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인조 24)-1715(숙종 41) 호는 명곡(明谷). 1671년(현종 12)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봉교(奉敎) 등을 역임, 1685년(숙종 11) 부제학으로 등용되고, 한 때 파직되었다가 선기옥형(璇璣玉衡;渾天儀)을 수리하는 데 참여한 후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697년(숙종 23) 우의정으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좌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하여 <국조보감>의 편찬과 <여지승람>의 증보를 주청, 실현케 했다. 1701년 영의정이 되어 희빈(禧嬪) 장씨의 처형을 반대하여 진천에 부처(付處)됨. 1702년 풀려나와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고, 노론(老論)·소론(小論)의 영수(領袖)로 많은 파란을 겪으며 도합 여덟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으며,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을 저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 명길(鳴吉)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