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9 11:28
1690(숙종 16)~1752(영조 28) 자(字)는 치회(稚晦), 호(號)는 귀록(歸鹿)․녹옹(鹿翁),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 1713년(숙종 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용강 현령(龍岡縣令)․지평(持平)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풍원군에 봉해졌다.
이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 이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1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 하여, 이듬해 쓰시마도(對馬島)의 화재로 조정에서 위문미(慰問米)를 보내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
1733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기용되고, 총융사(摠戎使)․공조 판서(工曹判書) 등을 거쳐 1736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전임하여 이듬해 형정(刑政)의 불공 평함을 상소하고 다시 파직당했다.
1738년 이조 판서로 복직, 그후 좌참찬(左參贊)․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공조(工曹)․호조(戶曹)․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1740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1742년 양역 사정청(良役査正廳)을 복설(復設)케 하고, 이듬해 문안사(問安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6년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전임했다가 다시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1749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이어 다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1751년 좌의정(左議政)에 전임, 이해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주장으로 호전법(戶錢法)의 실시가 논의되자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으로서 그 구체적 절목(節目)을 결정하여 양역(良役)의 합리적 개혁을 보게 했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죽었다.
노론(老論)에 속했으나 탕평책(蕩平策)을 지지, 영조(英祖)의 정책 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조 1수가「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