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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 조엄(趙 曮)

작성일 : 2019-09-09 11:36

1719(숙종 45)1777(정조 1) 자(字)는 명서(明瑞), 호(號)는 영호(永湖),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판서(判書) 상경(尙絅)의 아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사서(司書)․수찬(修撰)․지평(持平)을 역임, 1757년 교리(校理)․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758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 1760년 창원 마산창(昌原馬山倉)․진주 가산창(晋州駕山倉)․밀양 삼랑창(密陽三浪倉) 3개 조창(漕倉)의 증설을 건의, 이제까지 백성들의 부담으로 된 세곡 수송(稅穀輸送)의 폐해를 시정함으로써 민폐(民弊)를 덜고 공물(貢物)의 수납을 공정케 하여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했다.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내고, 1763(영조 39)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갈 때 쓰시마도(對馬島)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여 이듬해 귀국할 때 그 재배 저장법(栽培貯藏法)까지 익히고 귀국, 동래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케 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했다.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이조 판서(吏曹判書)․제학(提學) 등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무고를 받아 파직, 그후 혐의가 풀려 다시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를 지냈다.

1777(정조 1) 홍국영(洪國榮) 일파의 무고로 또다시 위원(渭原)에 유배, 처형을 기다리던 중 그의 아들 진관(鎭寬)의 직소(直訴)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金海)에 이배(移配), 배소(配所)에서 병사했다.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재정의 충실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