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8-29 14:56
1535(중종 30)~1623(인조 1) 자(字)는 덕원(德遠), 호(號)는 내암(萊菴), 건(健)의 아들. 조 식(曺 植)의 문인.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 을 받고, 1575년 황간 현감(黃澗縣監)에 발탁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持平)을 거쳐 1581년 장령(掌令)에 승진, 이해 서인(西人) 정 철(鄭 澈)․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다 해직(解職)당하고 낙향했다.
1592년(선조 25)에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陜川)에서 김 면(金 沔)과 의병을 모집, 성주(星州)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물리쳤고, 10월 영남 의병장(嶺南義兵將)의 호(號)를 받았다. 이듬해 의병 3천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咸安) 등지를 방어했으며 1602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 事)․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내고, 서인인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사직케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北人)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소북(小北)․대북(大北)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솔했으며, 1601년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光海君)의 즉위를 주장했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讓位)코자 할 때 류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이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가던 도중 풀려 나와 대사헌(大司憲)에 기용되어 소북 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한 후, 좌참찬(左參贊)에 특진되고 서인을 두둔했다 하여 거유(巨儒) 이언적(李彦迪)․이 황(李 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청금록(靑衿錄 : 儒 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분란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듬해 이이첨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폐한 뒤 증살(蒸殺)시키게 했고, 이해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161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참형(斬刑)되고 가산이 적몰 (籍沒) 당했으며 이후 대북은 정계에서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