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월파옹(月波翁) 처사공(處士公) 차종노(車 宗老)의 삼자(三子) 공은 고려충숙왕(高麗忠肅王) 칠년경신(七年庚申)에 탄생하여 공민왕(恭愍王) 십 삼년갑진(十三年甲辰)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겸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가 되셨다. 예설참증(禮說參證)으로 제사법전(祭祀法典)의 조리(條理)를 만들었고 위정척요불(衛正斥妖佛)을 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등과 더불어 대성리학자로 제명(齊名)하였고 많은 명사가 선생의 문하에서 일시에 배출 되였다. 두문동 (杜門洞) 실기(實記)에 의하면 려말의 십건신(十謇臣)의 제일위자이며 신돈(辛旽)을 죽이고 임견미 (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제거 한다는 지론이 정대하였고 친척이라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나 라의 형세가 위태하여 구하지 못함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평산수운암동(平山水雲巖洞)에 은거하여 역리(易理)를 탐독하고 차류보판(車柳譜板)을 새겨 해주신광사(海州神光寺)에 소장하였다. 이때에 이 성계(李成桂)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위덕이 날로 성하니 최영(崔瑩)등이 모의하여 천조(天朝; 中國)에 꾸지람을 얻게 하고자 이성계(李成桂)의 장병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성계 (李成桂)는 위화도(威化島)로 행군하면서 심중이 우번(憂煩)하여 평원(平原)에 유렵(遊獵)을 빙자하 고 수운암동(水雲巖洞)의 공을 찾아가 계책을 물으니 답왈(答曰)「以外服이 犯中國은 一不可也요 以 陪臣이 犯天子는 二不可也라」속국이 중국을 범함이 첫째 가하지 못 함이요 제후가 천자를 범함이 두번째 가하지 못함이라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로 부터 회군하여 조선의 만년종사를 열었다. 개국의 공훈책록일(功勳策錄日)에 조준(趙俊)과 이양우(李良佑)등이 동참을 원하나 공은 식초 다섯말 을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불참하겠다 하고 망복 (罔僕)의 절의를 온전히 한 뜻은 송산(松山) 조운 흘(趙云仡)과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절의와 같았다. 조선태조가 만년에 국본(國本)을 정하고자 하 나 의문이 있어 식자에 문의하고자 하더니 문득 꿈에 운암공(雲巖公) 토옥(土屋)에 들어 간지라 태 조는 소명서찰(召命書札)을 하루에 다섯번이나 내리고 칙서(勅書)가 한달에 세번이나 있어 고구(故 舊)의 정을 버리지 못하여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서찰(書札)로 화답한 후 태조(太祖)가 하사한 역마(驛馬)는 돌려 보내고 초의(草衣)와 청려(淸驢)를 타고 소명에 나아갔 다. 이태조(李太祖)는 미복(微服)으로 궐북용연(闕北龍淵)에 인도하여 몇대의 총종(蔥種)을 원대(苑 臺)에 뿌리면서 정언(正言)은 자식을 능가하는 좋은 사람인데 어찌 이곳에 머무는것을 즐거워 하지 않는가? 공은 은근(慇懃)이 담소(談笑)하고 전대(纏帶)의 총종(蔥種)을 보인것은 불유(不留)의 뜻을 나타 낸 것이다. 이곳이 소위 서총대(瑞蔥臺)이다. 공은 태조가 처음 정언(正言)을 제수 하니 받지 않으니 랑중(郞中)이 의론하고 좌천하여 전농시사(典農侍事)를 제수하나 공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니 이때 사람들이 공을 청상명옥(淸霜明玉)에 비하였다. 이태조(李太祖)는 공이 불유(不留)할 것을 알고 세자(世子)의 륜전계책(輪傳計策)을 문의하니 공은 불가하다 하고 태종(太宗)이 건국에 공훈이 있음을 말하여 태조는 크게 깨달아 세자륜전(世子輪傳)의 계책을 포기하였다. 정도전(鄭道傳) 함부 림(咸傅霖) 조영규(趙英珪) 하륜(河崙)등은 차씨문얼(車氏門孼)이라 운암공(雲巖公)께서 이들의 신분 을 일찍 족보에 직서(直書)한 원한과 위화회군(威化回軍)의 논의에 불참으로 개국훈로(開國勳勞)가 되지 못함을 한하였고, 하륜(河崙)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초친(椒親)인 강호(康昊) 강민(康旻)을 절교하는 등 사유로 강(康), 차(車) 두 씨족을 멸하고자 하던차에 태종이 저사(儲嗣)에 두 마음을 의심함을 틈타서 특별한 음모로 이숙번(李叔蕃)과 더불어 무안대군(撫安大君)의 형제를 원대(苑臺) 아래로 끌고가 추살(椎殺) 하였고, 태조 7년 무인(戊寅) 9월 15일에 운암공(雲巖公)을 차씨족당(車 氏族黨) 70여인과 함께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일시에 추살하였다. 서얼(庶孼)의 출생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신광사(神光寺)에 소장된 차류보판(車柳譜板)을 분탕(焚蕩)하고 사판(史版)을 멋대로 날조하여 차씨(車氏)의 행적을 감추고 역적누명(逆賊陋名)을 입혀 서민으로 전락 시켰으며 차씨문중 에 대한 적족지화(赤族之禍)의 수난이 너무 비참하여 말로 다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