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찾기

조상찾기

HOME > 조상찾기

[풍산심씨] 심수경(沈守慶)

작성일 : 2018-08-30 10:18

1516(중종 11)~1599년(선조 32), 字는 희안(希安), 號는 청천당(聽天堂). 좌의정 정(貞)의 손자로 만포진첨절제사 사손(思遜)의 長子. 13세 때 부친을 잃고, 15세 때 조부 좌의정 정(貞)과 숙부 부제학 사순(思順)까지 김안로(金安老 )의 무고(誣告)로 죽임을 당하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친(慈親)의 교육과 면학으로 역경을 이겨내었다. 1543년(중종 38) 생원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로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출사하였다.

호당(湖當)에 피선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와 지제교(知製校)에 뽑혀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무신(武臣)이 뽑히는 자리인 겸선전관(兼宣傳官) 순찰사(巡察使) 종사관(從事官) 비변사랑청(備邊司郞廳)과 제조(提調)에 뽑힌 유장(儒將)이다.

삼사(三司)와 육조(六曹)의 諸職을 두루 편력하고 1556년(명종 11)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시발로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를 순력하였다. 그 외의 외직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 안변부사(安邊府使) 함경도병마절제사(咸鏡道兵馬節制使)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한성부윤(漢城府尹), 1584년(선조 17) 좌참찬(左參贊), 1586년(선조 19) 좌찬성(左贊成), 1590년(선조 23)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재상(宰相)직에서 물러나 경도유수(京都留守)로 재임 중, 호서(湖西)에서 병으로 쉬고 있을 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돌발하자 호서지방의 의병을 규합하여 77세의 노신(老臣)으로 왜적과 싸우는 중 도체찰사(都體察使) 겸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과 건의대장(建義大將)에 임명되어 왜병 퇴치를 지휘하였다.

1597년 임란이 소정된 82세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54년간 나라 일에 몸담았다.

관직을 떠나서는 과천(果川) 비산동(飛山洞) 오두막집에 우거(寓居)하면서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사후에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하고 1599년, 향년 84세에 卒하였다.

1562년(명종 17) 경기 관찰사로 재임 시에 정릉(靖陵)을 이장할 때 담당관리의 잘못으로 대여(大輿)가 한강에 이르도록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 된 일이 있고, 1565년(명종 20)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가서는 잡신(雜神)을 섬기는 칠성당과 송악산의 음사(淫祠)를 모두 불태우고 무당들을 추방한 일과, 임기를 마치고 개성을 떠나올 때 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참아놓지 못했으며, 비를 세우고 노래를 지어 사모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노래가 전해진다고 한다. 75세와 81세에 득남(得男)하여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미역을 보내며 축하한 일 등, 여러 일화가 있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사어(射御)에도 뛰어났으며, 염근(廉謹)한 문신으로 1601년(선조 34)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조선조의 명상(名相)이다. 그 두 아들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저서로는 견한잡록(遣閑雜錄)과 시부(詩賦)를 모은 청천당집(聽天堂集)이 있고, 귀전창수(歸田唱酬)와 상제잡의(喪制雜儀)가 있다고 전한다. 산소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에 산소와 사당이 서울시 문화재 지정 77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