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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김씨] 김진팔(金鎭八)
(1873~) 호(號):방암(方菴) 천도교 종법사로 기미독립만세 때 2만여 주민들을 지휘 만세운동 전개, 이 날 48명이 희생되고 천도교당과 오산학교가 전소됨. 향리에서 현명학교를 설립, 인재 양성에 힘쓴 독립운동가.
[연안김씨] 김찬영(金瓚泳)
(1889~1973) 호:심농(心農) 당진 태생으로 구한말 법관양성소(서울법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약관 20세에 구 한국 재판소 영동지원 판사로 취임, 2년 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직을 버리고 재야법조인으로 애국동포들의 변호를 담당하다가 광복 후 1946년 검찰총장, 1948년 대법관역임. 정년퇴임 후 변호사회 회장에 피선
[연안김씨] 김창섭(金昌涉)
(1889~) 공성단원(共成團員)으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동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
[연안김씨] 김창의(金昌義)
(1886~) 정주태생으로 기미만세운동을 선도하고 만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시행 사명을 띄고 국내로 잠입 조직결성 후 다시 탈출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기자 통의부 비서 겸 재정부장으로 활약 중 의군부(義軍府)사건 때 적군으로 오인되어 순국, 1963년 건국공로훈장 추서.
[연안김씨] 김태영(金泰泳)
(1909~) 영광출신으로 광주사범 재학 시 비밀결사, 성진회(광주학생사건 의 모체)를 조직, 항일사상 운동전개중 1930년10월 일경에 체포되어 약 4년간의 옥고를 치룬 후 향리에서 백수국민학교를 설립(1939년)인재양성에 진력, 1982년 독립유공 포장 받음.
[연안김씨] 김형기(金亨基)
(1884~1966) 평양숭실학교 교사로 있다가 도미,신학대학을 나와 목사가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룸. 광복 후 미군정청 고문 겸 통역관 역임.
[연안김씨] 김중업(金重業)
(1922~) 호(號):여천(如泉) 공학박사, 미국 하바드대학 교수, 서울대학 교수를 거쳐 건축계에 투신하여 국내외에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으며 특히 올림픽공원의 정문(正門)설계를 한 대건축가이다.
[나주정씨] 정종산(鄭宗産)
고려조(高麗朝)에 예빈경(禮賓卿)에 추증(追贈)되었다.
[나주정씨] 정송수(鄭松壽)
정송수(鄭松壽) 고려(高麗) 때 향공(鄕貢)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追贈) 되었다.
[나주정씨] 정가신(鄭可臣)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설재(雪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 1277년(충렬왕 3)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貞寧公)에 봉해졌으며 1284년(충렬왕 10)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1290년(충렬왕 16)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사유(師...
[나주정씨] 정탁(鄭 倬)
고려조(高麗朝)에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나주정씨] 정전(鄭 佺)
고려(高麗)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다.
[나주정씨] 정길(鄭 佶)
고려(高麗) 때 봉상대부(奉常大夫)로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나주정씨] 정억(鄭 億)
고려조(高麗朝)에 지유별장(指諭別將)을 지냈다.
[나주정씨] 정엄(鄭 儼)
고려(高麗) 때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