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찾기

조상찾기

HOME > 조상찾기

[영일정씨] 정철(鄭 澈)

작성일 : 2019-09-03 10:48

1536(중종 31)1593(선조 26) 자(字)는 계함(季涵), 호(號)는 송강(松江).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판관(判官) 유침(惟沈)의 아들.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인.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 때문에 궁중에 출입, 어린 경원대원(慶原大君 : 명종)과 친숙해 졌다.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一族)으로서 아버지가 유배(流配)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 다녔다. 1551(명종 6) 특사되어 온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령(昌平)으로 이주,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동안 수학하는 동안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碩學)들에게 사사(師事), 이 이(李 珥)․성 혼(成 渾) 등과도 교유했다.

1561(명종 16) 진사시(進士試), 다음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 지평(持平)․전적(典籍) 등을 역임, 1566(명종 21) 직강 (直講)․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를 지낸 뒤 이 이(李 珥)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8(선조 1) 수찬(修撰)․교리(敎理)를 거쳐 다시 지평(持平)이되었고, 1575(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사간(司諫)․집의(執義)․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 수(李 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선조 1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등용 그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면서 지방장관 으로서 보다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적 재질(才質)을 나타낸 작품을 썼다.

그의 최초의 가사(歌辭) 「관동별곡(關東別曲)」은 금강산(金剛山)을 비롯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 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훈민가(訓民歌)16 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함에 있어 포고문이나 유신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어 지은 것이다.

1583(선조 16)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 158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 (論斥)으로 다음해 사직,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어 정여림(鄭汝立)의 모반사건(謨反事件)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적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 진주(晉州)로 유배,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일본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 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大家)로서 시조(時調)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사사상(詩歌史上) 쌍벽(雙壁)으로 일컬어진다. 죽은 후에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9(광해군 1) 신원(伸寃)되고, 1623(인조 1) 관작이 복구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