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곡산연씨

작성일 : 2019-06-24 12:35 수정일 : 2019-07-01 14:19

시조와 본관의 유래

延氏는 본래 中國의 南陽에서 系出된 姓氏로 高麗 때 中國河南省 弘農 出身인 延繼胃f의 7세손 延壽舊이 齊國大 長公主(高麗 忠烈王妃)를 暗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谷山 에 정착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延F氏의 始源을 이루게 되 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繼容을 시조로, 本貫을 谷山으로 世 系를 이어왔다. 문헌에는 延氏의 本貫이 谷山의에도 開 城, 廣)+!. 南陽, 西原(淸)+I의 別稱). 忠,!+I. 등 30여개로 전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谷山延표氏의 世居地名에 불과하 다. 현재의 延氏는 오직 谷山 單一本으로 되어 있다.

1985년 經濟企劃院의 人口調査에 의하면 谷山延氏의 家 口數는 남한에 총 6.485가구. 37.940명 이 살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谷山은 황해도 東北端에 위치하고 있으 며, 高麗初에 谷J+J로 개정하였다. 조선 太祖朝에 谷山으 로 고쳐서 府로 昇格하였다가 太宗 때 郡으로 格下되었 으며. 1669년(顯宗 10년)에 다시 府로 昇格되었고. 1895년(高宗 33년)에 다시 谷山郡이 되어 開城府에 속 하였다가 1914년에 황해도에 속한 郡이 되었다. 別稱은 德頓忽, 古谷, 鎭端, 象山이다.

1. 中興의 祖上 延嗣宗

고려의 국운이 쇠퇴해져 存亡의 危機에서 방황할 무렵. 易姓 혁명을 꾀하던 이성계는 同鄕(함흥) 출신이며 친구 이자 同僚였던 延柱를 同調 料合하고자 喝次 요청하였 다. 그러 나 延柱는 忠臣은 不事二君이 라는 君臣의 養理 를 주장하여 끝내 사양 거 절하고 두문동으로 隱適하여 고려 신하로서의 지조와 절개를 고수하였다. 그러면서 太祖는 당시 16세 少年이 었던 아들 延赫]宗을 魔下에 입문시키면서 장래를 부탁하였다.

천성이 영민 근면하고 기질이 강직하였던 延嗣宗은 勤勤 收fx.로 修學한 다음 散員으로 出仕하여 從事·하던 중 威 化島回軍시 이성계를 보좌하였다. 그 공으로 開國功臣이 되고 原從功臣의 祿卷이 수여되었다. 또한 別記 업적과 같은 중직을 섭력한 공적으로 谷城郡에 이어 谷山府院君 에 봉군되었다. 그는 谷山延氏 創始以後 최초로 諭號(靖 厚)를 받은 英傑이며, 문중의 영예를 顯揚한 門中 최고 의 조상으로 後裔들이 推仰敬慕하고 있다.

靖厚公 延嗣宗은 入仕후 50여년간 4대조(太祖, 定宗, 太 宗. 世宗)에 걸쳐 奉職하였고. 世宗 16년(1434년)에 향 년 6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조정은 층신의 殖命에 대 한 弟意로 3일간의 微朝를 함과 동시에 厚~Jl의 膳儀와 함께 典禮官을 파견했다. 公의 運柄는 下賜한 賜牌地(서 울시 노원구 하계동)에 禮葬하였다. 공은 不遷位로 奉享 되 어 春秋로 祭享을 奉祀하고 있다.

 

2. 偶義將延忠秀

丁未士禍(乙巳士禍의 後紹) 이후 문중이 당한 被禍의 상 처는 가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사건의 장본인과 관련자들에 대한 酷刑 및 惡罰에 그치지 않고, 수효가 적 었던 씨족 전체에까지 파급되었다. 무려 한 세대(30년) 가 지나도록 連累의 시효는 消滅되지 않고, 執權勢力으 로부터 각종 제재와 소외 등의 過迫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문중 인사들은 社會進出의 기회마저 近斷ffeiJ奪 된 채 절망과 침체 상태에서 戰戰競競하였다.

세월이 흘러서 40여년이 지난 宣祖 25년(1592년)에 壬 辰倭亂이 일어났다. 倭[R가 층청도 청안현에 침입했을 때, 유생 延忠秀(別稱 安陰公)는 분연히 창의 궐기하여 적을 궤멸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地域 民과 官員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음은 물론 오랫동안 소 외와 멸시로 위축되었던 문중의 位相을 만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公은 전란의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선조가 蒙座했던 의주의 行f[所까지 密行하여 승전보를 전함과 동시에 왕 을 위문하여 君臣有養의 綱常 實賤에 솔선하였다. 당시 공의 나이는 36세였으며 가상할만한 공적으로 각별히 천 거되어 重林jjt(경기 인천) 察訪에 임명되었고, 그 후 경상도 안의현감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失壁되었던 문중의 위 신과 百年停科의 重愍은 延忠秀의 공적으로 인해 해제되 었고, 谷山延氏門中은 사대부 가문 본래의 반열을 찾게 되었다. 공은 縣監職을 퇴임한 뒤 향리로 귀환하여 修治 鄕校에도 심현을 기울여 원근에 竹f'l의 功名이 자자하고 稱1/ili이 不盡하였다.

光海君 13년(1621년)에 享年 65세로 他界하니 문중은 賢祖로 추앙하고, 地域儒林은 名儒로 추대하여 淸安·의 金塘書院에 配享되어왔다.

公은 관직에서 퇴임한 후 초야에서 평생을 綱常을 숭상 하며 층효에 충실하였다. 信義와 謙讓으로 공조하며 서 민 구휼에 진력하는 한편, 엄격한 교훈으로 자제를 망라 한 후학들의 勤學을 권장하여 인재 배출의 공적이 다대 했고, 鄕儒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天壽 75세로 終考命하자, 淸安의 金塘書院에 配享하였다.

谷山延氏 世居地

당시 肅宗은 仁顯王后를 廢位함과 동시 에 희 빈장씨 소생 의 王子(景宗)를 世子로 책봉하였다. 이에 대해 노론파 谷山延氏시대는 변하여 53년이 지난 1740년(영조 33년)에 공은 다시 追贈되 어 吏曹判書와 弘文館 및 禮文官 兩官 大提 學에 追敍되었으며, 다시 1779년(정조 3년)에 毅愍이란 盆號가 내려졌다. 지역의 鄕儒들은 공의 孤節을 崇敬 推 仰하여 加德金岩書院와 淸安의 金塘書院에 配享하였다. 지금도 청주시 모충동에 忠孝兩全의 施門이 층신의 모습 만큼이나 毅然端正하게 존재하면서 옛 자취를 더듬게 하 고 였다.

靖厚公 影本(靖厚祠 奉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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