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4-09 11:22 수정일 : 2018-03-02 23:26
사천목씨의 연원
목씨의 유래는 안타깝게도 문헌기록상의 직접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형제상목설(兄弟相睦說)이 세간(世間)에 전해져 왔고 우리 집안에도 이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즉, 옛날 경상도 사천(泗川) 지방에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의 우애가 어찌나 깊었던지 그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나라(임금)에서까지 이 소문을 듣고 확인한 뒤, 그 지극한 형제 애 (兄弟愛)를 표창하기 위하여 「화목」을 뜻하는 「睦」자를 성씨로 내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설화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우리의 고전소설에 작가 · 연대 미상(未詳)의 한글 필사본 「목시룡전(睦始龍傳)」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분량 115페이지) 이 「목시룡전」은 「홍부전」「적성의전」(觀成義傳)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셋 밖에 없는 형제간의 윤리문제를 다룬 소설로서. 다른 두 소설은 형제간의 무정함 과 시기질투를 줄거리로 하고 있으나. 「목시룡전」만은 형제의 지극한 정의 (情詞)와 사랑을 통하여 형제상목(兄弟相睦)이 개인적 · 가정적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 화평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적 인륜(人倫)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국문학사상 매우 독특한 위치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김기동「한 국고전문학연구」-1887. 교학사 참조) .
우리나라 성씨 중 「형제상목설」을 내력(來歷)으로 하는 성씨는 사천목씨 뿐이며, 소설 「목시룡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형제상목설」이 단순한 설화가 아닌 실제적 사실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반증자료가 된다 하겠습니다.
문중의 상징
사천목씨의 근원(전면)
우리 목씨(睦氏)는 선대 (先代)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화목 · 돈독하여 화목할 목 (睦)자로 성(姓)을 얻게 되었고, 본관을 사천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했다고 전해 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가 본관이 서로 다르나 목씨의 본관이 사천 하나 뿐인 것은 그 뿌리가 한분에게서 이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천목씨시조는 고려조에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정공 목효기(郞將同正公 諱孝基)이시고, 2세 합문지후공(闇門祗侯公 諱德昌)은 고려 원종 10년에 최탄(崔坦) · 한신(韓愼)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순국하시어 충신일등(忠臣一等)으로 영주군에 봉(封)해지신 분이며, 3세 직제학공(直提學公: 諱俊平)은 비서성판사, 보문각 직제학을 지내신 분이다.
우리 목문(睦門)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인재를 배출하여 당당히 명문대가의 위치에 올랐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墓所)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내에 단비로 모시고 있다.
우리 목문의 자랑(후면)
고려조에서 무신 가문(武臣家門)으로 성망(聲望)이 높았던 우리 목씨는 단본(單本)이라 사람 수는 적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였으며 정승 판서를 비롯하여 당상관(堂上官) 48명을 배출 함으로써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니 이는 우리 문중의 큰 자랑이다.
특히, 11세조 현헌공(玄軒公 諱世拜)은 중종 때 명현 (名賢)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이신 두일당공(返日堂公)은 대사간 · 도승지 · 이조참판 등을 지내시고 선조 25년 77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드셨다. 그의 아드님 매계공은 예조참판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시고 인조 27년 77세에 기로소에 드셨으며 영의정의 증직(贈職)과 충정공(忠貞公)의 시호(論號)를 받으셨다. 또 그의 아드님 수옹공은 이 · 호 · 예 · 형조판서와 우의정 ·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시고 숙종 14년 71세 에 기로소에 드셨다.
기로소(耆老所)는 반드시 문과급제를 거쳐 정2품(正二 品)이상의 벼슬을 지내고 수(壽)가 70세 이상의 원로만 이 둘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예우(禮遇)기구이며. 연(連) 3대에 걸쳐 기로소에 드신 가문은 조선조 500년 동안 유독 우리 목문만이 갖고 있는 자랑이다.
문중의 종훈
우리 사천목씨(泗川睦氏)의 종훈은.
崇祖敬慕 (숭조경모 )
親相敦睦 (친화돈목)
宗班暢達 (종반창달)
입니다. 글자의 뜻대로 풀어보면 “崇祖敬慕”는 조상을 받들어 모시고 공경하자는 말이고, ‘‘親和敦睦’’은 종친 간에 서로 화합하여 친분을 두텁게 하자는 뜻이며,
宗班暢達은 종원들이 협력하고 도와서 앞날에 진보와 발전을 기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훈에 담긴 뜻은 표면상의 글귀 풀이만으로는 미흡합니다. 즉, 崇祖敬慕’의 말 속에는 선조(先祖)들의 유지(遺志), 유덕(遣德), 유산(遺産)을 되새겨 받들고, 이를 경애하며 따르고 선양(宣揚)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를 오늘에 있게 한 조상의 발자취 또는 혼백이 연면히 우리들에게 이어져 있음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親和敦睦“에는 타문중과는 다른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구족보(1709년에 발간된 기축보(己丑譜) 서문에서 보면 우리 목씨는 영남의 사천현에 남달리 형제상목(兄弟相睦)하는 자가 있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로 인하여 성을 화목할 목(睦)자로 얻게 되었다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성은 같으나 본(貫鄕)이 다른 문중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천목씨만은 득성(得姓) 당시의 맥(脈)이 오늘까지 이어져서 전국 각지에 산거(散居)하고 있더라도 오직 관향이 같은 사천목 씨 단본(單本)일 뿐입니다.
한국의 성은 표음(表iif)의 성이 아니고 표의(表意)의 성임을 감안할 때 睦(회-목할 목 = 和, 친목할 목 = 親 信)의 성을 가진 자. 이 어찌 親和敦睦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어느 종문들보다 한층 더 친화협력하고 두텁고 끈끈한 정(·情)으로 굳게 맺어져야 함은 현재에 사는 목씨들의 당연한 도리이고 전래적 의무로서 자랑스런 목씨 문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宗班暢達”이란 어귀에도 또한 깊은 염원과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종반」이라 함은 상하 좌우 천지간의 「우리 모두」를 일컬음이요, 「창달」은 이 모두가 더불어 전진 · 영달하자는 뜻입니다.
지난날에는 훌륭하신 조상님이 여러분 계시어서 명문 세가의 위용을 갖춘 때도 있었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는 별로 빛이 나지 못하더니, 최근에 와서는 걸출한 인재가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달」에는 미래지향적 희망과 의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자라나는 후손들을 자랑스런 인재로 가꾸어보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종친회가 장학사업에 역점을 두는 소이(所以) 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종훈은 과거를 돌이켜보며 후손된 도리를 다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종친들이 타 문중의 귀감이 되도록 친애와 화목을 돈독히 하자는 것이고 미래를 향하여 서로 도와서 더 불어 발전하며 후손들을 올바르게 육영(育英) 하자는 뜻을 담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 · 현재 · 미래를 이어 나가자는 뜻입니다. (종보 제3호)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목씨는 남한에 8,7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사천목씨조상인물
목덕창(睦德昌) 동정(同正) 효기(孝基)의 아들. 고려 때 교위(敎委)를 지낸 후 1269년(원종 10) 기관(記官) 최 탄(崔坦)과 한 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주수(靈州守 : 지금의 의주)로 성(成)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목준평(睦俊平) 고려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목군경(睦君慶) 고려조에서 중현대부(中顯大夫)로 흥위위 대호군(興威衛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목충달(睦忠達) 고려 때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士)를 지냈다.
목손검(睦孫儉) 고려 때 신호위 정용 낭장(신虎衛精勇郎將)을 지냈다.
목인길(睦仁吉) ? ~ 1380 (우왕 6)
공민왕(恭愍王)이 원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 그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1등공신이 되고, 1359년(공민왕 8) 기철(奇轍)의 일당을 제거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후에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의 남행(南行)을 호종,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 로 1363년 다시 공신(功臣)이 되었으며, 지밀직 사사에 올랐다. 1365년 첨의 평리(僉議評理)가 되 었으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로 전주(全州)에 유배, 1367년 오인택(吳仁澤)과 함께 신 돈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청주(淸州)에 장 류(杖流) 뒤에 다시 기용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우왕 때에 전라도(全羅道)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1380년(우왕 6) 대사헌(大司憲) 우현보(禹玄寶) 등으로부터 모반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고 삭직(削職), 유배되었다.
목진공(睦進恭) 고려말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조(吏曹) 및 공조(工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예․병․형․공(禮兵刑工) 4조(四曹)의 참의(參議)와 승정원(承政院) 대언(代言)을 지냈다. 후에 경기, 강원도 도관찰사(京畿江原道觀察使),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후 1422년(세종 4)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목보남(睦寶男) 조선 때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역임하였다.
목계남(睦繼男) 조선 때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목치(睦 致)지류(之柳)의 아들.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목철성(睦哲成) 자는 명지(明之), 군수(郡守) 보남(寶男)의 맏아들. 조선 때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목철경(睦哲卿) 자는 경지(卿之), 호(號)는 오정(梧亭), 군수(郡守) 보남(寶男)의 아들. 1471년(성종 2) 생원(生員)이 되어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중훈대부(中訓大夫)로 괴산군사(槐山郡事)를 역임하였다.
목철중(睦哲重) 자(字)는 명중(明重). 조선 때 흥해 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목희안(睦希顔) 자는 여우(如愚). 조선 때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詞直)을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목희증(睦希曾) 자는 노옹(魯翁). 조선 때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역임하였다.
목세준(睦世準) 조선 때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냈다.
목수흠(睦守欽) 자는 요경(堯卿). 조선조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목세칭(睦世秤) 1487 (성종 18) ~ ?
자는 공달(公達), 호는 현헌(玄軒), 희안(希顔)의 아들. 김 식(金 湜)의 문인. 기묘사화(己卯士禍 : 1519) 이후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향리(鄕里)에서 학문을 닦았다. 아들 첨(詹)의 공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목순희(睦舜姬)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목첨(睦 詹) 1516 (중종 11) ~ 1593 (선조 26)
자는 사가(思可), 호는 두일당(逗日堂), 시우당(時雨堂), 세칭(世秤)의 아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 등 청환직을 거쳐 1565년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후청홍도 관찰사(淸興道觀察使) 때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했다가 파면되었다. 1567년(명종 22) 대사간(大司諫)에 기용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도승지(都承旨),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했다. 1591년(선조 24)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서 의병을 모집, 우성전(愚性傳)에게 지휘를 맡기고 평안도(平安道)에 있는 선조(宣祖)로부터 능(陵)을 보살피라는 명을 받고 가던 중 병사했다.
목서흠(睦叙欽) 1571 (선조 4) ~ 1652 (효종 3)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貞), 이조 참판(吏曹參判) 첨(詹)의 아들, 대흠(大欽)의 형. 1597년(선조 30) 음보(蔭補)로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03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지내고, 북부주부(北部主簿)를 거쳐 1606년 양구현감(楊口縣監)에 재 직중 문묘낙서(文廟落書)사건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8년(광해군 10)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내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인조(仁祖)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宣諭御史)가 되었고, 직강(直講)․사예(司藝)․광주 목사(廣州牧使) 등을 거쳐 1625년(인조 3) 지제교(知製敎), 그후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가 사직,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했다. 양양 부사(襄陽府使),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거쳐 1632년 참찬관(參贊官), 좌승지(左承旨), 1635년 좌부승지(左副承旨), 이듬해 우승지(右承旨), 1646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해 노인직(老人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목장흠(睦長欽) 1572 (선조 5) ~ 1641 (인조 19)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 이조 참판(吏曹參判) 첨(詹)의 아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봉교(奉교)를 거쳐 전적(典籍)․감찰(監察)․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판서(判書)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군수(固城郡守)로 나갔다.
그 후 직강(直講),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내고 1608년 응교(應校)․집의(執義), 광해군(光海君) 초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보직, 이해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고 김제남(金悌男)을 죽일 때 이를 막으려고 하다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좌천,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에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승지(承旨)에 임명되고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서 1641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목대흠(睦大欽) 1575 (선조 8) ~ 1638 (인조 16)
자는 상경(상卿), 호는 다산(茶山). 죽오(竹塢). 이조 참판(吏曹參判) 첨(詹)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가 되고, 160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612년(광해군 4)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무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난이 평정한 후 호종(扈從)의 공으로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오 르고, 1633년(인조 11)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다. 시문(侍文)에 뛰어났다.
목취선(睦取善)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목성선(睦性善) 조선 때 삼사(三司)를 지냈다.
목겸선(睦謙善) 조선에서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목행선(睦行善) 1609 (광해군 1) ~ 1661 (현종 2)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南磵), 호조 참판(戶曹參判) 장흠(長欽)의 아들. 숙부인 대흠(大欽)에게 입양(入養). 1630년(인조 8) 진사(進士)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1636년 경기도사(京畿道事)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을 세웠다.
병조 좌랑(兵曹佐郞)․지평(地平)․수찬(修撰)을 지내고, 1649년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대사성(大司成)․참의(參議)․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등을 역임, 1653년(효종 4)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내고, 1659년(현종 1)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목내선(睦來善) 1617 (광해군 9) ~ 1704 (숙종 30)
자는 내지(來之), 호는 수옹(睡翁), 수헌(睡軒),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서흠(叙欽)의 아들. 허 목(許 穆)의 문인. 1646년(인조 24) 진사(進士)가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地平)․교리(校理)․판결사(判決事)등을 역임하고, 1672년(현종 13)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5년(숙종 1) 형조판서(刑曹判書)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호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남인(南人)으로서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때 삭직(削職), 1683년 다시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기용되었다. 그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689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서인(西人)을 제거하는데 가담, 좌의정(左議 政)에 올랐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699년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썼다.
목임일(睦林一) 조선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목임유(睦林儒) 조선조에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목임중(睦林重) 조선 때 삼사(三司)를 지냈다.
목천성(睦天成) 1630 (인조 8) ~ 1687 (숙종 13)
자는 군평(君平), 호는 죽파(竹波). 1651년(효종 2) 진사(進士)가 되고, 1673년(현종 14)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에 기용, 1676년(숙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 1679년 사인(舍人), 다음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목창명(睦昌明) 1645 (인조 23) ~ 1695 (숙종 21)
자는 융세(隆世), 호는 취강(翠岡), 관찰사(觀察使) 행선(行善)의 아들. 1670년(현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674년(숙종 즉위) 진향부사(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헌납(獻納)․응교(應校)를 거쳐 1677년(숙종 3) 승지(承旨), 다음해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후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사직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南人)으로서 대사간(大司諫)에 복직,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내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92년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나,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탄핵을 받고 삭주(朔州)에 안치(安置),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1699년(숙종 25) 복관(復官)되었다.
목천수(睦天壽) 조선 때 병정(兵正)을 지냈다.
목지경(睦趾敬) 조선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목호룡(睦虎龍) 1684 (숙종 10) ~ 1724 (경종 4)
참판(參判) 진공(進恭)의 후손. 처음에 노론(老論)으로 김용택(金龍澤), 이천기(李天紀) 등과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보호하는 편이었으나 1722년(경종 2) 소론(小論)에 가담,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로 노론(老論)의 김창집(金昌集)등 4대신가 그 일당 60여명이 정종(正宗)을 시해(弑害)하려 하며 자기도 처음에 이 모역에 가담했다고 고발, 일대 옥사(獄事)가 일어나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이 숙청되었다. 이에 고면의 공으로 부사공신(扶사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724년 영조(英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무(誣告)로 일어났음이 밝혀지자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급사(急死)했다. 죽은 후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수(梟首)되었다.
목천현(睦天顯)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목천임(牧天任)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목시민(睦時敏) 조선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목종하(睦宗夏)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목선항(睦善恒) 조선조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목조수(睦조洙) 조선 때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목만중(睦萬中) 1727 (영조 3) ~ ?
자는 공겸(公兼),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 조우(祖禹)의 아들. 1759년(영조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도사(都事)를 지내고 1786년(정조 10)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1801년(순조 1) 대사간(大司諫)으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영의정(領議政)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남인(南人) 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감행했으며, 뒤에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목용석(睦用錫) 조선 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