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02 14:43
1600(선조 33)~1644(인조 22) 자(字)는 군옥(君玉), 호(號)는 하빈옹(河濱翁), 영의정 방(昉)의 손자, 해숭위(海崇尉) 신지(新之)의 아들. 1616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설서(設書)를 지낸 후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으로 사직하고 은퇴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지평(持平)에 등용되었다.
정언(正言)․수찬(修撰)․집의(執義) 등을 역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교조(敎條)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敎化)했으며, 부병(府兵) 2천 명을 장정(壯丁)으로 교체하고 군기(軍器)를 정비하여 정병(精兵)으로 개편(改編)했다.
1635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들과 동서양무(東西兩廡)의 위패(位牌)를 뒷산에 묻고 오성․십철(五聖․十哲)의 위폐만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옮겼다. 1637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주목 사(忠州牧使), 다음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641년 부제학으로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하다가 어머니의 병으로 사직을 원했으나 도리어 일시적인 작은 병을 핑계로 왕을 속였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1643년(인조 21)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