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11-09 16:47 수정일 : 2018-04-10 15:4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단씨(段氏)는 본래 중국 경조(京兆: 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의 후손이 이름자인 단(段)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 나라 단씨(段氏)는 강음(江陰)과 연안(延安)을 비롯하여 대흥(大興), 풍덕(豊德), 청주(淸州), 고산(高山), 강릉(江陵) 등 19본 (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강음과 연안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강음(江陰)은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속해있는 현(縣) 이름으로 상해(上海)와 남경(南京)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교통의 요 지로 면사(綿絲), 면직물(綿織物) 공업이 성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
강음 단씨(江陰段氏)의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강음현(江陰縣) 출신인 단일하(段一河)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강음단씨세계(江陰段氏世系」에 의하면 그는 1509년(명 무종 정덕4, 조선 중종4)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내원직각(內院直閣)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재성(載聖)은 1522년(가정 원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기주(冀州)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일하(一河)의 현손(玄孫) 희상(希詳)이 명나라 참정(參政)에 침명되어 1597년(선조 30) 원병(援兵)을 이끌고 총병장(摠兵將)으로 조선에 건 너온 아버지 단만리(段萬里)를 따라 동래하여 평양(平壤)에 정착(定着), 풍양 조씨(豊壤趙氏) 익보(益輔)의 딸과 혼인하고 우 리나라에 머물러 살게 되어 동래조(東來祖)로 받들고 있다.
그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린 강음 단씨는 희상(希詳)의 아들 사량(仕良)이 부조(父祖)의 공훈(功勳)으로 좌랑(佐郞)이 되었고, 손자 모동(慕東)은 종사랑(從仕郞)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후 회상의 현손(玄孫)인 오성(五星)이 영조(英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슬하에 태형(兌炯), 진형(震炯) 형제를 두어 강음 단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하였는데, 맏아들 태형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오른 아들 붕서(鵬瑞)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낸 복현(福顯)과 그의 아들 기완(基完 : 오위장을 역임)이 유명 했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윤호(潤浩)는 한말(韓末)에 내장원 통신감(內藏院通信監)을 역임한 동주(東柱)와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다.
인 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음 단씨(江陰段氏)는 남한에 총 174가구, 7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강음단씨조상인물
단재성(段載聖) 자(字)는 직상(直常), 호(號)는 입암(立菴). 중국 명조(明朝)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 기주 안렴사(冀州按廉使)를 역임하였으며 효(孝)로써 노모(老母)를 섬겼다.
단종옥(段鍾獄) 자(字)는 대립. 중국 명조(明朝)에효로써 천거되어 시강교관(侍講교官)을 거쳐 광원 군수(廣源郡守) 를 역임하였다.
단만리(段萬里) 자(字)는 원보(遠甫). 중국 명조(明朝)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 충절사(忠節使)를 역임하고 이어 총병장(摠兵將)에 임명(任命)되어 조선에 출정(出征) 왜적(倭賊)을 소탕(掃蕩)하였고 1597년(선조 30)에 영량사(領糧使)가 되어 재차 조선에 왔다가 이듬해 죽었다. 그후 오성부언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추증(追贈)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단희상(段希詳) 조선조(朝鮮朝)에 중국에서 아버지를 따라 동래(東來)하여 왕검성(王儉城)에 정착, 음보(蔭補)로 참정(參 政)을 지냈으며 귀하(歸化)하였다.
단사량(段仕良)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단모동(段募東) 조선 때 음보(蔭補)로 종사랑(從仕郞)에 이르렀다.
단묵철(段墨鐵) 조선조에 와서 별제(瓦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단오성(段五星)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단태형(段兌炯)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단붕서(段鵬瑞)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단복현(段福顯)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하였다.
단기완(段基完) 자(字)는 자건(子健). 조선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 을 지냈다.
단치협(段致協)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단윤호(段潤浩) 조선조(朝鮮朝)에 통사랑(通仕郞)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단동주(段東柱) 조선 때 내장원 통신감(內藏院通信監)을 역임하였다.
단경옥(段慶玉) 중원군 신니면 신청리 출신. 1910년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이 조인(調印)되자 국치(國恥)를 통탄(痛嘆)하며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앞장 설 것을 결심, 암암리에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등사(騰寫) 배포하고 태극기(太極旗)를 제작하여 은밀히 이웃에 나누어 주며 1919년 4월 1일 신니면 용원 장날을 기하여 총궐기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낭독과 만세(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천지를 진동케 부르짖다가 왜헌병(倭憲兵)에게 동지(同志) 이희갑(李 喜甲), 손승억(孫承億) 등 7명과 같이 체포되어 청주지원(淸州支院)에 1년 형(刑)을 언도, 옥고(獄苦)를 치루다 끝내 조국광복(祖國光復)을 못보고 1943년 운명했다. 198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이 추서(追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