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9 11:17
1606(선조 39)~1679(숙종 5) 자(字)는 군헌(君獻), 호(號)는 취병(翠屛),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승지(承旨). 희보(希輔)의 아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32년 인조(仁祖)의 부친 정원군(定遠君) 부(琈)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는 데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1643년 부교리(副校里)․응교(應敎).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고, 1646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집의(執義)로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여「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홍청도 관찰사(洪淸道觀察使)를 거쳐 1655년(효종6)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통신사(通信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병조 참판(兵曹參判)․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도승지(都承旨)․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1658년 형조와 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663년 대사헌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전임,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 8)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을 거쳐 1674년(현종 15)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으로서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다 양주(楊州)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