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6(선조 19)-1647(인조 25)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의 문인. 1605년(선조 38) 문과급제, 기남(起南)의 2자.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전적(典籍)이 되고, 광해군의 폐모론(廢母論)에 관련되어 파면, 김유(金瑬)·이귀(李貴) 등과 대계를 세워 1623년 인조를 영립, 이조참의로 1등공신이 되고 왕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이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어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 호패청당상(號牌廳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지탄을 받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에 청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정은 주전론(主戰論) 일색이었으나 명길 혼자만은 주화론으로 일관하여 화의를 성립시키고, 우의정이 되었다. 청도(淸都) 심양에 들어가서 4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귀국하여 영의정에 이르러서 졸하였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