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1680년) 자는 여차(汝車)이고 호는 묵재(黙齋) 또는 휴옹(休翁)이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1637년(인조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갔고 사헌부에 있을 때 인사행정에 있어서 뇌물을 받고 인재(人材)를 등용하는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伯) 등을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여 백관을 놀라게 한 기백이 있다. 의주부윤, 경상․전라관찰사를 지냈고 평양감사를 거쳐 1667년(현종8) 우의정이 된 후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1676년(숙종2) 변무사(辨誣使)로 청나라에 갔다와서 1678년(숙종4) 재정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이를 사용케 하였다. 미수 허목(許穆)과 남인(南人)을 영도하다가 허목이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과격론에 반대함으로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리게 되어 탁남을 영도하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받았다. 1680년(숙종6) 서자(庶子) 허견(許堅)의 역모사건으로 삭탈관직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1689년(숙종15)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 이사명(李師命) 등을 처형하였다. 그는 식견(識見)이 넓고 총명하였으며 녹봉(祿俸)은 친구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고 비록 정적(政敵)인 서인의 송시열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1795년(정조19) 5세손인 허복(許澓)이 글을 올려 공의 억울한 내용을 하소연하자 정조는 하교(下敎)하기를 “이 대신(大臣)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행적이 죄를 범하지 않았으니 신원(伸寃)하고 관작을 회복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