에 나서 계해년 12월 11일에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과 결혼하였다. 이상은 인목왕후가 낳았다.
1남 임해군(臨海君) 진(?).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양천(陽川) 허씨 참의 증 우찬성 명(銘)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기유년에 화를 입어 죽었다. 2남 광해군(光海君) 훈(琿). 공빈 김씨가 낳았다. 3남 의안군(義安君) 성(珹). 인빈 김씨 소생으로 일찍 죽었으며, 시호는 의회(懿懷)이다. 4남 신성군(信城君) 우(珝). 인빈 김씨가 낳았다. 평산(平山) 신씨(申氏) 판윤 증 영의정 입(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5남 추존 원종대왕(元宗大王). 인빈(仁嬪) 김씨가 낳았다. 6남 순화군(順和君) 보. 순빈(順嬪) 김씨가 낳았다. 장수(長水) 황씨 승지 증 좌찬성 혁(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7남 인성군(仁成君) 공(珙). 정빈(靜嬪) 민씨가 낳았다. 해평(海平)윤씨 판서 증 영의정 승길(承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화를 입어 죽었다. 뒤에 신원하여 주고 시호를 효민(孝愍)이라고 하였다. 8남 의창군(義昌君) 광(珖). 인빈 김씨가 낳았다. 양천(陽川)허씨 판서 증좌찬성성(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9남 경창군(慶昌君) 주(?). 정빈 홍씨가 낳았다. 창녕(昌寧) 조(曺)씨 부사 증 좌의정 명욱(明?)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0남 흥안군(興安君) 제(?). 온빈(溫嬪) 한씨가 낳았다. 청주(淸州) 한씨 판서 인급(仁及)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처음에는 흥안군에 봉하였으나, 갑자년에 이괄(李适)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폐하여 처형되었다.11남 경평군(慶平君) 늑(?). 온빈 한씨가 낳았다. 삭녕(朔寧) 최씨 군수 증 좌의정 윤조(胤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2남 인흥군(仁興君) 영(瑛). 정빈(靜嬪) 민씨가 낳았다. 여산(礪山) 송씨 군수 증 좌찬성 호성군 희업(熙業)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13남 영성군(寧城君) 계. 온빈 한씨가 낳았다. 창원(昌原) 황(黃)씨 지동 증 우찬성이중(履中)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시호는 효경(孝景)이다.
1녀 정신옹주(貞愼翁主). 인빈(仁嬪) 김씨가 낳았다. 달성위(達城尉) 서경주는, 본관 대구(大丘)이며 부친은 판중추 성(?)이다. 2녀 정혜옹주(貞惠翁主). 인빈(仁嬪) 김씨가 낳았다.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문목공(文穆公)의 본관은 행평이다. 부친은 영의정 방(昉)이다. 3녀 정숙옹주(貞淑翁主). 인빈 김씨가 낳았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문충공(文忠公)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부친은 영의정 흠(欽)이다. 4녀 정인옹주(貞仁翁主). 정빈(靜嬪) 민씨가 낳았다.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정간공(貞簡公)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부친은 참판식(湜)이다. 5녀 정안옹주(貞安翁主). 인빈 김씨가 낳았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 문정공(文貞公)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부친은 판서 동량(東亮)이다. 6녀 정휘옹주(貞徽翁主). 인빈 김씨가 낳았다. 전창위(全昌尉) 유정량(柳廷亮) 효정공(孝靖公)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친은 현감 열(悅)이다. 7녀 정선옹주(貞善翁主). 정빈 민씨가 낳았다.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부친은 군수 신중(信中)이다. 8녀 정정옹주(貞正翁主). 정빈(貞嬪) 홍씨가 낳았다. 진안위(晋安尉) 유적(柳?)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부친은 교리 시행이다. 9녀 딸 정근옹주(貞謹翁主). 정빈 민씨가 낳았다.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부친은 판서 이원(履元)이다. 10녀 정화옹주(貞和翁主). 온빈(溫嬪) 한씨가 낳았다.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부친은 동지 익중(益中)이다.
15. 광해군(光海君)
광해군의 휘는 혼(琿)이며, 선조의 둘째 아들이요,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을해년에 나서 처음에 광해군으로 책봉되었다가 만력(萬曆) 기유년에 왕위에 올랐고 천계(天啓) 계해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강화에 방치되었다가 갑자년에 이괄의 난리로 인하여 태안(泰安)으로 옮겼고 반적(叛賊)이 평정된 다음 강화에 돌아왔다. 병자년(1636) 겨울에 교동도(喬桐島)에 옮겼다가 정축년 2월에 제주(濟州)로 옮겼다. 신사년에 죽었는데 인조 19년 67세였다. 양주(楊洲) 적성동(赤城洞)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빈의 무덤과는 소 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거리였다.
폐비(廢妃)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는, 판윤(判尹) 자신(自新)의 딸로 병자년에 나서 계해년 10월에 죽었는데, 향년 48세이며 적성동에 장사지냈다. 광해의 무덤과 같은 언덕이면서 무덤은 다르다.
폐세자(廢世子) 지는 무술년에 나서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계해년에 폐위되었다. 뒤에 강화에 보냈더니 7월에 땅굴을 파고 몰래 빠져 나왔으므로 사헌부에서 논계(論啓)하여 사사하였는데 나이는 26세였다. 양주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에 장사지냈다.
폐세자빈(嬪) 박씨는 무술년에 났고 계해년 5월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원종(元宗)
원종 공량 경덕 인헌 정목 장효대왕(元宗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은 휘(諱)는 부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빈(仁嬪) 김씨가 선조 13년(1580) 경진 6월 22일에 경복궁의 별전(別殿)에서 낳았다. 정해년에 정원군(定遠君)으로 책봉되고 갑진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 11년 12월 29일 무인에 호현방(好賢坊)의 우사(寓舍)에서 승하하였는데 나이 40세였다. 인조가 왕위에 올라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하였다. 능은 장릉(章陵)이다. 김포의 뒷산에 있다. 경신년 2월에 처음에는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장사했다가 인조 정묘년 8월 27일에 이곳에 옮겨 장사하였다. 처음에 능의 칭호를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가 추숭한 후에 칭호를 올렸다. 표석(表石)이 있다.
비(妃)는 경의 정정 인헌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 구(具)씨이며 본관은 능성(綾成)이다. 좌찬성 증직 영의정 능안부원군 문의공(左贊成贈職領議政綾安府院君文懿公) 사맹(思孟)의 딸이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 11년 4월 17일 무술에 태어나서 경인년에 가례를 행하였다. 과거에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으로 책봉되었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부부인(府夫人)으로 올려 책봉되고 궁의 칭호를 계운(啓運)이라 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년 1월 14일에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는데 나이 49세였다. 숭정 임신년에 왕후로 추존하고 존호를 올렸다. 능은 장릉(章陵)이다. 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다. 병인년 5월 18일에 장사지냈고 능의 칭호는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다가 대왕을 옮겨 장사한 후에 합하여 흥경원(興慶園)이라 일컬었다. 추숭한 후에 능호를 올렸다.
4남을 두었다. 인조왕이 순서로 첫째이다. 제2남 능원대군(綾原大君) 보(?). 문화류씨(文化柳氏) 효립(孝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제3남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 장가들지 못하고 죽었다. 1남 능풍군 명. 김씨(金氏)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16. 인조(仁祖)
인조 헌문 열무 명숙 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은 휘는 종(倧)이며, 자는 화백(和伯)이고 위(位)에 오르기 전의 호는 송창(松窓)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천윤(天胤)이며, 원종(元宗)의 맏아들이다. 만력(萬曆) 23년 을미 선조 28년 11월 7일 해주(海州)에서 났다. 정미년에 능양도정(綾陽都正)으로 봉하고 조금 후에 군으로 봉하였다가, 천계(天啓) 계해년 3월 13일 경운궁(慶運宮) 별당에서 즉위하였다. 숭정(崇禎) 기축년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지 27년이며, 나이는 55세였다. 능은 장릉 교하(交河) 구읍(舊邑) 뒤에 있다. 처음 기축년 9월 20일 파주(坡州) 북쪽 운천리(雲川里)에 장사지냈다가 영종(英宗) 7년 신해 8월 30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경석(李景奭)이 행장을 지었으며, 조경(趙絅)이 지(誌)를 지었다.
왕비 명덕 정순 인열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문익공(文翼公) 준겸(浚謙)의 딸이다. 만력 22년 갑오 선조 27년 7월 1일 정축에 원주(原州) 읍내 사제(私第)에서 났으며, 경술년에 가례를 행하고 처음에는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하였다가, 천계 3년 계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숭정(崇禎) 을해년 인조 13년 12월 9일 을유에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42세였다. 능은 장릉(長陵) 인조의 능과 같은 둔덕에 있다. 처음에는 병자 4월 11일 파주 북쪽 운천리에 장사지냈다가 영종(英宗) 7년 신해 8월 30일에 이장하였다.
계비 자의 공신 휘헌 강인 정숙 온혜 장열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貞肅溫惠莊烈王后) 조씨(趙氏)는 본관은 양주(楊州)이며,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혜목공(惠穆公) 창원(昌遠)의 딸이다. 천계 4년 갑자 인조 2년 11월 7일 정사에 직산(稷山) 관아에서 났으며, 숭정(崇禎) 무인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를 행하였다. 효종(孝宗) 신묘년에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현종(顯宗) 신축년에 공신(恭愼)이란 존호를 더 올렸다. 숙종(肅宗) 병진년에 휘헌(徽獻)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병인년에 강인(康仁)이라는 존호를 또 올렸다. 무진년 숙종 14년 8월 26일 병인에 창경궁(昌慶宮) 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65세였다. 능은 휘릉(徽陵) 양주(楊州)에 있는데, 건원릉(健元陵) 서쪽 언덕이다. 무진년 12월 16일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6남 1녀를 두었다. 제1남 소현세자(昭顯世子) 휘는 왕이다. 민회빈(愍懷嬪) 금천(衿川) 강씨(姜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우의정 문정공(文靖公) 석기(碩基)의 딸이다. 둘째는 효종이다. 제3남 인평대군(麟坪大君) 묘(?). 복천(福川)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감사 증 우의정 단(端)의 딸이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양자로 가서 능창대군(綾昌大君)의 뒤를 이었다. 제4남 용성대군(龍城大君) 곤(滾) 일찍 죽었다. 이상은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낳았다. 1남 숭선군(崇善君) 징. 평산(平山) 신씨(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판 증 영의정 익전(翊全)의 딸이다.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2남 낙선군(樂善君) 숙(潚). 강릉(江陵)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봉사(奉事) 증 영의정 득원(得元)의 딸이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양자로 가서 의창군(義昌君)의 뒤를 이었다. 1녀 효명옹주(孝明翁主. 처음에 효명옹주로 봉하였으나 뒤에 삭호(削號)하였다.)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의 아내이다. 이상은 폐위된 조귀인(趙貴人)이 낳았다. 효종(孝宗) 신묘년에 세룡이 죄를 받고 죽으니 호를 삭탈하였다.
17. 효종(孝宗)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명의 정덕대왕(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은, 휘는 호(淏)이며, 자는 정연(靜淵)이다. 잠저에 있을 때의 호는 죽오(竹梧)이며,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만력(萬曆) 47년(1619) 기미 광해 11년 5월 22일 갑진에 경행방 본궁(慶幸坊 本宮) 인조의 잠저에서 낳았다. 천계(天啓) 병인년에 처음으로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하고, 숭정(崇禎) 을유년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기축년 5월에 즉위하고, 기해년 5월 4일 갑자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10년이고, 나이는 41세였다. 능은 영릉(寧陵)이다. 여주의 영릉(英陵) 동쪽 홍제동(弘濟洞)에 있다. 기해년 10월에 처음 양주의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장사하였다가 현종 14년 계축 10월 7일에 이곳으로 이장했는데, 표석이 있다.
왕비 효숙 경렬 명헌 인선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 장씨는, 본관은 덕수(德水)이요,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府院君) 증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유(維)의 딸이다. 만력 무오년 12월 25일 경진에 안산(安山)의 시골집에서 났고, 숭정 신미년에 이현별궁(梨峴別宮)에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처음에 풍안부부인(?安府夫人)으로 봉하였다가 을유년에 세자빈으로 책봉하였고, 기축년에 왕비로 봉하였다. 현종 2년 신축에 존호를 효숙(孝肅)이라 올렸다. 현종 15년 갑인 2월 24일 무오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는데, 나이 57세였다. 능은 영릉(寧陵)이다. 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이다. 갑인년 6월 4일에 장사하였다.
아들 하나와 딸 일곱을 두었다. 아들은 현종대왕(顯宗大王)이다. 제1녀 숙신공주(淑愼公主). 일찍 죽었다. 제2녀 숙안공주(淑安公主).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아내이다. 제3녀 숙명공주(淑明公主).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의 아내이다. 제4녀 숙휘공주(淑徽公主).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의 아내이다. 제5녀 딸 숙정공주(淑靜公主).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아내이다. 제6녀 숙경공주(淑敬公主). 흥평위(興平尉) 원몽(元夢)의 아내이다. 1녀 숙녕옹주(淑寧翁主). 안빈(安嬪) 이씨가 낳았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이다.
18. 현종(顯宗)
현종 소휴 연경 돈덕 유성 영종 임진년에 세실(世室)을 정할 때의 존호 순문 숙무 경인 창효대왕(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은, 휘는 연(?), 자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맏아들로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신사년(1641) 인조 19년 2월 4일 기유에 심관(瀋?)에서 낳았다. 갑신년에 귀국하여 기축년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고 신묘년 효종 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기해년(1659) 5월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즉위하고, 갑인년(1674) 8월 18일 기유에 창덕궁 재전(齋殿) 양심각(養心閣)에서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고, 나이는 34세였다. 능은 숭릉(崇陵)이다. 양주의 건원릉(健元陵) 서남쪽 다른 산등에 있다. 갑인년 12월 13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왕비 정헌 문덕 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김씨는,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증 영의정 충익공(忠翼公) 우명(佑明)의 딸이다. 임오년 인조 12년 장통방(長通坊) 사제(私第)에서 낳았고, 신묘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행하였으며, 기해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2년 병진에 존호를 현열(顯烈)이라 올리고 계해년 숙종 9년 12월 5일 임진에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서 승하하니 나이는 42세였고, 능은 숭릉(崇陵)이다. 현종대왕의 능과 같은 산등이며 갑자년 4월에 장사지냈다.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숙종대왕(肅宗大王)이다. 제1녀 명선공주(明善公主). 일찍 죽었다. 제2녀 명혜공주(明惠公主). 일찍 죽었다. 제3녀 명안공주(明安公主). 남편은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이다.
19. 숙종(肅宗)
숙종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의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고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는 명성 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다. 왕(王)의 소자(小字)는 용상(龍祥)이다. 현종2년 8월 15일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정미년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기유년에 어가(御駕)를 따라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고 또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신해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갑인년에 현종이 승하[禮陟]하자, 왕(王)이 보위(寶位)를 계승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무진년에 후궁(後宮) 장씨(張氏)가 비로소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탄생하니, 빨리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기사년에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사제(私第)로 물러나 살고 장씨를 올려서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경자년 6월 8일 경희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재위 46년이고 수는 60이다. 영조5년에 세실(世室)로 정했다. 왕의 원비(元妃)는 인경 왕비(仁敬王妃)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보사 공신(保社功臣)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인데, 경신년에 춘추 20에 훙(薨)하였다. 능은 익릉(翼陵)이다. 계비(繼妃)는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인데, 신사년에 춘추 35에 훙하였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계비 혜순 왕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영조33년 춘추 71세로 창덕궁 영모당에서 승하하였다. 후손이 없다. 명릉(明陵)은 고양에 경릉(敬陵) 동쪽기슭에 10월 20일에 장사지냈다. 표석(表石)이 있다.
6남 2녀가 있다. 숙빈(淑嬪) 최씨(崔氏)는 연잉군(延?君) 이금(李昑)을 낳았고, 명빈(?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헌(李?)을 낳았는데, 일찍 서거(逝去)하였다. 1녀는 일찍 죽었다. 인경왕후가 낳았다. 2녀는 일찍 죽었다. 인경왕후가 낳았다. 1남 경종(景宗)이다. 희빈 장씨가 낳았다. 2남 성수(盛壽) 일찍 죽었다. 희빈 장씨가 낳았다. 3남 영수(永壽) 일찍 죽었다. 육상궁 숙빈최씨가 낳았다. 4남 영조(英祖)다. 육상궁 숙빈최씨가 낳았다. 5남 일찍 죽었다. 육상궁 숙빈 최씨가 낳았다. 6남 연령군(延齡君) 명빈 박씨가 낳았다. 상산(商山) 김씨 판돈녕 동필(判敦寧東弼)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전비(前妃)는 단의 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로,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이고, 중궁 전하(中宮殿下)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연잉군은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연령군은 수찬(修撰) 김동필(金東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20. 경종(景宗)
경종 덕문 익무 순인 선효 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의 휘(諱)는 균이고, 자(字)는 휘서(輝瑞)이니,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장자(長子)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孫子)이다. 처음에 숙종이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음을 근심하셨는데,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무진년 10월 28일에 왕을 탄생하니, 숙종이 매우 기뻐하시어 여러 대신을 불러서 이르시기를,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아서 인심이 매인 곳이 없었으니, 오늘의 큰 계책(計策)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시고, 마침내 원자(元子)의 칭호(稱號)로 정하셨고, 세 살 때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셨다. 네 살 때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숙종께서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주며 이르시기를, “저궁(儲宮)이 방금 이 책을 강습(講習)하는데, 성품이 총명하여 심지(心智)가 날로 자라나니 학문에 뜻을 더함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였다.
8세 때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는데, 그 주선(周旋)함이 모두 절도에 맞고, 강(講)하는 음성이 크고도 맑아서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듣는 인사(人士)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마지않았다. 이 해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였다. 갑진년 7월에 병에 감염되어 8월 25일에 창경궁(昌慶宮) 별전(別殿)에서 영원히 군신(群臣)을 버리시니, 재위(在位)하신 지 4년이며, 춘추(春秋)는 37세였다. 대소 신료와 함께 왕의 공덕(功德)을 의논하고 삼가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덕문 익무 순인 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경종(景宗)’이라 하였으며, 능호(陵號)를 ‘의릉(懿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2월 16일 을유(乙酉)에 왕을 양주(楊州) 치소(治所)의 남쪽 신좌(申坐)의 남쪽 신좌(申坐) 인향(寅向)의 언덕에 받들어 안장(安葬)하니, 곧 새로 고른 좋은 택조(宅兆)였다.
왕비(王妃) 심씨(沈氏)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으로, 무술년에 빈(嬪)으로 훙서(薨逝)하여 경자년(庚子年)에 추책(追冊)하여 왕비(王妃)가 되었다. 계비(繼妃) 어씨(魚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이다. 영조 6년 춘추 26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의릉(懿陵)이다. 후손이 없다.
21. 영조(英祖)
왕의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인데, 숙종 원효 대왕의 아들이고 경종 선효 대왕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육상궁(毓祥宮) 숙빈(淑嬪) 최씨(崔氏)이고, 숙종 대왕 20년 갑술년 9월 13일 무인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탄생하였다. 6세가 되던 기묘년에 연잉군(延?君)에 봉(封)해졌고, 경종 대왕 원년(元年) 신축년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되었으며, 갑진년에 즉위(卽位)하여 병신년에 승하(昇遐)했으니, 왕위(王位)에 있은 지가 52년이고 수명은 83세였다.
처음에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 병으로 눕고 후사(後嗣)가 없으시므로 온 국민이 근심하였는데, 신축년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가 상소하여 저위(儲位)를 세우기를 청하고 대신(大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입대(入對)하여 대책(大策)을 정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왕대비(王大妃)께 여쭈어 명을 받아 대신들에게 일러 왕을 세제(世弟)로 책봉하셨다.
병신년 3월 5일 병자(丙子)에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시니, 수(壽)는 여든 셋이고 재위(在位)는 52년이셨다. 뭇 신하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삼가 시호(諡號)를 익문 선무 희경 현효(翼文宣武熙敬顯孝)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영종(英宗)이라 올리며 이해 7월 27일에 건원릉(健元陵) 서쪽 둘째 산등성이 해좌 사향(亥坐巳向)인 언덕에 장사하여 능호(陵號)를 원릉(元陵)이라 하고 전호(殿號)를 효명전(孝明殿)이라 하였다.
왕의 원비(元妃)는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이니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인데, 정축년에 훙서(薨逝)하여 홍릉(弘陵)에 장사하였다. 계비(繼妃)는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이다.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의 따님이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었으니, 맏이는 효장 세자(孝章世子)로서 정빈(靖嬪)한테서 탄생하였는데, 처음에 경의군(敬義君)을 봉하였고 을사년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며 무신년에 훙서하였다. 다음은 사도 세자(思悼世子)로서 영빈(暎嬪)한테서 탄생하였는데, 병진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기사년에 대리(代理)하였으며 임오년에 훙서하였다. .
효장 세자의 총사(?嗣)의 중함을 추념(追念)하여 사도 세자의 아드님에게 명하여 후사(後嗣)가 되게 하였다. 곧 정조이다.
2남 12녀를 두었다. 1남 진종(眞宗). 연호궁 정빈이씨(延祜宮 靖嬪 李氏)가 낳았다. 2남 사도제자(思悼世子). 영빈(暎嬪) 이씨가 낳았다.
22. 정조(正祖)
이름은 산이요,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홍재(弘齋), 영종 현효 대왕(英宗顯孝大王)의 손자이고, 사도 장헌 세자(思悼莊獻世子)의 아들이다. 영조 28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탄생, 기묘(己卯)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신사(辛巳)에 입학과 관례를 행하였다. 병신(丙申) 3월 10일에 즉위하고 경신(庚申)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재위 24년이고 춘추는 49였다. 어머니는 혜빈 홍씨(惠嬪洪氏)인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요, 왕비 김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김시묵(金時?)의 딸이다. 순조 21년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 춘추 69세였다. 자식이 없다. 능은 건릉(健陵)이다. 이보다 앞서 왕의 백부(伯父)인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고 자식이 없었는데, 급기야 장헌 세자가 죽자 영종이 왕으로 하여금 효장의 계통을 잇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하여 효장을 추존, 진종(眞宗)이라 하고, 비(妃) 조씨를 왕후로 하였으며, 장헌의 사당을 세워 경모궁(景慕宮)이라 했으며, 혜빈(惠嬪)은 혜경궁(惠慶宮)으로 추존하였다. 능은 건릉(健陵)이다. 수원 구치화산(舊治花山)에 있다. 표석(表石)이 있다.
2남 2녀를 두었다.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 휘 향(향). 의빈 성씨(宜嬪成氏) 생이다. 2남 순조(純祖). 1녀 의빈 성씨 생. 조졸(早卒)하였다. 2녀 숙선옹주(淑善翁主). 영명위 홍현주(永明尉 烘顯周)에게 하가(下嫁)하였다.
23. 순조(純祖)
휘(諱)는 공이고 자(字)는 공보(公寶)이다.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아들이다. 모비(母妃)는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다. 관향은 청풍(淸風)으로 청원부원군 김시목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수빈박씨(綬嬪朴氏)이다. 관향은 반남(潘南)이다.
11월 초6일 병이 있어 편안하지 못하다가 13일에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정(會祥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가 45세였다.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고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4월 19일 무신(戊申)에 교하(交河)의 인릉(仁陵)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모비(母妃)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니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의 따님이다.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실제로 왕을 낳았는데, 효의 왕후가 정종(正宗)의 명에 의하여 데려와서 아들로 삼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수빈은 증 영의정(贈領議政)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이보다 앞서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졸서(卒逝)하자 정종이 저사(儲嗣)에 대해 매우 근심을 하고 있던 중에 기유년 봄에 이르러 궁인(宮人)이 용이 나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조금 뒤에 수빈이 임신하였는데 바라보는 눈길이 맑고도 밝았고 이상한 신채(神彩)가 발산되었으므로 궁중의 상하가 모두 큰 경사가 있을 조짐으로 여겼다. 경술년 6월 18일 왕이 탄생하였다.
경신년 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6월에 정종(正宗)께서 승하하시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고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수렴(垂簾)하고서 같이 청정(聽政)하였으므로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왕은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결정하였고 감히 혹시라도 마음대로 한 적이 없었다. 임술년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과 아울러 폐종(廢宗)된 인, 인의 아내, 그 아들 담(湛)의 아내까지 죄에 얽어 넣어 죽게 하였으나 왕의 뜻이 아니었다. 뒤에 왕이 마침내 다시 홍낙임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인의 자녀들을 섬에서 나오게 하여 집을 지어주고 시집 장가보내었다.
기사년에 왕세자가 탄생하여 전궁(殿宮)에 진하(陳賀)하고 나서 상신(相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수빈(綬嬪)에게 진호(進號)하였는데, 이는 저하(邸下)를 위하여 존봉(尊奉)한 것으로 혜경궁의 의절(儀節)과 대등하게 하였다. 을해년에 혜경궁이 훙서(薨逝)하니 대공(大功)의 복제(服制)로 상복을 입었다. 신사년에 효의 왕후가 승하하자 왕은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경신년 때와 같게 하였으며 건릉(健陵)으로 이봉(移奉)하여 합부(合?)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수빈이 졸서(卒逝)하니, 왕이 시마 삼월복(?麻三月服)을 입었다. 제복(除服)하고 나서는 흰 의관[索衣冠]을 입고 3년 동안 지냈다.
정해년에 왕세자에게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대리(代理)하여 스스로 결단하도록 명하였다. 경인년에 세자가 훙서(薨逝)하니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다. 임진년에 두 공주(公主)가 또 서로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왕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안색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영위(榮衛)가 안에서 삭아져서 항상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았다.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2남 3녀를 낳았다. 1남은 효명 세자(孝明世子)이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익종 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2남은 요서(夭逝)하였다. 1녀는 명온 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하였다. 2녀는 복온 공주(福溫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으나, 모두 일찍 졸서(卒逝)하여 소생이 없다. 3녀는 덕온 공주(德溫公主)인데 남영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에게 하가하였다.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영온 옹주(永溫翁主)를 낳았는데 또한 요서(夭逝)하였다. 익종의 비(妃) 조씨(趙氏)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인데 헌종(憲宗)을 탄생하시었다.
24. 헌종(憲宗)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환(奐)이고 자는 문응(文應)이며 익종 효명 대왕(翼宗孝明大王)의 아드님이고 순종 성효 대왕(純宗成孝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조씨(趙氏)는 풍은 부원군(?恩府院君) 충경공(忠敬公) 만영(萬永)의 따님이다. 비(妃)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는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따님인데 계묘년에 훙서(薨逝)하였다. 계비(繼妃) 홍씨(洪氏)는 익풍 부원군(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따님이시다. 왕이 유년 5월 13일에 병으로 편찮아 6월 6일 임신(壬申)에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예척(禮陟)하시니, 재위는 15년 수(壽)는 23세이다.
대소 신하들과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삼가 경문 위무 명인 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라는 시호(諡號)와 헌종(憲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었다. 이해 10월 28일 임진(壬辰)에 건원릉(健元陵)의 서강(西岡)에 장사하니, 효현 왕후의 능(陵)과 동영이장(同塋異藏)이다. 경릉(景陵)이다.
경인년 5월에 익종께서 저위(儲位)에 계시다가 승하하였는데, 왕이 이때에 4세이었으나 빈전(殯殿)의 곡성(哭聲)을 듣고는 곧 유희(遊嬉)를 그치고 부복하여 소리 내어 울며 ‘나도 고운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였다. 이 해 9월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다. 왕이 즉위하여 황고(皇考)를 익종으로 추존(追尊)하고 순종비(純宗妃) 김씨를 대왕 대비로 높이고 모비(母妃)를 왕대비로 높였다. 대왕대비께서 수렴(垂簾)하고 정사를 같이 들으셨는데, 왕이 일마다 따르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셨다.
후사(後嗣)는 없다.
비(妃)는 효현 왕후(孝顯王后) 김씨(金氏)이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증(贈) 영의정(領議政)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무자년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경릉(景陵)에 장사하였다. 양주 건원릉 서쪽 언덕에 있다. 계묘년 12월 2일에 장사하였다. 표석이 있다.
계비(繼妃)는 정휘대비(貞徽大妃) 홍씨(洪氏) 이니, 영돈녕부사 익풍 부원군(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순종 31년 1월 22일 병자에 탄강하여 갑진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기유년 6월 9일에 대비의 칭호를 올렸다.
25. 철종(哲宗)
왕의 휘(諱)는 변(?)이요, 자는 도승(道升)이니,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제3자이다. 어머니는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관적(貫籍)이 용담(龍潭)이니, 학생 증 영의정 염성화(廉成化)의 따님이다.]이다. 신묘년(순조 31) 6월 17일 정유(丁酉)에 경행방(慶幸坊)의 사제(私第)[전계 대원군의 집이다]에서 탄강(誕降)하였다. 기유년(헌종 15) 6월 6일 임신(壬申)에 헌종이 승하(昇遐)하자,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맞아들여 헌종의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고(考)는 순조(純祖)요, 모비(母妃)는 순원 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관적이 안동(安東)이니,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이다. 처음에는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가 9일 을해(乙亥)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창덕궁(昌德宮)의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계해년(1863)에 승하하니, 재위 14년이요, 춘추는 33세이다.
계사(繼嗣)는 없고 딸 하나[궁인(宮人) 범씨(范氏) 소생이다]를 두었다. 장지(葬地)는 예릉(睿陵)[고양(高陽)]의 희릉(禧陵) 우강(右岡)인데, 갑자(甲子) 4월 7일에 장례를 모셨고, 표석(表石)이 있다]이다. 비(妃) 명순 대비(明純大妃) 김씨(金氏)[관적은 안동(安東)이다]는 영돈녕부사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인데, 정유년(헌종 3) 3월 23일 경자(庚子)에 탄강하여 신해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존시(尊諡)를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라고 올리고, 묘호(廟號)는 철종(哲宗)이다. 다음해 갑자년 4월 7일 정축(丁丑)에 예릉(睿陵)에 대장(大葬)하였는데, 실은 희릉(禧陵)의 오른쪽 산등성이다.
기유년 6월 임신일(壬申日)에 헌종 대왕(憲宗大王)께서 승하하시고 후사(後嗣)가 없자 순원 왕후께서 이르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혈맥(血脈)은 오직 헌종(憲宗)과 임금뿐이다.’ 하고, 드디어 대책(大策)을 정하고 강화(江華)의 잠저(潛邸)에서 봉영(奉迎)하여 왔다. 처음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하였다가 그 달 초 9일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빈전(殯殿)에서 대보(大寶)를 전수받은 다음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1남 6녀를 두었다.
26.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철종이 재위 14년(1863) 12월 8일에 후사없이 승하하자, 익종비이자 헌종모인 조대비(신정왕후)는 원로대신 영중추부사 정원용의 발의형식을 빌어 흥선군의 제2자인 12세의 명복을 익종대왕의 뒤를 잇는 것으로 명하였다. 이에 따라 명복은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진 후 즉위하였으며, 헌종비와 철종비가 생존하고 있었지만 조대비는 어린 임금의 어머니가 되어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고종의 가계는 영조(英祖)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에서 시작된다.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洪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정조(正祖)이고, 사도세자와 양제(良?) 임씨(任氏)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과 경빈박씨 사이에서 은전군(恩全君) 세 아들이 태어났다. 둘째 아들인 은신군 진(?)이 17살의 나이로 후사없이 죽자, 순조 15년 12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5대손인 생원 병원(秉源)의 아들 구(球)가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南延君)으로 봉작받았다. 남연군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가 흔선군(興宣君) 하응으로 흥선군은 영조의 고손자(高孫子:玄孫)가 되는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15세에 흥선부정(興宣副正), 17세에 동몽교관, 22세에 흥선정(興宣正), 24세에는 흥선군(興宣君)으로 봉작을 받았다. 여흥(驪興) 민씨(閔氏) 판돈녕(判敦寧) 효헌공(孝獻公) 치구(致久)의 딸(?~1899)을 부인으로 맞아 장자 재면(載冕:1845~1912)과 차자 재황(載晃: 1852~1919, 命福, 熙) 및 두 딸을 두었으며, 서자(庶子) 재선(載先)과 서녀 하나가 있었다.
고종은 1852년 7월 25일(음력) 청방(靑坊) 소재의 흥선군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다. 자는 성림(聖臨)으로, 후에 명부(明夫)로 고쳤으며, 호는 주연(珠淵)이다.
무후(無後)한 대군(大君) 왕자(王子)를 모두 계후(繼後)케 하고, <선원속보(璿源續譜)>의 간행,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하 제파(諸派)의 항렬(行列)을 확정하고 타성(他姓)도 이에 준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자?세손의 묘호를 원(園)으로 승격시키고, 효창원(孝昌園) 외의 원을 개호(改號)토록 하였으며, 종과를 설치하는 등 종실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이는 일본의 양위협박의 단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고종은 1907년 7월 황태자에게 국정으로 대리하게 하였으나, 일본은 이에 만족치 않고 양위를 강요하였다. 때문에 황태자에게 전위(傳位)하고, 영왕(英王)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통감부는 1907년 7월 20일 중화전에서 양위식으로 권정례(權停禮)를 마련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합병되면서 리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승하하였다. 장지는 금곡에 있는 홍릉(洪陵)으로 명성황후의 묘와 합장되었다.
제26대 왕 고종태황제(이하 고종이라 함)은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43년 7개월 간 재위하였다. 고종은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1866년 3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는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정호(貞鎬)이다. 16세되던 1866년 고종의 생모인 흥선대원군 부대부인(興宣大院君 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고종 8년인 1871년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만에 요절하였고, 고종 11년인 1874년 2월 8일 후일 순종황제가 되는 세자 척(?)을 낳았다. 이 외에도 두 아들과 딸을 더 낳았으나 모두 일찍 요절하였다. 1895년 8월(음력)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함으로써 격동의 시기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생을 마감하였다. 1895년 10월에는 왕후의 위호를 복립(復立)했고,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고종은 황후 민씨 이외에도 몇 명의 후궁을 두었다. 순헌황귀비 영월엄씨는 증 찬정(贈 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18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이름은 선영(善英)이고, 고종보다 2살 연하이다. 8세 때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다가, 황후가 시해된 후인 고종 33년 즉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부터 고종을 모셔, 1897년 9월 25일 아들 은(垠)을 낳고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다시 순비(純妃)로 책봉되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로 황제가 되면서 순헌귀비(純獻貴妃)로 진봉되었다. 은(垠)은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는데, 국운의 쇠망과 함께 유학의 명목하에 11세의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귀인(貴人) 영보당(永保堂) 이씨(李氏) 이름은 순아(順娥)는 고종의 1남인 완화군(完和君) 선(?)을 낳았다. 귀인 장씨(張氏)는 고종의 3남인 의화군(義和君) 강(堈) 즉 의왕(義王)을 1877년 출산하였다. 귀인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는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유일한 생장옹주인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낳았다. 이외에도 귀인 광화당(光華堂) 이씨가 왕자 육(堉)을 낳았고, 귀인 정씨(鄭氏)가 왕자 우(?)를 낳았으며, 귀인 내안당(內安堂) 이씨가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27.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휘는 척(?)이요,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으로 이는 고종이 그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지어준 것이다. 출생 다음 해인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77년 1월에 사부(師傅) 상견례를 시작으로 왕자로서의 수업을 시작하였다.
1882년 나이 9세 되던 해, 고종 자신이 직접 아들의 손을 잡고 성균관 문묘에 나아가 배알하고 입학례를 행하였다. 얼마 후에는 민씨(후에 순명효황후)를 맞아 가례를 행하였다. 그분는 여은부원군 충문공 민태호의 따님이다. 1897년 9월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왕세자에서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부인 순명후가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3년의 상기를 마친 1906년, 황태자비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조정의 의견을 따라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았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순종은 고종의 양위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조선은 5백년의 막을 내렸다. 이 후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청덕궁에 거처하면서 이왕(李王)으로 불려졌다. 폐위된 후 16년 간 살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계기로 일반시민과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후손은 없다.
28. 영왕(英王)
영왕(英王;1897~1970)은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로 1897년 10월 20일 엄귀비(嚴貴妃) 몸에서 탄생하였다. 영왕의 이름은 은(垠). 1900년 영왕(英王)으로 책봉되고 해아밀사사건 직후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고 이어 8월 7일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敦德殿)에서 황태자 책봉식을 가졌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이토(伊藤博文)에 이끌려 10세 나이로 1907년 12월 5일 신교육 이수를 위한 일본 유학의 명분이나 인질로 일본에 가 그곳에서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딸 마사코(한국명 方子)와 1920년 4월 혼인하였다. 일본에 강제체류하는 동안 일본육사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고국의 어머니 엄귀비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였다. 1911년 7월 18일 사후에야 귀국, 모자상봉을 하게 된다. 일본황실의 예우의 명목으로 영친왕(英親王)으로 칭호를 하였다. 영왕은 1922년 5월 4일, 1938년 4월 23일, 1943년 7월 1일 세 차례 방자비와 함께 진명학교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1963년 11월 23일 인질생활 56년 만에 정식으로 환국, 방자비와 동행하였다. 방자비와의 사이에서 진(晉),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아들은 성장하니 곧 황세손(皇世孫) 구이다.
유택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영원(英園) 이다. 1989년 4월 30일 방자전하가 작고하자 합장하였다.
황세손 구(玖)는 아버지 영왕과 어머니 방자비 사이에서 1931년 12월 29일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왕공귀족학교(王公貴族學校) 학습원 중등과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1950년 8월 학습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어 맥아더 사령부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캔터키주 센터칼레지고등학교에 편입하고, 1956년 5월 보스톤 메사추세츠 MIT 공대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하였다. 슬하엔 자녀가 없다. 15년은 일본에서, 15년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1963년 11월 12일 국적을 회복하였다.
Ⅲ.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연혁
현재 전주이씨는 전국에 약 700만에 이른다. 이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의 왕자군들을 파시조로 하여 씨족을 번성하여 왔다는 것에 기인한다. 전주이씨는 우리나라 다른 성씨와는 다르게 조선왕조에 와서 크게 번성한 것은 재삼 강조할 여지가 없겠으나,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면서 왕실 내에서 왕자군의 생산이 점차 줄어들면서 새로운 파조 또한 생산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는 종친부(宗親府)를 두어 왕실과 종친을 보호하는 기구로 하였으며 선원록(璿源錄)를 만들어 왕의 자손과 후손들의 혼인과 생몰연대를 기록하여 전주이씨의 친족을 결속하고 번성한 종친의 근본 기록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국권을 상실하면서 종친부는 물론이고 구심체가 또한 산일되고 말았다.
해방 후 조선왕실의 후광을 부활하려는 친족들의 노력이 우선 파시조를 중심으로 모이고 다시 전 전주이씨 친족들이 연합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으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 일제가 망하고 해방이 되었으나 혼란기를 맞이하여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그러나 핏줄은 영원하여 전주이씨 일가끼리 모이자는 기운이 종친 친목회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종약원의 효시가 되었다고 하겠다. 1955년 5월 14일 창경원(昌慶園: 지금의 창경궁) 수정(水亭)에서 재경(在京) 전주이씨 유지종친(有志宗親)이 모여 전주이씨대동화수회(全州李氏大同花樹會)를 구성했다.
1956년 10월 15일 이범승(李範昇) 이사장 명의로 문교부장관에게 사단법인 설립을 인가해 줄 것을 신청하여, 1957년 4월 3일에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설립되었다.
1963년 12월 1일 종약원에서는 11월 22일 귀국한 영친왕환국(英親王還國)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백일장을 개최하였다. 한시와 시조를 짓게 하여 339편이 들어와 예심을 거친 159편에서 등급을 가려 한시?시조 각 8편씩을 입선시켰다.
1966년 2월 3일 조선조 최후의 황후인 순명효황후 윤씨께서 승하하셨다. 금곡(金谷) 유릉(裕陵)에 합폄했다. 그 후 1970년 5월 1일에 영친왕(英親王)이 승하했다. 금곡릉역(金谷陵域)에 모셨다.
이에 새로운 이화회관(李花會館) 건립의 필요성을 느껴 1982년 12월 28일 제183회 상임이사회에서 이화회관건립추진위원회 구성을 결의, 계획대로 전국 종원의 헌성금을 모아 지금의 이화회관을 짓게 되었다. 현재 이화회관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사무처를 두고 모든 종친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글쓴이 : 李 範 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