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2-13 13:58
?~1258(고종 45) 중서령(中書令) 항(沆)의 아들. 경림사(景林師) 예 기(芮 起)에게 시필(詩筆)을, 권 위(權 韙)․임 익(任 翊)에게 정치를, 정세신(鄭世 臣)에게 예(禮)를 배웠다. 1255년(고종 42)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고, 1257년 아버지가 죽자 차장군(借將軍)․교정별감(敎定別監)이되어 대대로 이어온 정방(政房)을 인수하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판이병부어사대사(判吏兵部御史臺事)가 되었으나 사양했다.
집정하자 인심을 수습하려고 연안(延安)의 주택과 정평궁(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바쳤으며, 가미(家米) 2,5 70여 섬을 내장택(內莊宅)에, 포․백․유․밀(布帛油蜜)을 대부시(大府寺)에 바치고, 또 흉년에자기 창고의 곡식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초기에는 선정(善 政)을 했으나 차츰 횡포하기 시작하여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자 장군 변식(邊軾) 등으로 강화 수획사(江華收獲使)를 삼아 약탈을 자행케 했고, 노비(奴婢)에게 벼슬을 주는 특례를 만든 아버지 항의 예에따라 노비에게 낭장(郎將)의 벼슬까지 주었다.
우매하여 현사(賢士)를 우대하지 않고 경박한 무리인 류 능(柳 能)․최양백(崔良伯) 등과 사귀고, 그들의 무고에 따라 살육을 함부로 하여 인심을 잃고 비난이 높던중 1258년(고종 45) 마침내 대사성(大司成) 류 경(柳 璥),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 낭장(都領郎將) 임 연(林 衍)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4대 60여년에 걸친 최씨(崔氏)의 무인정권(武人政權)은 끝을 맺 고, 형식적 이나마 왕정(王政)의 복고(復古)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