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명종 13)~1597(선조 30). 자(字)는 경행(景行), 참판(參判) 호(灝)의 아들. 성품이 강직하고 기계(奇計)가 뛰어나 활소기와 창쓰기를 잘해 24세되는 1581년(선조 1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힉문 연구로 수신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기를 모아 무기를 만들어 삼촌 말(沫)을 따라 의거(義擧)하여 고성에서 기병하여 곤양 등지의 왜적을 소탕한 공으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이 되어 계속 섬멸하여 이순신(李舜臣)에게 알려져 그 막하(幕下)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군에게 포위된 진주(晉州)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하다 도중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1796년(정조 16)에 병조 참판에 추증(追贈)되고 성주(星州)와 진주(晉州)에 제씨쌍충사적비(諸氏雙忠史蹟碑)가 정조(正祖)의 어명(御命)으로 건립(建立)되어 현재(現在)까지 문화재(文化財)로 보존(保存)되고 있으며 1812년(순조 12) 계부(季父) 말(沫)은 충의(忠毅)로 재시(再諡)되고 공은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追贈) 받았다. 각도(各道) 읍지(邑誌) 및 선현(先賢)들의 문집(文集)에 전공(戰功)에 대한 사적(史籍)이 기록(記錄)되어 있고 임란공신숭모회(壬亂功臣崇慕會)에서 보령시(保寧市)에 공신비(功臣碑)를 세웠고 대구(大邱) 충의단(忠義壇)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고 당항포(唐項浦) 현충탑(顯忠塔)에 사적(史蹟)이 기록되고 고성(固城)에 신도비(神道碑)가 건립(建立)되고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