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소주가씨(蘇州賈氏),시조 가유약, 역대인물

작성일 : 2017-11-09 17:11 수정일 : 2020-04-28 15:35

시조 

가씨(賈氏)는 소주(蘇州)를 단본으로 하며 중국(中國) 주(周)나라 문무(文武)의 후예(後裔)로서 명(明)나라 신종(神宗)때 병부 상서(兵部尙書)겸 계요안찰사(薊療安察社)를 지낸 가유약(賈維鑰)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서기 1593년(선조 26)에 신종(神宗)의 명으로 원병을 이끌고 이여송(李如松)․마 귀(麻 貴) 등과 함께 우리 나라에 들어와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의 싸움에 공(功)을 세우고 돌아갔다.

본관

소주(蘇州)는 중국(中國) 강소성(江蘇省) 남동부 태호(太湖) 동안(東岸)에 위치한 고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에 오(吳)나라의 국도(國都)로 발전하였고, 역대에 걸쳐 주변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인 아들 상(祥)과 병부 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孫子) 침(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朝鮮)에 들어와, 소사(素沙 : 지금의 부천)․남원(南原) 등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부산(釜山) 포구(浦口)의 싸움에서 용전(勇戰)하던 중 아들 상(祥)과 함께 장렬하게 전산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침(琛)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慶南蔚山西生鎭道督洞) 양지 바른 것에 무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서 명(明)나라 원병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도독(道督) 마 귀(麻 貴)가 침(琛)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묘을 두고 어찌 이 곳을 떠나겠느냐”하며 조선에 귀화하여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울산(蔚山)에 자리잡아 안동 부사(安東府使) 권 순(權 純)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1647년(인조 25) 침(琛)이 죽자 슬하의 아들 성(晟)․호(昊)․병(昺)․수(遂) 4형제는 충남(忠南) 서산(西山)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 나라 가씨(賈氏)의 터전을 이루었으며, 1851년(철종 2)에는 시조(始祖) 유약(維鑰)과 아들 상(祥), 손자 침(琛)「삼대(三代)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사당(祠堂)과 정문(旌門)이 서산(西山) 가씨(賈氏) 마을에 내려졌다.

그후 가씨는 서산(西山)을 중심으로 한 충남 일대에서 충효(忠孝)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이 크게 번성하였고, 시조 유약의 14세손 행건(行建)이 헌종(憲宗) 때 충청도 안흥 양진(忠淸道安興梁鎭)의 수군 병마절제사(水軍兵馬節制使)를 지내며 천서이 어질어 「도덕군자(道德君子)」라는 칭송이 높았다.

그의 아들 일영(日永)도 청종(哲宗) 때 울진 현령(蔚珍縣令) 등을 지내며 벼슬이 높았고, 선정을 베풀어 그가 울진을 떠나올 때 군민들이 암벽을 갈아 그이 공적을 새겼다고 하는 <마애비(磨崖碑)>가 지금도 전한다.

일영(日永)의 아우인 중영(中永)은 철종(哲宗) 때 충량과(忠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高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4세손 익건(翊健)은 1866년(고종 3)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그외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침략기에 선조(先朝)의 뜻을 이어 나라에 충성한 인물로는 의영(義永)과 병준(秉俊)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후덕(厚德)하고 자선심(慈善心)이많기로 이름났던 이들 부자는 사재(私財)를 털어 가나한 이웃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공헌했으며, 호서(湖西) 일대의 한학자(漢學者)로 학명을 떨쳤던 형로(衡魯)는 항일투재에 헌신하여 일경(日警)으로부터 주목(注目)받는 대상이 되었다.

신․구(新舊)학문과 사학(史學)에 정통했던 병준(秉峻)은 서산에 농림중학교(農林中學校)를 설립하여 영재교육(英才敎育)을 통한 광복운동과 농사개량 및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하여 면민(面民)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며, 시조의 18세손 재연(在衍)은 인천상고 재학시와 은행원 신분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가 옥고로 순국했다.

민족계몽중 일본 헌병의 목을 베려 했던 정로(晶魯:시조의 17세손)와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재창(在昌)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정로(廷魯)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예산(禮山)․서산(西山)․공주(公州)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한국민주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여 충절의 전통가문인 소주 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소주 가씨는 남한에 총 2,812가구 9.0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렬표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口영(永) 병(秉) 口노(魯)
口섭(燮)
재(在)
기(基)
口현(鉉)
口진(鎭)
순(淳)
한(漢)
口희(羲)
口상(相)
묵(默)
환(煥)
口규(圭)
口길(吉)
종(鍾)
호(鎬)
口구(求)
口양(洋)
권(權)
화(和)
口용(容)
口형(炯)
균(均)
철(喆)
口석(錫)
口용(鎔)
수(洙)
택(澤)
口주(柱)
口동(東)
口목(穆)
희(熙)
엽(燁)
섭(烈)
용(鏞)
철(鐵)
옥(鈺)
口승(承)
口택(澤)
口해(海)

역대인물(歷代人物)

가상(賈 祥) 자(字)는 필정(必禎).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동래(東萊)에서 공훈을 세웠다.

가침(賈 琛) 자(字)는 원보(元寶). 조선(朝鮮) 때 아버지 상(祥)과 함께 동래(東萊)에서 싸웠다. 조부(祖父)인 유약(維鑰)과 아버지 상(祥)의 3대(代) 충효사당(忠孝祠堂)과 정문(旌門)이 왕명(王命)에 의 해서산군(西山郡) 남면(南面)에 세워졌다.

가성(賈 晟) 자(字)는 일승(日昇).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선조(先祖)의 충절(忠節)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가응서(賈應瑞)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일재(逸齋). 조선(朝鮮) 현종(顯宗) 때 부위(副尉)에 올랐다.

가관(賈 瓘) 자(字)는 관옥(觀玉). 조선(朝鮮) 영조(英祖) 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가임(賈 林) 자(字)는 변문(釆文).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가찬(賈 璨) 자(字)는 현문(顯文).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가권민(賈權民) 자(字)는 한편(漢平), 경문(景文) 완(琬)의 아들.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선의 현감(旋義縣監)을 역임하였다.

가인남(賈仁枏) 자(字)는 춘화(春華). 1744년(영조 20) 장사랑(將仕郞)으로 제용감참봉(濟龍監參奉)에 추증되었다.

가언순(賈彦恂) 자(字)는 사국(士國). 1725년(영조 1)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가만석(賈萬碩) 자(字)는 응초(應楚), 학행(學行)이 뚸어났고,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이르렀다.

가문혁(賈文赫) 자(字)는 계훤(季煊), 호는 탁족헌(濯足軒). 1744년(영조 20)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가창한(賈昌漢) 자(字)는 탁운(卓雲).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종되었다.

가익한(賈翊漢) 자(字)는 승운(乘雲). 조선조(朝鮮朝)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가의민(賈義敏) 자(字)는 신보(愼甫). 1728년(영조 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 하였다.

가방열(賈邦烈) 자(字)는 주무(周武).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가한평(賈漢評) 자(字)는 여남(汝南). 조선조(朝鮮朝)에서 수직(守直)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가한홍(賈漢弘) 자(字)는 대도(大度). 조선(朝鮮) 때 효행이 뛰어나서 영조조(英祖朝)에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가만노(賈晩老) 자(字)는 남극(南極), 이조 참판(吏曹參判) 익한(翊漢)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가태경(賈泰慶) 자(字)는 사천(士天), 호(號)는 어은(漁隱). 품성과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했고, 철종(哲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가세철(賈世喆) 자(字)는 재적(載迪), 호(號)는 죽와(竹窩).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고 필법(筆法)이 뛰어났으며, 철종(哲宗)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종되었다.

가종식(賈宗軾) 자(字)는 후지(厚之), 호(號)는 죽헌(竹軒). 조선조(朝鮮朝)에서 가의대부(嘉義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가행건(賈行建) 자(字)는 강현(彊賢), 호(號)는 석호(石湖). 조선에서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명정봉지관(銘旌奉持官) 겸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을 거쳐 1851년(철종 2)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내고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어 충청도 수군병마첨절제사(忠淸道水軍兵馬僉節制使)에 이르렀다.

가일영(賈日永) 조선 철종(哲宗) 때 울진 현령(蔚珍縣令)을 역임하였다.

가중영(賈中永) 호(號)는 정와(定窩). 조선조(朝鮮朝)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가정로(賈廷魯) 시조 유약의 17세손. 정부수립 후 충남(忠南) 예산(禮山)과 서산(西山)․공주(公州)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충남대사무국장과 문교부 예술원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