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9 11:45
1782(정조 6)~1850(철종 1)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판서진관(鎭寬)의 아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이듬해 응교(應敎)가 되고, 1822년 대사헌(大司憲)에 특진, 1826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829년 세손부(世孫傅), 이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우부빈객(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이때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면서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이에 대결,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해 그의 형 조만영(趙萬永)이 어영대장(御影大將)으로 발탁(拔 擢)되면서 왕의 측근이 되고 조씨 일가의 세도가 강화되자 호조와 이조의 판서(判書)를 지내면서 조정에 조씨 세도의 독무대를 이루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고,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여 계속 천주교도를 박해했고, 죽을 때까지 4차례에 걸쳐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했다.
1816년(순조 16)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의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유연정(劉燕庭)에게 우리나라 금석화 자료를 주어 연구하게 했고, 귀국한 후에도 계속 김정희(金正喜)가 발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拓本)과「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등을 보내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헌종 13)「국조보감(國朝寶鑑)」의 찬술에 참여했다. 헌종(憲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