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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작성일 : 2018-08-01 15:42

철종이 재위 14년(1863) 12월 8일에 후사없이 승하하자, 익종비이자 헌종모인 조대비(신정왕후)는 원로대신 영중추부사 정원용의 발의형식을 빌어 흥선군의 제2자인 12세의 명복을 익종대왕의 뒤를 잇는 것으로 명하였다. 이에 따라 명복은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진 후 즉위하였으며, 헌종비와 철종비가 생존하고 있었지만 조대비는 어린 임금의 어머니가 되어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고종의 가계는 영조(英祖)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莊祖)에서 시작된다.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洪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정조(正祖)이고, 사도세자와 양제(良?) 임씨(任氏)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과 경빈박씨 사이에서 은전군(恩全君) 세 아들이 태어났다. 둘째 아들인 은신군 진(?)이 17살의 나이로 후사없이 죽자, 순조 15년 12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5대손인 생원 병원(秉源)의 아들 구(球)가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남연군(南延君)으로 봉작받았다. 남연군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가 흔선군(興宣君) 하응으로 흥선군은 영조의 고손자(高孫子:玄孫)가 되는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15세에 흥선부정(興宣副正), 17세에 동몽교관, 22세에 흥선정(興宣正), 24세에는 흥선군(興宣君)으로 봉작을 받았다. 여흥(驪興) 민씨(閔氏) 판돈녕(判敦寧) 효헌공(孝獻公) 치구(致久)의 딸(?~1899)을 부인으로 맞아 장자 재면(載冕:1845~1912)과 차자 재황(載晃: 1852~1919, 命福, 熙) 및 두 딸을 두었으며, 서자(庶子) 재선(載先)과 서녀 하나가 있었다.
고종은 1852년 7월 25일(음력) 청방(靑坊) 소재의 흥선군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다. 자는 성림(聖臨)으로, 후에 명부(明夫)로 고쳤으며, 호는 주연(珠淵)이다.
무후(無後)한 대군(大君) 왕자(王子)를 모두 계후(繼後)케 하고, <선원속보(璿源續譜)>의 간행,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하 제파(諸派)의 항렬(行列)을 확정하고 타성(他姓)도 이에 준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자?세손의 묘호를 원(園)으로 승격시키고, 효창원(孝昌園) 외의 원을 개호(改號)토록 하였으며, 종과를 설치하는 등 종실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이는 일본의 양위협박의 단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고종은 1907년 7월 황태자에게 국정으로 대리하게 하였으나, 일본은 이에 만족치 않고 양위를 강요하였다. 때문에 황태자에게 전위(傳位)하고, 영왕(英王)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통감부는 1907년 7월 20일 중화전에서 양위식으로 권정례(權停禮)를 마련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합병되면서 리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승하하였다. 장지는 금곡에 있는 홍릉(洪陵)으로 명성황후의 묘와 합장되었다.
제26대 왕 고종태황제(이하 고종이라 함)은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43년 7개월 간 재위하였다. 고종은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1866년 3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는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정호(貞鎬)이다. 16세되던 1866년 고종의 생모인 흥선대원군 부대부인(興宣大院君 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고종 8년인 1871년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만에 요절하였고, 고종 11년인 1874년 2월 8일 후일 순종황제가 되는 세자 척(?)을 낳았다. 이 외에도 두 아들과 딸을 더 낳았으나 모두 일찍 요절하였다. 1895년 8월(음력)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함으로써 격동의 시기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생을 마감하였다. 1895년 10월에는 왕후의 위호를 복립(復立)했고,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고종은 황후 민씨 이외에도 몇 명의 후궁을 두었다. 순헌황귀비 영월엄씨는 증 찬정(贈 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18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이름은 선영(善英)이고, 고종보다 2살 연하이다. 8세 때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다가, 황후가 시해된 후인 고종 33년 즉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부터 고종을 모셔, 1897년 9월 25일 아들 은(垠)을 낳고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다시 순비(純妃)로 책봉되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로 황제가 되면서 순헌귀비(純獻貴妃)로 진봉되었다. 은(垠)은 영왕(英王)에 책봉되었는데, 국운의 쇠망과 함께 유학의 명목하에 11세의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귀인(貴人) 영보당(永保堂) 이씨(李氏) 이름은 순아(順娥)는 고종의 1남인 완화군(完和君) 선(?)을 낳았다. 귀인 장씨(張氏)는 고종의 3남인 의화군(義和君) 강(堈) 즉 의왕(義王)을 1877년 출산하였다. 귀인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는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유일한 생장옹주인 덕혜옹주(德惠翁主)를 낳았다. 이외에도 귀인 광화당(光華堂) 이씨가 왕자 육(堉)을 낳았고, 귀인 정씨(鄭氏)가 왕자 우(?)를 낳았으며, 귀인 내안당(內安堂) 이씨가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