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10-29 11:35
1480(성종 11)~1548(명종 3).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재(拙齋). 한양 명례방(明禮坊)에서 출생. 1506년(중종 원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랑(禮郞)이 되었고, 1511년(중종 6)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가 같은 해 12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배수하였다. 1512년(중종 7)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14년(중종 9)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제수하였다가 1518년(중종 13)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하고 동문선(東文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521년(중종 16)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배수하였고 같은 해 사헌부집의 겸 경연시강관(司憲府執義兼經筵侍講官)으로 옮겼다. 1522년(중종 17)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523년(중종 18)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고 1524년(중종 1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배수하였다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 좌승지(左承旨)를 배수하고 영해부사(寧海府使)를 보직하였으나 이 때에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목민자(牧民者)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사의를 표한 후 창고를 열어서 진휼하고 녹봉을 출연하니 도적이 감화되고 경내가 흡연(翕然)해졌으며 지금도 우애거사비가 있다. 1528년( 중종 23)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제수하였고 1533년(중종 28)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배수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1535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1538년 사직하고 낙향하니 많은 동료들이 아쉬워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재상(宰相)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시서에 전념하였다. 사림에서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하였다. 저서 <화왕전 花王傳>은 학계에 연구대상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