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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최씨] 최영(崔 塋)

작성일 : 2019-11-12 13:59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시호(諡號)는 무민(武愍), 수사공(守司空)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 원직(元直)의 아들. 양광도 도순문사(樣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수차 왜구(倭寇)를 토벌해 공을 세우고 1352년(공민왕 1) 안 우(安 祐)등과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올랐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이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 탁(柳濯)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사주(四州)등지에서 장사성(張士城)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 서북면 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대장군(大將軍) 겸 동북면 체복사(東北面體覆使)를 거쳐 1358년 양광․전라도 왜적(倭賊) 체복사(體覆使)로 오예포(吾乂捕)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여 척을 격파한 뒤 1359년 홍건적(紅巾賊) 4만이 서경(西京 : 평양)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평양윤 겸 서북면 순문사(平壤尹 兼 西北面 巡問使)에 이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 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내고,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창궐하여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 우(安 祐)등과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한 공으로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으며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승진한 뒤 평리(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 유(崔 濡)가 덕흥군(德興軍)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 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가되어 이성계(李成桂)등과 이들을 의주(義州)에서 섬멸, 그 공으로 말과 은(銀)을 하사받고,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燃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보내어 격퇴시킨 뒤, 왕이 국청사(國淸寺)에서 부는 개선주연(凱旋酒宴)을 받았다.

다음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 都指揮使)로 강화(江華)에 쳐들어온 왜구와 싸우던 중 신 돈(申 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 이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당했으며, 1371년 신 돈이 처형당하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보직되었고, 1373년 육도 도순찰사(六道道巡察使)․출척장수(黜陟將帥), 다음해에 경상․전라․양광도 도순문사(慶尙 全羅 楊廣道 都巡問使)를 역임하고 정난공신(定亂功臣)의 호를받았다.

이어 제주(濟州)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 全羅 慶尙道都統使)로 난을 평정하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승진,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하자, 출정을 자원하여 홍산(鴻山) 싸움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육도 도통사(六道都統使)․삼사 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서강(西江)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1378년 다시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풍덕)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섬멸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1380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철원(鐵原)에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이듬해 수시중(守侍中)을 거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내고,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다가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에 취임,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등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우다 패전, 체포되어 고봉(高峰 : 고양)에 유배되고 합포(合浦)에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고려 구파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진세력 이성계의 군벌(軍閥)과 대결하여 고려를 지키려 한 강용(剛勇)․청렴(淸廉)한 장군이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구파세력이 몰락하여 고려왕조의 종막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