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1505년) 자는 헌지(獻之)이고 호는 이헌(頤軒)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75년(성종6) 참봉으로 친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선(選) 호당(湖堂)에 수학하였으며 이후 지평, 병조정랑을 거쳐 1482년(성종13) 진현시(進賢試)에 병과로 급제, 필선(弼善)이 되어 세자(연산군)의 선생이 되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지서는 소인이고 허침은 대인(君子)이다” 이와 같이 덕(德)과 인(仁)으로 세자를 지도했다는 뜻이다. 1488년(성종19) 보덕(輔德)으로 승진, 삼강행실을 산정(刪定)하였다. 다음해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또 명나라에 천추사(千秋使)로 다녀와서 성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502년 이조판서가 되고 다음해 우참찬 연산군10년(1504)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지는 못하였지만 조신들을 많이 구명하였다.
공은 천성이 청정하고 온순해서 순화한 기분이 안면에 나타나며 어묵(語黙)과 동정이 단정하고 편안해서 모나게 드러내지 않았다.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고 평소에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여 놀라운 말이나 갑작스러운 낯빛은 하지 않았으며 비록 자제나 노비라도 그가 불평하는 기색을 못했다. 치가(治家)에는 담박(淡泊)해서 생산사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집에서는 종일토록 오직 독서할 뿐이었다. 성종조에 형 허종과 같이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폐출(尹妃廢黜) 어전회의에 불참토록 하라는 누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낙마(落馬)한 다리의 명칭이 종침교(琮琛橋)이다. 때문에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의 많은 사람들이 처벌되었지만 허종․허침 형제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